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용 모바일 게임 〈언리쉬드〉가 어린이날을 기념하여 어린이로 보이는 등장인물을 성적으로 부적절하게 표현한 일러스트를 공개했다. 업체는 문제가 불거진 이후 공개된 일러스트의 일부분을 ‘대충’ 가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취재를 위한 언론의 연락에도 불응했다.

〈언리쉬드〉를 옹호하는 논리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표현의 자유’다. 누구나 자기 의지에 따라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것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실존 인물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는 가상의 존재라는 점, 세 번째는 어린이를 에로틱하게 묘사하는 것(해당 일러스트는 성기 노출이나 직접적인 성행위 묘사를 하지는 않았다)이 다른 일탈 행위, 예컨대 약탈·방화·성폭행·살인·전쟁 같은 행위들을 묘사하는 표현물들에 비해 얼마나 더 나쁘냐는 것이다.

첫 번째 주장에 대해서는 이렇게 반박해보자. 표현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사회적 존재나 안전에 위해를 가할 경우 제약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을 자유롭게 허용하지 않듯이, 차별이나 혐오 표현(물론 그 범위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란의 한 축이지만) 역시 마찬가지다. 두 번째 주장 역시 재현의 윤리에 의해 기각된다. 실존하는 존재를 모사하는 가상의 표현물은 그것이 그리는 존재에게 영향을 끼친다. 일러스트가 묘사하는 것은 현실의 어떠한 어린이도 아니다. 하지만 그 외형이 그려내는 바는 어린이의 성적 대상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세 번째 주장은 논점 이탈이다. 일부를 제외하고 현재 비난은 모든 성적 표현물을 대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다른 표현물들 역시 각각의 내용과 형식에 대하여 사회적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표현한 이들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

ⓒ정켈 그림

여전히 생각해볼 점도 남는다. 무언가의 유해함 혹은 무해함을 판단하는 기준과, 그것에 대한 대응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위험이 공존한다. 하나는 자의적 검열이다. 수많은 권력자들은 ‘유해한 것을 정화’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의 몸과 생각을 구속해왔다. 다른 하나는 무절제한 표현들의 범람이다. 특히 여기에 상업성이 결부되면 선정성과 폭력성의 무한한 상승작용이 일어난다. 또 타인의 자유와 안전을 침해하는 표현은 사회적 약자의 삶을 망가뜨리고, 종국적으로 공동체를 파괴한다.

무해함은 입증하는 것이지 주장하는 게 아니다

모든 문제가 그러하듯 ‘하나의 해답’을 만들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무언가의 자유나 제재를 요구하게 된다. 다수가 언제나 옳지는 않을 것이고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런 문제는 결국 역사의 평가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조금 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없지는 않다.

하나는 쾌와 불쾌의 문제를 옳고 그름의 문제와 혼동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 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나에게 불쾌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것일 수 있으며, 내가 이해하거나 혹은 인정하지 못하는 것과도 공존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일관성을 갖는 것이다. 나를 옹호하는 논리를 상대방에게도 공정하게 적용하려는 노력이 있다면 이해도 대화도 용이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지킬 선을 스스로 그어야 한다. 모든 사회적 존재의 상상력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합의하여 만들어낸 한계에서 멈춰 서야 한다. 무해함은 입증하는 것이지 주장하는 게 아니다.

기자명 최태섭 (문화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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