2018년 5월26일 토요일 아침 메신저로 기사 링크를 받았다. 양승태 대법원의 법원행정처가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 국정 운영에 협조한 사례로 ‘KTX 승무원 판결’을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답장을 바로 보낼 수 없었다. 정치적 판결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막상 문건으로 나오니 “그럴 줄 알았다”라고 쉽게 답하고 싶지 않았다. 3년 전 세상을 떠난 친구의 죽음이 원통하고 억울했다. 우리나라 사법부가 사람 목숨을 한낱 거래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문건은 그 판결을 “노동 개혁에 기여할 수 있는 판결”이라고 표현했다. 처음 싸울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문제가 “비정규직의 꽃”이고 다른 비정규직까지 큰 여파를 미치기 때문에 해결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어왔다. 사실 한 번도 바란 적 없는 타이틀이었다. 사흘 뒤인 5월29일, 2015년 파기환송 판결을 받고 난 이후 처음으로 대법원 앞에 섰다. 소리쳤다. “대법원마저 정권과 야합하고 청와대와 대통령의 뜻에 따라 이 수많은 여성 노동자의 꿈을 짓밟아버렸습니다. 누구 책임입니까.” 김명수 대법원장 면담 요청서를 들고 대법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대법정인 줄도 모르고 대법정에 들어갔다. “정상적인 절차를 밟으라”는 법원 직원에게 “당신들은 절차를 지켜 내 친구를 살해했나”라고 묻고 싶었다. 울부짖는 사진이 다음 날 신문 1면에 실렸다. 그 사진을 보고 14년 전 KTX 여승무원 원서를 냈던 때가 떠올랐다.

ⓒ시사IN 신선영3월18일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의 조합원들이 3년 전 대법원의 판결 이후
스스로 목숨을 거둔 동료가 묻힌 지방의 한 추모공원을 찾았다.


2004년 1월6일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겨울 KTX 여승무원 1기 모집 공고를 봤다. 준공무원 대우에 정년 보장이라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승무원 하면 항공사라고 생각했는데 철도에도 승무원이 있다니, 게다가 안정적인 직장이라니 장점이 컸다. 언론에서도 ‘지상의 스튜어디스’라고 분위기를 띄웠다. 원서를 넣었다. 351명 뽑는 데 4600명 넘게 지원했다. 13.1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KTX 여승무원 연수 기간과 동시에 진행 중이던 대한항공 2차 면접날이 겹쳤다. 대한항공 1차 면접을 통과한 상태였다. 고민을 했지만, 부모도 민간기업보다는 당연히 공기업을 가는 게 낫다고 했다. 대한항공을 포기하고 KTX를 택했다. 입사 동기 중에는 나처럼 항공사 입사를 포기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다니던 항공사를 그만두고 온 동기도 있었다. 일반 사기업이 아니라 나라가 하는 일인데, 얼마나 철저하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지 기대가 컸다.

2004년 1월26일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철도청(현 코레일) 경영연수원에서 철도청 직원들과 함께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체계적인 교육을 기대했지만 기간은 2주에 불과했고 안전훈련도 보여주기 식이어서 다소 실망했다. 그런데 철도청 유관 기관인 홍익회에서 온 사람이 ‘너희들은 홍익회 직원’이라고 갑자기 강조하기 시작했다. 홍익회 건물에서 입사 시험을 보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채용 대행을 하는 곳이라고 여겼다. 채용 면접에도 철도청 직원이 들어왔다. 당시에는 외주 위탁, 원청과 하청 같은 개념이 지금처럼 널리 퍼져 있지 않았고 소속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철도청이 운영하는 KTX의 승무원이 되는 줄로만 알았다. 의아했다. 우리를 교육하는 교수들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내가 들은 답은 이랬다. “철도청 직원이 공무원인데 나라에서 아직 공무원 TO (정원)를 내주지 않았다. 내년에 철도공사가 되면 직접고용 정규직화를 할 것이다. KTX를 1년만 운행하고 접을 것도 아니고 당연히 직접고용이 될 거다. 그러니 ‘단군 이래 최대 국책사업’의 첨병으로 열심히 일해라.” 함께 교육받던 철도청 소속 열차팀장들도 말했다. “내년에 너희 정규직 될 텐데 자격증 따놓으면 수당 더 받을 수 있어.” 철도청 사람들이 기정사실로 알고 있던 그 말을 믿고, 우리 1기 여승무원들은 기간이 2004년 3월4일부터 12월31일까지로 되어 있는 근로계약을 홍익회와 맺었다(시승 등 업무는 1월부터 이미 시작했다). 정규직 전환에 대비해 팀장들과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공부했다. 열차조작산업기사 자격증을 땄다.

ⓒ시사IN 신선영2017년 2월10일 김승하 지부장이 자택에서 10여 년 전 입었던 승무원 유니폼을 입어보고 있다.


2004년 4월1일 KTX가 개통했다. 나는 서빙 아르바이트도 해본 적이 없었다. 고객들에게 지적당할까 봐 일부러 더 활짝 웃었다. 처음 생긴 KTX에 사람들은 불만이 많았다. 왜 열차가 뒤로 달리느냐(역방향에 앉은 승객이었다), 왜 바로 시속 300㎞로 달리지 않느냐…. 초창기 쏟아지는 민원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 ‘우리가 KTX의 이미지를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버텼다. 포털사이트 다음에 인터넷 카페를 열고 승객 민원을 공유하며 해결책을 고민했다. 그런데 우리를 관리하는 회사인 홍익회에 개선안을 전달해도 답변이 함흥차사였다. 민원은 빗발치는데 문제 해결에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그러면서도 홍익회는 그 카페에 공지사항이나 업무 지시를 올리기 시작했다. 여승무원들 사이에서 ‘우리 무슨 동호회니?’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여승무원이 일하다 KTX 차체에 감전되는 사고를 당해도 홍익회는 적절한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우리를 관리하는 간부가 재계약을 들먹이며 술자리로 불러내 성추행하는 일도 생겼다.

사법부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2005년 1월1일 철도청은 한국철도공사(이하 코레일)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코레일이 아니라 철도유통이라는 코레일 자회사로 넘겨졌다. 홍익회에서 회사 이름만 바뀌었다. 역시 1년짜리 계약직이었다. 정규직 전환은 점점 없던 얘기가 되어갔다. 노동조건은 나빠졌다. 월급을 중간에서 철도유통이 떼어가고, 휴가도 제대로 못 썼다. 철도유통에 사람을 늘려달라 해도 코레일이 막고 있어서 권한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철도유통에 고용돼 있으면서 코레일 지시를 받는) 불법파견 문제가 대두되자, ‘코레일 직원들은 너희와 다른 회사 사람이니 인사도, 소통도 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처음엔 코레일 열차팀장과 함께 쓰던 업무일지도 소속이 다르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두 장을 써야 했다. 불합리한 고용관계를 바꾸지 않고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다고 느꼈다. 그해 12월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에 여승무원 393명이 가입했다. 대학생 때 등록금 투쟁도 해본 적 없던 나는 평조합원으로 2006년 3월1일 난생처음 파업이란 걸 시작했다.

ⓒ시사IN 신선영2017년 7월10일 서울역 대합실 3층에서 KTX 해고 승무원 문제 해결을 위한 천주교 미사가 진행됐다.
아이와 미사에 참석한 승무원.


2006년 4월19일 낮 12시 조합원 84명이 국회 헌정기념관을 점거했을 때, 나는 밖에서 망을 보는 일을 했다. 안에 들어간 친구들이 먹을 것도, 따뜻한 물도 끊긴 채 하룻밤을 보냈다. 친구들이 고통 겪는 걸 보면서 1분 1초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이렇게 밖에서 마음고생하느니 내가 들어가고 말지’ 싶었다. 2006년 5월6일 강금실 당시 열린우리당 서울시장 후보 선거대책본부를 기습 점거할 때 자원했다. 조합원 42명이 ‘007 작전’을 하듯 서울 안국역에 서로 모른 척 모여서 1분 만에 들어갔다. 그 일로 처음 ‘닭장차’ 타고 경찰서 유치장에 가봤다. 경찰이 ‘그러다 빨간줄 긋는다’고 엄포를 줬지만 우리가 정당하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무섭지 않았다.

2006년 5월19일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코레일은 새 자회사인 KTX관광레저에 복귀하지 않고 직접고용을 요구한 여승무원 280여 명을 해고했다. 슬프기보다는 언론에 부당함을 알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코레일은 파업을 끝내고 복귀하면 선착순으로 자회사 간부를 시켜주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복귀해서 간부가 된 사람도 있었다.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나는 코레일이나 정부와 싸우는 것보다 옆에 있는 동료가 힘들어하는 게 더 아팠다. 그래서 하나둘 “이건 안 되는 싸움이다”라며 떠날 때도 남았다. 그렇게 일주일, 길어도 한 달이라고 생각했던 파업이 길어졌다. 좋아하는 ‘샤랄라 원피스’ 대신 투쟁 조끼를 입고 민중가요를 부르며 20대를 보냈다.

 

ⓒ시사IN 신선영2017일 12월19일 KTX 해고 승무원 문제 해결을 바라는
종교인 2차 오체투지가 서울역에서 청와대 분수광장까지 진행됐다.

2008년 8월27일 동료 2명이 서울역 내 30m 높이 조명탑에 올라 고공 농성을 벌였다. 사실상 마지막 수단이었다. 코레일은 또 다른 자회사 정규직을 제안했다. 2년 넘게 싸웠는데 자회사로 돌아간다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논의 끝에 거부하기로 했다. 조명탑에서 내려와 다 같이 모여 울면서 소송을 결의했다. 사법부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2008년 11월26일 처음 370여 명이던 파업 인원에서 끝까지 남은 34명이 코레일을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냈다. 나는 소송에 들어가면서 지부장을 맡았다. 처음부터 우리 사건을 재판에 가져가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열차승무 일지, 매뉴얼 등 코레일 열차팀장과 함께 섞여 일하고 코레일이 우리에게 일을 시켰다는 수많은 증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승소를 확신했다. 2010년 8월26일 1심 재판부는 우리 손을 들어줬다. 사법부가 우리의 정당성을 인정했다는 생각에 굉장히 기뻤다. 재판부는 코레일이 고용주라고 인정하며 복직 때까지 밀린 임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1심 승소에 앞서 2008년 12월 법원에서 근로자지위보전 및 임금지급 가처분 신청이 인용되었다. 법원이 “코레일은 본안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매달 180만원을 지급하라”며 일부 인용 결정을 내려 매달 임금을 받고 있었다. 1심 승소로 복직 때까지 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고 또 곧 복직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판결에 따른다던 코레일은 우리를 복직시키지 않고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2011년 8월19일 2심 재판도 우리는 이겼다. 우리가 승소한 것을 보고 2차 소송을 제기한 여승무원 118명도 1심에서 승소했다. 그런데 2012년 이들은 2심에서 패소했다. 이로써 4년간 나오던 임금이 끊겼지만, 그래도 의심하지 않았다. 뒤집힐 수 없는 사건이라고 믿었다.

 

ⓒ시사IN 신선영2015년 11월27일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파기환송심에서 패소한 후 김승하 지부장이 눈물을 흘렸다.

2015년 2월26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2층. 대법관 네 명이 앉아 있었다. 우리 사건은 다른 여러 사건과 함께 순식간에 훅 지나갔다. 결과는 파기환송. 재판에서 졌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나중에 판결문을 봤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대법원은 코레일 열차팀장과 자회사 여승무원 업무가 안전 업무와 서비스 업무로 구분된다고 했다. 여승무원도 화재 같은 안전사고가 일어나면 안전 업무를 하지만 이례적인 상황에 불과하고, 안전 업무가 여승무원 업무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낮다고 했다. 사고는 당연히 이례적인 건데, 화재나 열차 사고가 매일 나야 안전이 우리 업무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코레일 열차팀장이 우리 업무를 감독한 것도 계약서대로 잘 이행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고 했다. 자회사가 코레일 시설과 장비를 쓴 것도 비용과 효율 면에서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모든 게 다 ‘그럴 수도 있다’는 식이었다. 불법파견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9년 싸움이 공식적으로 부정당했다. 그뿐 아니었다. 과거 4년간 코레일에 고용된 것으로 인정돼 그동안 받은 임금 1인당 8640만원이 고스란히 개인의 빚으로 돌아왔다.

 

2015년 3월16일 한 동료가 세 살 난 딸을 두고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 알았다. 대법원 판결이 나고 몇 날 며칠을 밥도 못 먹고 울다가 그런 선택을 했다고 했다. 아이에게 피해가 갈까 봐 걱정했다고 들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길을 걷다가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흘렀다. 같은 선택을 하는 조합원이 또 나올까 봐 불안했다. 전문 강사로 새 삶을 시작하려던 계획을 접고 노조 상근 지부장으로 출근했다. 고등법원으로 돌아간 파기환송심 재판에서 어떻게든 결과를 뒤집어보고 싶었지만 2015년 11월27일 최종 패소했다.

우리는 국가에 두 번 속았다

ⓒ시사IN 신선영5월29일 KTX 해고 여승무원들이 ‘재판 거래 의혹’ 규탄 기자회견 직후 대법원으로 향했다.
이들은 사상 처음으로 대법정에 진입해 농성을 벌였다.

2016년 4월12일 최연혜 코레일 전 사장이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당선되기 하루 전, 부모님 집으로 코레일이 보낸 우편물이 도착했다. 지난 4년간 지급받은 임금이 ‘부당이득’이니 반환하라는 내용증명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 없다고 돌려보냈지만, 우편물을 받은 조합원도 있었다. 연 5% 지연손해금이 붙는다고 적혀 있었다. 서류가 날아오니 대법원 판결에서 졌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허둥지둥 기자회견을 열고 동네방네 전화를 걸어서 어떡하느냐고 조언을 구했다. 희망적인 답변은 들려오지 않았다. 법정이자란 게 무서웠다. 코레일은 5월11일 재차 내용증명을 보냈고, 그해 12월29일 대전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2017년 1월3일 대전지방법원이 임금 반환을 독촉하는 지급 명령서를 보내왔다. 지급명령일로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15%의 지연손해금이 발생한다고 했다. 한 달에 108만원이다. 지연손해금을 합해 1인당 빚이 1억원이 넘어갔다. 누구라도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였다. 빚은 남편이나 아이에게까지 상속될 수 있었다. 동료들 사이에 이혼해야 되느냐는 이야기가 오갔다.

 

2017년 5월1일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가 철도노조와 ‘KTX 승무원 문제를 전향적으로 해결한다’는 정책 협약을 맺은 것이 한줄기 희망이었다. 서울과 부산에서 108배를 하고, 매주 피켓을 들었다. 2017년 12월19일 얼음이 녹지 않은 땅바닥에 엎드려 오체투지를 했다. 2018년 1월31일, 우리가 원금의 5%(1인당 432만원)를 3월 말까지 코레일에 지급하는 내용으로 조정이 성립되었다. 대법원 판결을 인정하는 의미가 될 수 있어서 결정이 쉽지 않았지만, 종교계가 마련한 중재안을 거부하기 어려웠다. 빚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비극을 불러온 애초의 정규직 전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여전히 자회사 승무원은 공식적으로 안전을 담당하지 못하고 있다. 5월24일 서울역 앞에 천막을 치고 무기한 농성을 시작했다.

 

ⓒ시사IN 신선영5월29일 서울역 앞에서 무기한 농성 중인 김승하 지부장(오른쪽)과 정미정 총무가 잠을 청하고 있다.

2018년 6월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자택 앞에서 입장 발표하는 것을 봤다. KTX 해고 노동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KTX 재판이건 어떤 재판이건 대법원에서 한 재판은 관여 법관이 헌법과 법률에 따라서 양심을 좇아 결론을 낸 것입니다. 자꾸 견강부회를 시켜서 판결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그 판결로 우리는 인생이, 목숨이 왔다 갔다 했다고, ‘내 친구 살려내라’ ‘13년 세월 돌려달라’고 외쳤는데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양 전 대법원장은 ‘나라를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나라가, 공공기관이 나한테 사기를 치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우리는 국가에 두 번 속았다. 20대에 정규직 전환 약속을 번복하는 ‘취업 사기’를 코레일로부터 당했다. 공정하게 판단해줄 거라고 마지막으로 믿었던 사법부는 코레일에 면죄부를 줘 이 ‘거대한 범죄’를 완성시켰다. 어느 동료 말대로 “남들 하품하듯 울면서 보낸” 우리의 9년 세월을 사법부는 거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런 땅에 태어난 내 잘못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곳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코레일도, 사법부도 더 이상 믿을 수 없지만 희망을 보고 싶다. 이제 나는 서른아홉이 되었고, 세상을 떠난 친구의 세 살 난 딸은 여섯 살이 되었다.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엄마를 찾는다고 했다. 아이가 나중에 커가면서 엄마가 없다는 걸 알게 될 텐데, 아무 의미 없는 희생으로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희 엄마는 너무나 억울하게 희생되었지만 옳은 일을 했고 정의로웠다’는 얘기를 나중에 커서라도 꼭 해주고 싶다.

기자명 글 전혜원·사진 신선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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