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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지옥이오. 하지만 남한도 틀렸소”

북한 고위 언론인이었던 이수근은 북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귀순했지만 기껏 찾아온 남한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중립국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남한에서 그는 ‘위장 간첩의 대명사’로 불렸다.

김형민 (SBS CNBC PD)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6월 08일 금요일 제5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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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어느 날 판문점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 유엔군 측 대표가 판문점 회담장에 들어갔더니 북한 측 대표들의 앉은키가 껑충 높아져서 유엔군 측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야. 키높이 의자를 갖다놓은 거지. 유엔군 측도 가만있지 않고 의자 높이를 높여 대응했어. 그러자 북한은 더 높은 의자를 갖다 놓고, 유엔군 측도 또 더 높은 의자를 쓰고 하다 보니 머리가 천장에 닿을 지경이었어.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한바탕 웃으며 “이제 그만합시다” 했다는 일화.

ⓒ합동통신
1967년 3월22일 북한 언론인 이수근이 판문점에서 유엔군 측 승용차에 뛰어들어 남한으로 넘어왔다.

남과 북은 이 코믹 잔혹극 같은 대결 구도의 바둑알이 되어갔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는 꼭 분위기 ‘적응’이 안 되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지. 1967년 3월22일 판문점에 섰던 이수근이라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는 북한중앙통신 부사장 직함을 단 고위직 언론인이었다.

당시 중국에는 ‘문화대혁명’이라는 태풍이 몰아치고 있었어.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홍위병들이 마오쩌둥의 뜻에 어긋난다고 보이는 이들, 즉 혁명의 적들을 타도하겠다며 중국 전역을 살인과 유혈, 폭력과 규탄의 소용돌이에 빠뜨려버린 사건이었다. 홍위병들은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던 북한에도 시비를 건다. 외교관 소환까지 벌어지는 등 관계가 급랭하는 가운데 홍위병들은 북한 군대가 김일성 주석을 연금시켰다는 헛소문 벽보를 붙이게 돼. 이에 북한 인민군들은 벽보가 터무니없는 내용이며 김일성 주석에 대한 충성은 변함이 없다는 ‘궐기대회’를 열게 되지. 이수근은 이 궐기대회를 취재하여 기사를 썼는데, 당 간부가 길길이 날뛰며 그를 호출했다.

“왜 수령님의 항일 투쟁 관련 내용이 이렇게 불충분하오? 수령님 연설도 상당 부분 빼먹었구만.” 이수근은 북한 사회에서 이런 식으로 ‘충성을 의심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단다. 일조(日朝) 우호협회, 즉 일본 친북단체 회장의 판문점 관광 안내를 명령받았을 때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결심한다.

1967년 3월22일 오후 그는 판문점 회담장 주변의 유엔 측 인사에게 북한을 탈출하겠다는 언질을 준다. 이 사실은 곧장 회담장으로 전달됐어. 유엔군 대표들은 북한 대표가 열띠게 연설하는 동안 메모하는 척하면서 이수근의 탈출 방법을 적어 공유한 뒤 밖으로 전달했지. 회담이 끝나고 대표들이 회담장을 나와 각자의 차에 오를 찰나, 유엔군 측 영국군 대표가 올라탈 승용차에 이수근이 비호처럼 뛰어들었어. 판문점 전체가 얼어붙는 순간이었지.

“무슨 짓이오?” 인민군 몇 명이 달려와 차에 달라붙었어. 그러나 미식축구 선수 출신 미군 해병 장교가 몸으로 그들을 제지했고 차는 굉음을 울리며 안전지대로 출발하기 시작했어. 북한 경비병들은 권총을 꺼내 무려 150발이 넘는 총알을 퍼부었단다.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일촉즉발의 상황, 북한군들은 초소 차단기를 내렸지만 이수근을 태운 차는 차단봉을 밀어버리고 남쪽으로 내달렸어.

이수근은 탈출에 성공한 뒤 이렇게 자신의 뜻을 전하고 있어. “(전략) 한 건의 보도 기사에 김일성의 말을 인용하지 않았다 하여 20년간 헌신 복무해온 지식인들에게 이런 혹독한 박해를 할 수 있는가. 그런 제도하에서 누구라고 마음 펴고 살겠는가….” 그는 새벽 2~3시까지 기사를 고치며 공산체제의 언론인으로서 헌신했다고 해. 그런데 기사를 잘못 썼거나 오보를 낸 게 아니라 ‘김일성 말씀’을 인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위기에 몰린 상황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아. “나는 지식인들을 야만적으로 취급하며 사람들에게 정치적 감투를 씌워 오금을 못 펴게 들볶는 북조선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

ⓒ합동통신
‘귀순용사’ 이수근씨는 이중간첩으로 의심받았다.

유감스럽게도 기껏 탈출하여 찾아온 ‘자유세계’의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았단다. 애초에 이수근은 북한은 고사하고 남한 사회에서조차 ‘자유분방하다’는 평을 듣기에 충분한 품성이었어. 중앙정보부 요원들 보고에 따르면 20여 명의 여자와 로맨스를 즐기는 플레이보이였고, 어떤 분위기에서든 자기 하고 싶은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으니까. ‘귀순용사’가 돼 전국에 반공 강연을 하러 다닐 때 중앙정보부가 원고를 주면 “턱도 없는 거짓말인데” 하며 뭉텅뭉텅 들어내 강연을 했고, 김일성 주석에 대한 지나친 비난도 하지 않았어. 남한 중앙정보부도 이수근이 보여주는 ‘충성심의 부재’에 민감했다. 어떤 중앙정보부 간부는 집요하게 이수근이 이중간첩이라며 의심했고, 두들겨 패거나 심지어 권총을 발밑에 쏘아가며 겁박하기도 했다. “너 위장해서 내려온 거지?”

“북한은 지옥이오. 하지만 남한도 틀렸소”

가족까지 버리고 북한을 탈출하게 만들었던 ‘더러운 꼴’을 남한에서도 또 보게 된 이수근은 오래 참지 않았어. 그는 위장 여권을 마련해 스위스로 가려다가 중앙정보부는 물론 영국, 미국 정보기관과 베트남 정부(베트남 통일 이전의 남베트남)까지 동원된 추격전 끝에 비행기 안에서 체포됐어. 그를 체포한 건 베트남 주재 한국공사 이대용이었지. 이수근이 위장 귀순한 이중간첩이라는 얘기를 듣고 체포에 나섰던 이대용 공사는 오히려 이수근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됐다고 해. “북한은 지옥이오. 하지만 남한도 틀렸소. 자유도 없고 독재하고… 스위스 같은 중립국에서 살려고 했소. 내가 회고록을 쓰면 100만 달러도 벌 수 있지 않겠소.”

중앙정보부의 증거는 허접하기 이를 데 없었어. 탈출할 때 총알 수백 발이 난무했는데 어떻게 그리 무사할 수 있었느냐는 것도 그중 하나. 그 차에는 미군 장교도 타고 있었는데 대놓고 조준 사격을 가하는 건 인민군 경비병이 결단할 문제가 아니었지. 또 중앙정보부는 귀순 후 반공 강연에서 김일성 주석에 대한 직접적 비난을 하지 않았다는 걸 근거로 들기도 했는데, 상식적으로 이수근이 위장 간첩이라면 오히려 더 직설적이고 과격하게 김 주석에게 욕설을 퍼부어야 맞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당시 한국은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온 이수근이 또다시 어딘가로 탈출했다는 스토리를 견딜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어. 국내로 압송된 이수근은 감옥살이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고 해. 그냥 국가보안법상 탈출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곧 교수대의 이슬이 된다. 서울 시민들은 이수근 화형식까지 벌이며 배신감을 불태우고 있었고, 이수근을 위장 간첩으로 한껏 선전한 중앙정보부도 그를 살려둘 마음이 없었으니까.

2007년 1월15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당시 남북한 체제 경쟁으로 개인의 생명권이 박탈당한 대표적인 비인도적·반민주적 인권유린 사건”으로서, “중앙정보부가 북한 거물급 인사였던 이씨의 귀순을 체제 우위의 상징으로 선전했으나, 이후 이씨가 해외로 탈출해 궁지에 몰리자 이씨를 위장 간첩으로 조작해 처형한 사건”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혔어. 이 소식을 저승에서 들으면서 이수근은 무슨 말을 내뱉었을까? “남이 북보다 조금은 낫구만!” 하면서 침을 탁 뱉었을까, 아니면 “남이나 북이나 똑같은데 그냥 고향에서 살 것을 괜히 여러 사람 번잡하게 만들었구만” 하면서 운명의 그날, 판문점의 숨 가빴던 순간을 되새겼을까. 이수근은 지금도 상당수의 한국 사람들에게 ‘위장 간첩의 대명사’로, 그리고 북한에서는 ‘배신자의 말로’를 처절하게 입증한 사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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