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슴슴하다’라는 북한 말을 대한민국 표준어 반열에 올린 음식이 있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펼쳐진 평화 국면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먹을거리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누구나 아실 테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멀리서 왔다고 하면 안 되갔구나”라고 한 그 음식. 평양냉면이다.

그렇다. 실제로 평양냉면은 우리에게 무척 가까운 음식이다. 아니, 이미 가장 ‘핫’한 외식 메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여름철뿐 아니라 사시사철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판문점 선언 이후 문전성시를 이루는 평양냉면집 풍경은, 사실 그리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 인사들이 ‘평뽕’을 맞은 마니아임을 선언하고 저마다 ‘평냉부심’을 늘어놓는다. 웬만한 음식 평론가조차 이런 기세에 짓눌려 함부로 품평을 하지 못할 지경이다. 우리 사회에 이런 음식이 또 있었던가. 날로 뜨거워지는 평양냉면의 인기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한국 공동사진기자단4월27일 남북 정상회담 당시 만찬 메뉴로 나온 옥류관 평양냉면.
우선 ‘맛’이다. 서울 구의동 서북면옥에는 ‘大味必淡(대미필담)’이라고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정말 좋은 맛은 반드시 담백하다’라는 뜻이다. 짜고 매운 음식 위주였던 우리 음식(특히 외식) 패러다임에서 평양냉면의 존재는 각별하다. 새콤달콤매콤한 비빔냉면과 달리 ‘무미(無味)의 맛’이라고까지 불리는 평양냉면은 젊은 세대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면을 볼 한가득 욱여넣고 우적우적 씹다가 간을 한 듯 안 한 듯 슴슴한 육수를 들이켜면 그 자체로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그윽한 메밀 향은 입안에 번지고 옅은 고기 향이 밴 국물이 면과 함께 목젖을 타고 흐른다. “평양냉면은 치아가 아니라 목젖으로 끊어 먹는 것이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지 싶다.

‘놀이’의 기능도 있다. 그릇 안에 색색의 고명과 냉면 사리가 예쁘게 틀어 앉은 담음새는 사진 한 컷으로 SNS에 올리기 좋은 소재다. 대략 1만원 남짓인 냉면 값은 누구나 관심을 가지는 외식 메뉴 가격치고는 부담스럽지 않다. 7000원짜리 김치찌개는 SNS ‘먹방’의 소재가 되기 어렵지만, 1만원짜리 평양냉면은 된다. 우래옥, 을밀대, 봉피양 등 각기 다른 냉면집의 맛과 모양새를 비교하는 재미야말로 최고의 놀이다. 인터넷 공간에서는 냉면 사진만 보고 어느 집 냉면인지 맞히는 놀이가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면스플레인’이 있다. 냉면의 ‘면’과 설명을 뜻하는 ‘익스플레인 (explain)’이 합쳐진 신조어로, ‘남성 꼰대’들이 평양냉면을 앞에 두고 일장 연설을 하는 걸 비꼬는 말로 주로 쓰인다. 비빔냉면을 하수 취급하거나, 면을 가위로 잘라 먹는 걸 금기시하는 것 따위다. 이는 분명 독선적인 태도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면스플레인을 ‘비토’할 이유는 없다.

ⓒ시사IN 이명익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4월27일 점심시간,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위치한 평양냉면 식당 을밀대에 손님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가령 메밀 함량이 몇 %인가를 두고 벌이는 논란은 척박한 한반도 북쪽 땅에서 왜 메밀이 주요한 식재료로 자리 잡았느냐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 평양냉면의 원형이 어디에 있는지 벌이는 갑론을박도 길게 보면 분단과 피난의 역사를 따라가야 이해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다. ‘선주후면(먼저 술을 마신 뒤 냉면을 먹는 것)’ 관습은 분식집 냉면에 길들여져 있던 청년층을 평양냉면의 세계로 이끄는 데 한몫했고, ‘의정부파’ ‘장충동파’ 등 계통에 따라 미묘하게 갈리는 맛과 모양새를 비교하는 일은 월남한 실향민의 남한 정착기를 들여다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면스플레인의 역사는 냉면 상업화의 역사와 일치한다. 겨울 한 철 동치미 국물에 메밀국수를 말아 먹었던 것에서 유래한 오늘날 냉면은 19세기 인공제빙과 그 뒤 냉장고의 등장으로 사계절 외식 음식으로 거듭난다. 음식문헌 연구자 고영씨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신문에 이미 선주후면, 냉면 원조 경쟁, 여름냉면· 겨울냉면 논란이 등장할 정도다 (〈시사IN〉 제536호 ‘면스플레인은 유서 깊은 놀이’ 기사 참조).

평양경찰서장이 냉면집 주인에 윽박지른 사연

당시 냉면은 평양만의 것이 아니었다. 서울, 개성, 진주 등에 각기 나름의 냉면집이 있었다. 다만 당시 최고 품질로 평가받은 ‘평양우’로 육수를 낸 평양냉면 맛을 좀 더 쳐줬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평양냉면 배달부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인 일화도 유명하다. 1929년 평양 시내 배달부 160명이 파업을 벌이자 냉면집 주인들은 이들을 전원 해고한다. 이로 인해 냉면 배달이 끊기자 결국 평양경찰서장이 냉면집 주인들에게 배달부를 복직시키지 않으면 영업정지를 내리겠다고 윽박질렀단다.

해방 이후에도 냉면의 인기는 계속됐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에 따르면 1965년 서울시가 점심 때 식당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조사한 자료가 있는데, 조사 대상 114명 중 제일 많이 먹은 것이 냉면이고 그다음이 불고기백반, 설렁탕, 비빔밥이었다. 50~100년 전에도 오늘날 못지않은 냉면 열풍이 일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전통 냉면집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먼저 ‘위생’이 문제였다. 보건 당국이 여름철 ‘대장균 냉면’을 집중 단속하면서 문을 닫는 냉면집이 속출했다. 1980년대 경제 호황과 함께 크게 늘어난 고깃집도 냉면집을 위축시켰다. 이들 고깃집은 냉면을 후식용으로 싸게 냈다. 인공조미료 육수와 값싼 전분으로 만든 면이 사람들 입맛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통 냉면집들은 손님을 잃어갔다. 지금 우리가 평양냉면 노포라 부르는 집들은 어찌 보면 이런 와중에 겨우 생존한 집인 셈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 위축돼가던 평양냉면이 왕년의 인기를 되찾은 것은 2000년대 이후 미식 열풍 탓이 컸다. 앞서 말한 평양냉면의 맛, 놀이, 면스플레인은 폭발하는 미식 ‘썰’과 가장 잘 부합했다. 별점 매기기 따위를 뛰어넘는 미식 담론의 지형이 펼쳐진다면, 아마도 평양냉면이 맨 앞줄에 설 것이다. 우리에게는 좀 더 가치 있는 면스플레인이 절실하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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