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수(유아인)를 먼저 알은체한 건 해미(전종서)였다. 어릴 때 같은 동네에 살았다며 반가워했지만 어째 종수는 잘 기억나지 않는 눈치다. 그날 저녁 함께 술을 마셨다. 느닷없이 팬터마임을 해 보이는 해미. 상상의 귤 하나 손에 들고 껍질을 벗긴다. 한 조각씩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손동작이 제법 그럴듯하다. “여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요령을 가르쳐주며 해미가 덧붙인 한마디. “난 내가 먹고 싶을 때 항상 귤을 먹을 수 있어.”

아프리카로 여행 간다는 해미가 고양이를 부탁했다. 매일 들러 밥만 챙겨달라며 집으로 불렀다. 낯가림이 심하다는 고양이는 끝내 보지 못했다. 대신 해미의 가슴을 보았다. 종수도 옷을 벗고 해미 위에 제 몸을 포갰다. 그때 종수가 벽을 본다. 하루 한 번, 아주 잠깐 방 안으로 해가 들어온다는 해미의 말은 사실이었다. 창을 비집고 들어온 옅은 햇볕이 벽에 작은 네모를 만들었다. 영화 〈밀양〉 마지막 장면에서 종찬의 거울에 반사되어 마당 한구석에 떨어진 그것보다 더 작아 보이는 ‘비밀의 햇볕’ 한 줌.

여기까지가 영화 〈버닝〉의 도입부다. 그 뒤 해미가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나고, 돌아오기만 기다렸다가 공항에 마중 나갔는데 낯선 남자 벤(스티븐 연)과 함께 나타난 해미 앞에서 멍해진 종수의 표정으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나는 오히려 초반 두 장면을 계속 곱씹게 되었다. 

‘본격적인 이야기’ 안에서 수많은 물음표에 걸려 허우적대는 종수는, 어쩌면 그날 그 술집에서 해미가 한 얘기를 줄곧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된다는 말.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먹고 싶을 때 항상 귤을 먹을 수 있’다는 그 말. 하지만 어떻게? 없다는 걸 잊어버릴 수가 없는데 어떻게? 꼭 있는 것만 같고 정말 있었다는 확신마저 드는데 어떻게? 손에 쥔 느낌마저 이렇게 생생한데 어떻게?

낯선 서사와 빛나는 캐릭터

만난 적 없는 고양이와 들여다본 적 없는 우물과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해미와 불타지 않은 비닐하우스가 종수에겐 손안의 귤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종수에게 삶이란, 그리고 세상이란, 거대한 팬터마임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짐작한다. 실은 아무것도 없는 데 뭔가 있다고 믿게 되는, 아니 그렇게 믿고만 싶은. 이번에도 ‘밀양(密陽:비밀의 햇볕)’은 고작 한 줌. 찬란한 노을은 짧고, 캄캄한 밤은 길다. 종수는 궁지에 몰렸고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게 된 세상에 대한 이야기.” 이창동 감독은 〈버닝〉을 그렇게 소개했다. 그런 세상을 사는 “청년들의 분노와 무력감”을 “익숙한 서사를 피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미스터리로 쌓아올린 그 익숙하지 않은 서사도 나는 좋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가장 좋은 건 캐릭터. 다른 영화의 인물이 상상의 귤이라면, 이창동의 인물은 언제나 손안의 진짜 귤로 느껴진다. 몇 년이 지난 뒤에도 이상하게 자꾸 안부를 묻게 된다. 막동이, 영호, 종두와 공주, 신애와 종찬, 그리고 미자까지. 여기에 종수가 더해졌다. 벌써부터 나는 그의 안부가 궁금하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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