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도 더 된 일이다. 1996년 〈라이프〉라는 유명한 잡지에 한 소년이 축구공을 바느질하는 사진이 실린다. 세계적 스포츠용품 회사인 나이키의 수제 축구공 광고였다. 광고가 나가자마자 전 세계에서 나이키에 맹비난이 쏟아졌다.
비난의 요지는 ‘코 묻은 손으로 만든 피 묻은 축구공’이라는 것. 광고에 나온 소년은 수제 축구공 생산지로 유명한 파키스탄의 열두 살 아동이었다. 소년은 공 하나를 만들기 위해 5각형 가죽 조각 12개와 6각형 가죽 조각 20개를 무려 1620번이나 바느질해야 했다. 이렇게 공 하나를 만들어서 받는 돈은 고작 100~150원. 수만원을 호가하는 축구공 가격에 비해 턱없이 적은 액수였다. 아동 학대이자 착취인 것이다. 나이키에 대한 비난은 매출 폭락으로 이어졌다. 나이키는 1997~1998년, 설립 이후 처음으로 매출액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지고 주가가 37% 하락했다. 그 바람에 직원 1600명이 해고되었다.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 일가의 폭언과 욕설, 끔찍한 갑질 폭력을 보면서 나이키의 〈라이프〉 광고 사건이 떠올랐다. 나이키 사례는 기업이 인권을 도외시했을 때 어떤 참혹한 결과에 직면하는지 알려준다.
갑질은 심각한 인권침해이자 차별 행위다. 제아무리 기업의 오너나 고위 경영자라 할지라도 개별 노동자의 존엄성을 짓밟고 하대하고 굴욕감을 느끼게 하며 폭력을 행사할 권한은 없다. 조 회장 일가가 마구 휘두른 갑질 행태는 마치 봉건왕국의 노예에게 자행되던 비인간적인 행동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전 세계의 인권 문제를 주요 의제로 다뤄온 유엔은 일찍이 인권에 기반한 기업 경영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노력해왔다. 1999년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이 세계경제포럼에서 제안한 뒤 2000년 유엔글로벌콤팩트(UNGC)와 2006년 유엔책임투자원칙(UN PRI) 등이 만들어졌다. 유엔글로벌콤팩트의 10대 원칙 맨 앞줄에는 “기업이 인권 보호를 지지하고 존중해야 하며, 인권침해에 연루되지 않도록 적극 노력해야 한다”라고 명시돼 있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에 웬 ‘인권’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직장 내 성희롱과 성폭력, 채용 과정에서의 학력차별과 성차별,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한 노동자의 건강권 침해, 노조 탄압이나 사찰, 그 밖에 초국적기업의 이주노동자나 아동노동 착취 등은 일터에서 발생하는 주요 인권 사안이다. 전통적으로 시민의 인권 보장은 국가 책임으로 규정되어 있지만 현대사회에서 기업의 영향력은 개별 국가의 법과 통제를 벗어난다. 기업의 책임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인권침해 저지를 때 이윤 추구라는 기업 목적도 구현하기 어려워
인권은 기업으로서는 비켜가고 싶은 껄끄러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이키에서 보듯 기업이 인권침해를 저지를 경우, 이윤 추구라는 기업의 목적 그 자체도 구현하기 어렵다. 인권침해로 인해 경영상 심각한 타격을 입은 사례는 부지기수다. 일본 미쓰비시 자동차는 사내 성희롱을 방치했다가 무려 473억원을 손해배상해야 했고, 최근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인 스타벅스는 소비자들의 불매운동 조짐이 보이자 200억원 정도의 손실을 감수하고 전 직원 인권교육을 위한 휴업을 선포하기도 했다.
대한항공 조 회장 일가의 슈퍼 갑질은 인권 경영에 앞장서야 할 오너 일가가 오히려 인권침해와 차별의 가해자라는 점에서 더욱 부끄러운 일이며 심각성 또한 크다. 대한항공 사태는 오너 일가 몇 명이 조직에서 물러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조직에서 갑질·폭력·인권유린을 몰아내고, 사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엄하고 평등한 존재로 대우하며, 인권에 기반을 둔 경영을 기본 원칙으로 삼을 때 근원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그건 설사 조 회장 일가 모두가 물러나고 새로운 경영진이 들어서더라도 마찬가지다. 일자리를 걸고 촛불집회에 나선 대한항공 직원들의 요구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권 존중 경영에 대한 믿음이 생기기 전에는, 당분간 대한항공을 타고 싶지 않다.
-
조씨 일가의 ‘갑질 논란’ 남의 일 아닌 인하대
조씨 일가의 ‘갑질 논란’ 남의 일 아닌 인하대
변진경 기자
1998년 미국으로 유학 갔던 한 대학생이 한국에 돌아왔다. 미국 2년제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졸업 인정 학점도 채우지 못했던 그는 인천시에 있는 종합대학인 인하대학교 경영학과 3학...
-
“나는 조양호 회장의 블랙리스트 1호”
“나는 조양호 회장의 블랙리스트 1호”
전혜원 기자
“하늘을 날아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었을까요?” 턱수염이 희게 센 쉰일곱의 조종사가 큰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장애물 없이 하늘을 날고 싶던 제주도 소년은 항공대학을 나와 공군 R...
-
대한항공 직원들이 가면을 쓰는 이유
대한항공 직원들이 가면을 쓰는 이유
전혜원 기자
최소 한 정거장 전에 내려 마스크로 얼굴 가리고 오기. 유니폼을 입고 오는 경우 튀는 휴대전화 액세서리 하지 않기. 귀고리, 반지 등 장신구 빼기. 이름 부르지 않기. 모르는 사람...
-
대한항공 ‘갑질’ 경영을 견제하려면
대한항공 ‘갑질’ 경영을 견제하려면
전혜원 기자
“‘갑질 기업’이라 비난받는 대한항공을 필수공익사업장으로 지정한 것은 지나친 특혜입니다. 동의하십니까?”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기장이 물었다. 5월12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