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의 ‘갑질’이 잊을 만하면 미디어에 등장한다. 최근 어느 재벌가의 갑질에 대한 집단 시위가 있었다. 미디어에서는 이를 ‘을의 연대’ 또는 ‘을들의 반란’이라고 명명한다. 이 기회에 우리는 갑질의 정체란 도대체 무엇인지 그 근원적인 문제에 집단적 성찰을 해야 한다. 갑질의 정체는 바로 위계주의적 사유 방식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 간의 위계를 설정하자마자, ‘갑을 멘탈리티’가 작동한다.
한국 사회엔 관계에서 갑을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 사회적 DNA처럼 자리 잡고 있다. 대학 입학 연도, 나이, 성별 또는 직책에 따라 위계를 설정하며, 그 위계 구조에 따라 관계들이 작동된다. 선배-후배, 남자-여자, 연장자-연소자, 고학년-저학년, 어른-아이, 고객-직원, 교수-학생 등 사회 곳곳에서 ‘갑을 위계주의’가 작동한다. 하다못해 교회와 같은 종교단체에서도 직분과 성별, 사회적 계층에 따른 갑을 위계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한다.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갑을 관계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갑질에 대한 항의 시위는, 갑에 대한 징벌 자체만을 위한 ‘복수의 정치(politics of revenge)’나 갑과 을의 위치가 뒤바뀌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역전의 정치(politics of reversal)’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갑을 멘탈리티’ 자체에 대한 저항이 되어야 비로소 시위의 진정한 의미가 살아날 수 있다. 갑질에 대한 시위를 단순히 ‘을의 연대’로만 규정할 때, 사람은 정황에 따라서 을이 되기도 하고, 갑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간과하게 한다.
위계적 의식구조는 다음과 같은 갑을 멘탈리티의 토대를 이룬다. 첫째, 나이·직책·성별 등에 상관없이 서로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수평적 멘탈리티’가 부재한 사회를 재생산하게 된다. 둘째, 그러한 위계적 사회에서는 사회 구성원 간의 비판적 토론과 성찰적 대화가 불가능한 사회를 재생산한다. 학자들이 모이는 모임에서조차 선후배·성별·나이·직책에 따른 갑을 멘탈리티는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한다. 이러한 다중적 위계를 생각하지 않고 동등한 관계적 태도를 가지면, ‘버릇없고, 오만하고, 상하도 모르는’ 사람으로 낙인찍혀버린다. 회사에서 상사의 갑질에 의한 피해자가 집에 가는 길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택시 운전자에게, 또는 자신의 부인이나 아이에게 갑으로 군림하며 갑질을 할 수 있다.
갑을 멘탈리티는 성숙한 민주사회에 커다란 걸림돌이다. 민주시민의 의식을 가지는 데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식은 직책·나이·성별 등에 상관없이 평등한 존재로 타자를 대하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타자이든, 그 타자를 평등한 존재로 대하자는 것은 추상적이고 공허한 구호가 아니다. 우리의 일상 세계에서 아주 작고 구체적인 것들에 연결해 실천해야 하는 사회 정치적 과제이다.
크고 작은 저항과 전복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처럼 위계적 사유구조가 곳곳에 스며들어 공기처럼 존재하는 사회에서 갑을 멘탈리티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저항과 전복이 필요하다. 직급이 조금만 높아도 반말로 위계를 행사하는 행위, 임시직 아르바이트생이라고 하대하며 함부로 대하는 행위, 백화점의 매장에서 또는 주차장에서 고객에게 90° 각도로 인사하며 ‘고객은 왕’이라는 갑을 관계를 각인시키는 행위 등은 다양한 얼굴을 한 갑을 멘탈리티다. 비하적 반말과 친근감의 반말은 구분되어야 한다.
갑을 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이러한 저항과 전복의 집단적 행위에서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갑을 위계주의에 대한 저항은 외부로만이 아니라, 각 개인이나 집단 내부에서도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각 개인이나 집단은 각각의 ‘인식론적 사각지대’가 있다. 누군가의 갑질의 피해자이면서, 또 다른 편에서는 가해자의 역할을 할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있다. 갑과 을은 각기 고정되어 존재하지 않고 우리 자신 속에 갑과 을이 공존하고 있다. 갑질에 대한 집단 시위는 ‘을들의 연대’가 아니라, ‘갑을 위계주의 자체에 대한 저항’이 되어야 한다. 어떠한 저항과 변혁에 개입하는 개인과 집단이라도, 자기비판적 성찰이 지속적으로 요청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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