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모든 게 잘 풀리길 바란다. 지금 예정된 정상회담이 열리거나 나중에 어떤 시점에 열릴 수도 있다. 많은 일이 여전히 가능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월24일(현지 시각), 6월12일로 예정되었던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한 직후 내놓은 발언이다. 북한을 두 번이나 방문해, 정상회담을 조율해온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도 “우린 여전히 만날 용의가 있지만 그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달렸다”라고 말했다. 전 세계가 주목하던 북·미 정상회담을 트럼프 대통령이 취소했지만 회담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게 워싱턴 외교가의 분위기다. 백악관 관리들도 김정은 위원장에게 취소를 통보한 서한은 정상회담 준비 과정의 돌발 변수일 뿐, 추후 회담이 재개될 수 있다는 의견이다.

ⓒAP Photo5월24일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상원 외교위원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도 이번 사태를 회담 취소라기보다 일시 중단 혹은 연기로 본다. 민간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의 한반도 전문가 로버트 매닝 선임연구원은 “트럼프 서한의 어조를 보면 회담이 취소된 게 아니라 과속방지턱에 걸렸거나 연기된 느낌이 강하다”라고 말했다. 국무부 정보조사국(INR) 동북아분석실장을 지낸 존 메릴 박사도 “트럼프 서한을 보면 회담을 갖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남아 있다. 회담이 취소됐다기보다는 일시 중지된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취소 행위가 “폼페이오 장관이나 한국 문재인 대통령 같은 중재자를 통하지 않고 김 위원장과 직접 거래할 수 있는 직통 라인을 트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일 수 있다”라고 풀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개서한에서 “언젠가 다시 만나길 무척 고대한다”라면서도 회담 취소 이유로 ‘가장 최근에’ 북한이 미국에 보였다는 ‘엄청난 분노와 적개심’을 꼽았다. 5월24일 북한 외무성 최선희 부상이 마이크 펜스 부통령에게 한 원색적 비난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번 취소가 단순히 최 부상의 강경 발언 때문이라고만 볼 수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정상회담을 불과 2주일 앞둔 시점까지도 북·미 양측이 핵심 의제인 비핵화 관련 쟁점 사항에 관해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 게 주된 이유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주한 미국 대사는 워싱턴 정가의 정치·외교 정보지 〈넬슨리포트〉에 “폼페이오 장관의 두 차례 방북에도 불구하고 북·미 양측은 처음부터 ‘비핵화’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 없었다. 비핵화 시한과 조건, 실행에 따른 보상 문제에서도 아무런 합의가 없었다”라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 밝은 전직 고위 관리의 말을 인용해, “양측이 정상회담 말미에 나올 공동성명 초안조차 합의하지 못했고, 결국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라고 전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5월24일 상원 외교위원회에 출석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다. “지난 여러 날 동안 양측 실무진이 나(폼페이오)와 김 위원장 간에 합의된 사항을 추진하려 노력했다. 양측 준비팀이 작업을 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린 북한 측에 요구한 질의 사항에 대한 답변을 받지 못했다.” 폼페이오 장관이 언급한 ‘질의 사항’은 트럼프 대통령이 5월23일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 전에 기자들에게 밝힌 ‘특정한 조건(certain conditions)’일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회담을 위한) 특정한 조건을 원한다. 그걸 북한에게서 얻어내지 못하면 정상회담은 열리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결국 핵심 의제인 비핵화와 관련해 북·미 간에 여전히 현격한 견해차가 존재해왔고, 정상회담을 코앞에 둔 시점까지 해소되지 않자 미국이 최선희 부상의 발언을 계기로 취소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실제 북·미 정상회담 준비에 관여해온 트럼프 행정부 고위 관리는 취소 배경과 관련해 최 부상의 강경 발언 외에도 “아직 북한에게서 (비핵화와 관련한) 아무런 확약을 받지 못했고, 미국도 이런 어정쩡한 상황이 지속되는 걸 원치 않았다”라고 CNN에 밝혔다.

 

5월24일 백악관이 공개한 트럼프 대통령의 서한.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 예정된 정상회담이 열리거나 나중에 어떤 시점에 열릴 수도 있다”라며 여지를 남겼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미국은 막판까지도 정상회담 준비에 열중했다. 조지프 헤이긴 백악관 비서실 차장과 미라 리카델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이 이끄는 미국 측 선발대는 5월 셋째 주 싱가포르에서 북측을 기다리다 허탕을 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별도로 폼페이오 장관도 회담 개최 전에 한 번 더 북측의 고위 인사를 제3국에서 만나 몇 가지 비핵화 쟁점을 해소하려 했다고 한다. 미국의 관심사는 무엇보다 김정은 위원장이 진정으로 비핵화 결단을 내렸는지 여부인데, 폼페이오 방북을 통해서도 100% 확실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미국은 김 위원장의 결단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정상회담 전이라도 전문가들이 북한에 입국해, 기존 핵실험장과 미사일 시험장,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방안을 북측에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에 요구한 ‘12가지 재협상 조건’ 주목

또 하나 쟁점은 비핵화 방법론이다. 미국은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폐기)를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이 문제에 다소 신축적인 의견을 보여 주목을 끌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5월24일 방송된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물리적으로 볼 때 단계적 비핵화가 조금은 필요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즉 북한 측이 주장하는 ‘단계적·동시 조치’에서 일단 ‘단계적’ 입장에 대한 수용 가능성을 비친 것이다. 물론 “단계적 비핵화를 해도 속도가 빨라야 하고 일괄적으로 해야 한다”라는 조건을 달았다. 미국은 ‘신속한 비핵화’ 차원에서 당초 북한에 1년 내 비핵화 안을 제시하고, 이행 막바지 단계에서 보상을 제공한다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이 방안도 동시 행동에 입각해, 비핵화 단계마다 보상을 원하는 북한 측 의견과 충돌했을 가능성이 많았다는 지적이다.

비핵화 범위와 대상 역시 쟁점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CVID 차원에서 좀 더 구체적인 요구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최근 이란 핵협정에서 탈퇴한 뒤 재협상 조건으로 제시한 12가지 요구 사항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라늄 농축 중단, 플루토늄 재처리 금지, 모든 핵시설 완전 접근 허용, 기존 핵무기 제조활동 신고, 탄도미사일 개발 금지, 핵 탑재 미사일 개발 중단 등이다. 미국도 북한에 최소 이 정도까지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은 이 가운데 핵실험, 장거리 탄도미사일 시험 중단을 선언하고 이행 중이다. 트럼프 행정부 고위 관리는 CNN에 “북한의 독특한 상황을 감안할 때 조정 필요성은 있지만 우리가 이란에 요구한 것 이하로는 절대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일부 전문가들은 올해 안이라도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애틀랜틱 카운슬의 로버트 매닝 선임연구원은 “트럼프 서한은 점잖고 외교적이며, 많은 문을 열어놓았다. 정상회담 일정이 11월 미국 중간선거 직전인 9월 혹은 10월로 재조정돼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간선거 직전 정상회담이 열려 비핵화 합의가 이뤄지면 공화당에 상당한 호재가 될 수 있다. 백악관 고위 관리도 회담 재개와 관련해 “양측 실무진의 대화를 통해 정상회담 의제를 상호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결국 쟁점만 해소되면 북·미 정상회담의 문은 열릴 수 있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