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 3월 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 비핵화 진의를 확인한 데 이어 5월8일 북·미 정상회담 막바지 준비 작업차 다시 북한으로 날아갔다. 같은 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5년 미국 등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 및 독일(P5+1)과 이란이 합의한 역사적인 핵협정에서 탈퇴를 선언하며 폼페이오의 평양행을 알렸다. 그 직후 백악관에서 열린 브리핑 때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미국의 요구는 부분적으론 북한도 합의한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기초한다”라고 밝혔다.

문제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북한이 핵을 보유하지 못했던 시기에 나왔다. 핵무기 시험·제조·생산 금지는 물론 핵 재처리 및 우라늄 농축 시설의 보유 금지, 나아가 비핵화 대상 선정과 검증 등이 핵심 내용이다. 볼턴은 남북 정상회담 이틀 뒤인 4월29일에도 CBS 방송과 〈폭스뉴스〉에 나와 “1992년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따라 일체의 핵무기를 포기하기로 공약한 바 있다”라고 지적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5월7일 중국 다롄에 도착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비행장에서 영접을 받고 있다.

볼턴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유독 강조하고 나선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폼페이오 1차 방북을 통해 김 위원장이 비핵화 의지를 확인한 만큼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이른바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 원칙을 확실히 구현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CVID의 방법론과 관련해 ‘단계적·동시 행동(북한이 비핵화를 이행하는 단계마다 미국은 경제제재 완화 및 해제, 평화협정, 북·미 관계 수립 등을 단행해야 한다는 것)’을 추구하는 북한의 의견을 무시한 채 속전속결식 해결을 고집할 경우 타협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CVID는 원래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한창이던 2003~2005년 미국이 북한에 강력히 주장한 원칙이다. 오바마 행정부 들어 6자회담이 좌초하면서 지난 몇 년간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비핵화 이슈가 다시 전면에 떠오르면서 CVID 역시 집중적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폼페이오 장관은 취임사에서 “우리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를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비가역적 방식으로 폐기’하는 ‘PVID’를 지체 없이 시행해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이라고 밝혔다. PVID는, CVID의 ‘Complete (완전한)’를 ‘Permanent(영구적)’로 바꾼 용어인데, 핵 외에도 생물화학무기를 포함하는 대량살상무기까지 폐기 대상으로 논의 테이블에 올리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당초 북한의 비핵화를 겨냥한 북·미 정상회담의 공식 의제가 대량살상무기로까지 확대될지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 없다. 볼턴 역시 “북·미 정상회담에서 핵 외에도 탄도미사일, 생물화학무기, 억류 미국인 및 일본인 납치자 문제 등 다른 안건도 있다”라면서도 “당장엔 북한과 과거 합의한 핵 문제부터 논의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라고 〈폭스뉴스〉에서 밝혔다. 즉 비핵화가 최우선 논의 사안임을 분명히 했다. 폼페이오 장관도 4월29일 한 인터뷰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난 것은 진정으로 비핵화의 기회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만난 이후엔 그 기회가) 실제로 있다고 믿는다”라고 밝혔다.

비핵화와 관련해 북·미 양측이 얼마나 간극을 좁힐 수 있는지는 아직까지 미지수다. 비핵화의 구체적 방법은 물론이고 폐기 시한, 나아가 폐기에 따른 보상에 이르기까지 북·미 양측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 때문이다. 볼턴은 〈폭스뉴스〉에서 “완전한 국제적 검증과 함께 북한은 자국의 핵무기 프로그램과 관련한 모든 것을 전적이고 완전하게 공개해야 한다. 우선은 폐기 대상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내는 게 급선무다”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스〉는 5월6일 기사에서 북한에 대한 비핵화 검증이 시작된다면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보유한 조사 인력 300명을 훨씬 웃도는 요원이 필요한 사상 최대의 광범위한 사찰이 실시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북한 무기는 최소 20개(미국 중앙정보국 추산)에서 최대 100개(미국 국방정보국 추산)에 이른다. 북한은 또한 원자력 산업단지 400여 곳, 비밀 핵연구소와 핵시설 40~ 100개(랜드연구소 추산), 원자로 최소 2기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의 궤도 수정 필요하다’는 견해도

ⓒEPA5월8일 백악관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 핵협정 탈퇴를 선언하며 문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전직 행정부 관리들과 민간 싱크탱크 전문가들은 CVID가 안고 있는 구조적 복잡성을 고려할 때 미국의 현실적인 궤도 수정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대표적 인사가 1994년 제네바 핵합의 당시 미국 측 협상 주역인 로버트 갈루치 전 대사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그는 〈코리아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CVID에 근거한 비핵화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이 25개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신고해도 그게 전부인지 검증할 길이 없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특정 시한을 설정해 북한의 핵 생산능력을 제한하는 게 현실적 방안이라고 갈루치는 주장한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토비 댈턴 핵정책 프로그램 국장도 〈포린 어페어스〉 최근호에서 “단기적으로 완전한 비핵화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핵무기 및 운반 수단 추가 개발에 질적·양적 제한을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가하는 게 오히려 더 현실적이다”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CVID를 넘어서 PVID까지 거론하는 마당에 이런 식의 제한적 비핵화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심지어 협상 중에도 CVID를 끌어내기 위해 최대의 압박을 계속하겠다는 것이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다. 더욱이 내심 노벨 평화상에 들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1990년대 초 불거진 뒤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난 난제를 자신의 임기 시한인 2021년 1월까지 속전속결로 해결하고 싶어 한다.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폼페이오 장관의 2차 방북 직전인 5월7일 이틀 일정으로 시진핑 중국 주석을 만나 비핵화에 관한 ‘단계적·동시 행동’ 입장을 전하고 지지를 이끌어낸 것도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의 ‘단계적·동시 행동’ 주장을 원천 차단하고 싶어 한다.

이처럼 북·미 양국의 비핵화 견해차가 있는 가운데 핵 문제 전문가인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의 비핀 나랑 정치학 교수가 〈워싱턴포스트〉 5월4일자 기고문에서 북·미 정상회담의 현실적 기대치를 ‘핵실험에 대한 검증 가능하고 항구적인 종식’ ‘특정 시한 내 핵 및 미사일 능력 감축’ ‘한반도 긴장 완화 과정’ 등 세 가지로 진단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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