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 핵협정(포괄적 공동행동계획·JCPOA) 탈퇴를 선언한 당일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북한에 파견한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란 핵협정 탈퇴 선언이 “(북한에) 불충분한 합의는 수용할 수 없다는 분명한 신호를 보낸 것이다”라며 대북 압박의 연장선에서 설명했다. 대다수 언론이나 전문가들도 미국의 이란 핵협정 탈퇴에 대해 볼턴식 해석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2차 방북 결과, 지난 4월 말 이후 북·미 관계에 형성된 불확실성이 제거되었고 정상회담까지 낙관적인 전망이 가능해졌다. 돌이켜보면 북·미 관계에서 이란 핵협정 문제가 압박용 카드로 활용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AP Photo5월10일(현지 시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메릴랜드 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북한에 억류됐다 풀려난 한국계 미국인 김동철씨와 악수하고 있다.

지난 4월12일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의원들과 폼페이오 국무장관 지명자의 질의응답에서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제프 플레이크 공화당 의원이 “이란 핵협정 파기 움직임이 김정은 위원장과 북핵 회담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고 묻자 폼페이오 지명자는 “이란 핵협정은 김정은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나중에 비밀 방북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이 같은 자신감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직접 확인한 데에서 비롯했다는 추론이 가능해졌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3월31일~4월1일 그의 첫 방북 목적에 이란 핵협정 탈퇴에 대한 북한의 반응 확인도 포함됐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북한이 이를 빌미로 ‘사고’를 치면 미국은 이란과 북한 두 개의 전선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미국이 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 두 전선에서 싸우는 것은 부담스럽다. 이런 상황을 피하는 게 미국 외교정책의 기본이다. 미국은 이란 문제라는 판도라 상자의 문을 열었다. 3개월 후부터 대이란 제재가 재개되면 이란의 대응 여하에 따라 어떤 식으로 사태가 전개될지 알 수 없다. 이란의 핵 개발 재개, 시리아에 진출한 친이란계 시아파 세력과 이스라엘 간 전쟁 위기 고조 등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미국 처지에서 북핵 문제는 동북아라는 지역 내 분쟁인 데 비해, 이란 문제는 말 그대로 지구적 차원의 국제분쟁이다. 북핵 문제와 뒤섞여 혼선을 빚는 것은 당연히 피해야 한다.

중국이 관심을 두고 있는 주한 미군 문제

이란 핵협정 탈퇴를 선언한 5월8일(현지 시각)은 북·미 간에 전개된 갈등을 끝내고 본격적인 정상회담 준비로 진입하는 터닝 포인트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었다. 폼페이오의 2차 방북이 이루어진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이란 핵협정 탈퇴 시한은 원래 5월12일이었다. 2015년 7월 미국을 비롯한 안보리 5개국 및 독일과 이란 간에 이란의 핵시설과 우라늄을 제한하고 경제제재를 푸는 이란 핵협정이 체결됐다. 이를 반대한 공화당은 ‘이란 핵합의 검토법(INARA)’을 제정해 90일마다 미국 대통령이 이란의 핵협정 준수 여부를 판단해 승인 내지 불승인 의사를 의회에 통보하도록 했다. 이번 시한이 바로 5월12일이었다. 이 점을 감안하면 4월 말부터 북·미 간에 협상 조건을 둘러싸고 불거졌던 진통 역시 데드라인이 5월12일까지였던 셈이다. 이 기간에 미국과 북한은 기 싸움을 벌이면서 각자 챙겨야 할 동맹국들의 민원에도 성의를 표시하는 시간을 보냈다. 이런 민원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주변국들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했다.

발단은 4월 말 북·미 간 진행된 비밀 접촉이었다. 5월3일자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중앙정보국(CIA) 당국자와 핵 전문가를 포함한 미국 협상단 3명이 4월 말부터 일주일 일정으로 정상회담 조율차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했다. 이들의 소속 기관이나 임무를 살펴보면 3월31~4월1일 폼페이오 방북에 이은 후속 방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폼페이오 방북 당시 북한은 핵시설뿐 아니라 기존 핵무기에 대한 검증과 사찰에도 동의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어 트럼프 대통령을 고무시킨 바 있다. 4월 말 방북은 핵 전문가들이 직접 가서 당시 합의 내용을 기술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합의 과정은 순조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1차 방북 당시 북한이 폼페이오에게 약속한 대로, 모든 핵시설과 핵무기의 사찰에 임하겠다는 자세를 보인 것이다. 특히 20여 개로 알려진 핵무기의 사찰에 응하겠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또한 미국이 원하는 ‘완전하고도 검증 가능한 불가역적인 북핵 폐기(CVID)’ 방식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협의 내용이 그대로 북·미 정상회담 합의문에 담길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쟁점이 있었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인 2021년 1월까지 신고-검증-폐기를 진행하자고 주장한 반면 북한은 단계별로 동시에 대가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일괄 타결이니 조속한 타결이니 하는 핵 폐기만 들어 있지 보상에 대한 내용이 뚜렷하지 않았던 것이다. 북한은 당연히 체제 보장·국교 정상화·경제제재 해제 등 보상이 단계별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Xinhua중국을 방문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5월8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만나 산책하며 대화하고 있다.

핵 폐기 절차와 보상 방법이라는 본질적인 지점에서 북·미 사이 이견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각자 동원 가능한 외교적 자원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5월3일자 〈뉴욕타임스〉 보도 역시 그중 하나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불과 몇 주일 앞두고 미국 국방부에 주한 미군 병력 감축 옵션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주한 미군 감축 옵션은 북·미 정상회담에서 논의될 평화협정과 연계될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당시 미국 국방부나 다른 기관 관료들은 한·미 동맹을 약화시키고 일본의 우려를 키울 수 있다며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파문이 확산되자 청와대가 미국 NSC 관계자 발언을 인용해 그런 사실이 없다고 진화에 나섰다.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역시 트럼프 대통령이 관련 지시를 한 바 없다며 〈뉴욕타임스〉 보도를 “완전 난센스”라고 일축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주한 미군 문제가 당장 북한과의 협상 테이블에 오를 문제는 아니라고 무마에 나섰다.

 

그러나 내막을 살펴보면 주한 미군 감축 옵션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북한이 미국과의 물밑 협상 과정에서 이 카드를 꺼낸 것이다. 우리 정부 주변에서도 공식적으로는 부인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점을 시인하는 분위기다. 트럼프 대통령도 북한 요구를 자기 입맛대로 활용하려 한 측면이 있다. 주한 미군 주둔 비용을 100% 한국이 지불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그로서는, 평화협정 체결과 연계해 북한 요구를 자신의 구상을 가동할 기회로 여겼을 수 있다.

북한이 주한 미군 감축을 요구한 것은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군사적인 위협 해소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평화협정이 체결될 경우 2만8500명 수준에 이르는 주한 미군 병력을 자신들에게 위협이 안 되는 수준으로 줄여 평화유지군으로 성격을 전환해달라고 하는 것은, 북한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요구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지난 3월5일 대북 특사단 방북 당시 김정은 위원장은 한·미 연합훈련에 대해 평시와 같은 훈련이라면 수용하겠다고 선선히 대답했다. 당시 분위기로는 주한 미군 주둔도 김 위원장이 용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북한이 김일성 주석 이래 내부적으로는 한반도 균형자로서 주한 미군의 주둔 필요성을 인정해왔다는 점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즉 주한 미군 주둔 허용도 선대의 유훈인 셈이다. 특히 4월27일 판문점 선언 제3조 3항도 주한 미군 문제와 무관치 않다. ‘남과 북은 정전협정 체결 65년이 되는 올해에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며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남·북·미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적극 추진해나가기로 하였다.’ 즉,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을 남·북·미가 할 수 있다고 명시해 여차하면 중국을 뺄 수 있다고 한 것은, 중국이 들어오면 주한 미군 철수를 강력히 요구할 것을 우려한 미국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이처럼 판문점 선언까지는 일관된 태도를 보여온 북한이 주한 미군 감축 문제를 제기했다면 그 뒤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미국과의 협상이 벽에 부딪히면서 미국을 압박할 수단이 필요했거나 중국의 요구에 일정 정도 반응할 필요가 생겼을 수 있다. 중국에게 주한 미군 문제는 한반도와 관련한 최대 현안이다. 3월25일 김정은 위원장을 급히 초청하고 5월2~3일 왕이 외교부장(장관)이 외교부장으로서는 11년 만에 방북을 강행하는 등 중국이 다급한 움직임을 보인 배경 역시 주한 미군 용인과 관련한 문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주한 미군은 북한의 협상 카드이자 중국의 민원 사항이기도 한 셈이다.

갑자기 PVID가 왜 등장했을까

ⓒ연합뉴스5월9일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가운데), 리커창 중국 총리(왼쪽)가 한·일·중 정상회의를 했다.

주한 미군 감축 옵션과 관련해 북한이 중국을 의식했다면 미국은 일본을 앞세웠다. 5월2일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취임사에서 “북한 대량살상무기(WMD) 프로그램을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폐기(PVID)하도록 전념하고 있다”라고 발언한 것이 신호탄이다. 대북 협상의 허들을 한껏 끌어올린 것이다.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 역시 5월5일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장과 만나 “모든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생물화학무기 등 북한 대량살상무기의 완전하고 영구적인 폐기를 달성하자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했다”라며 일본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 3월15~18일 미국을 방문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장관이 당시 폼페이오 국무장관 지명자, 매티스 국방장관, 존 설리번 국무부 부장관 등에게 북·미 정상회담 개최에 앞선 5가지 전제 조건을 제시했을 때만 해도 미국의 태도는 냉랭했다. 고노 외무장관이 밝힌 조건은 한반도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중거리 탄도미사일 폐기,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수용, 일본인 납북자 문제 해결, 화학무기 폐기 등이었다. 이에 대해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북한이 비핵화, 핵 및 미사일 실험 동결, 한·미 합동 군사훈련에 대한 이해 등 세 가지 약속을 지키면 북·미 정상회담은 예정대로 열린다”라고 일축한 바 있다.

미국이 협상 문턱을 대폭 끌어올린 것을 두고, 북한이 유연하게 나오자 더 밀어붙여본 것이라거나 주한 미군 감축 요구에 대해 일본의 민원도 들어줄 겸 맞불을 놓은 것이라는 등 설명이 모두 가능하다. 하지만 협상 문턱을 높이면서 결과적으로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2차 방중의 빌미만 주었다.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미국의 압박에 맞서는 협상 전략 차원에서 중국의 지지가 필요했고, 비핵화에 대한 보상을 미국으로부터 받지 못할 것에 대비한 보험 차원으로 중국의 경제협력 약속이라도 받아둘 필요가 있었다. 김 위원장은 폼페이오 1차 방북 당시의 협의에 기초해 지난 4월20일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핵·경제 병진노선을 폐기하고 경제 집중 노선으로 전환하겠다고 이미 선언했다. 하지만 남·북·미 3자 구도만 믿고 있기에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5월9일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 도쿄에서 리커창 중국 국무원 총리,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각각 양자회담 및 한·중·일 정상회의를 했다. 문 대통령과 중국의 리커창 총리는 양자회담 뒤 “북한에 일방적 요구만 할 게 아니라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실행하면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북한의 체제 보장과 경제개발 등 미래를 보장하는 데 적극 동참해야 한다”라고 뜻을 모았다. 또 문 대통령은 “북한의 경제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서울-신의주-중국을 잇는 철도 사업을 검토할 수 있고 한·중 간에 조사연구 사업을 선행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런 한·중 합의는 현재의 상황에 맞는 적절한 진단이자 처방이다. 당 전원회의를 통해 핵을 포기하고 경제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한 김정은 위원장에게 핵 포기에 상응하는 단계별 경제개발 청사진과 국제사회의 지원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지난 4월27일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에게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이 담긴 USB를 건넨 문 대통령이 서울-신의주-중국을 잇는 철도 사업을 제안한 것은 중국의 협력뿐 아니라 미국의 호응을 촉구하기 위한 강한 제스처이다.

평양을 방문했던 폼페이오 장관이 북한에 억류되었던 한국계 미국인 3명을 데리고 귀환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 생각에 이것(북·미 정상회담)은 성공적인 거래가 될 것이다”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5월10일자 〈노동신문〉 등 북한 언론도  김정은 위원장 역시 폼페이오 장관과 “만족한 합의”를 봤다고 보도했다. 북·미 양측이 우여곡절 끝에 정상회담을 향한 여정에 만족감을 표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북한 비핵화와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라는 합의가 어떻게 도출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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