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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보는 그림책에 웬 싸움?

김서정 (동화작가·평론가)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5월 16일 수요일 제5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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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싸움> 전미화 지음, 사계절 펴냄

지독한 가뭄이 이어지자 서로 자기 논에 물을 대려는 농부들이 싸운다. ‘아이들 보는 그림책에 웬 싸움?’ ‘화단의 풀꽃처럼 아이들 삶에 들어올 수도 없는 벼 키우는 소재?’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런 책을 본 소감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뉜다. 남의 다리 긁는 듯하거나 제대로 뒤통수를 치면서 눈이 번쩍 뜨이게 하거나!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

이 그림책은 철저히 어른용 같다. 어른들 일인 벼농사. 1년 생계가 달린 물 확보에 핏발 선 눈으로 달려드는 농부들. “그들은 눈만 마주쳐도, 옷깃만 스쳐도 싸운다. 아래 윗마을 싸움으로 번진다.” 보에서 가장 먼 논부터 차례로 물을 대는 ‘팻물’이 시행되지만, 한 농부가 약속을 어기고 중간에 제 논으로 물을 빼돌린다. 삶의 가장 아래쪽 현장, 절박한 상황에서 필사적인 몸부림. 가혹한 환경에 철저히 무력해지면서 궁지에 몰릴 때 드러나는 인간의 밑바닥 이기심을 보여준다. 멋지다!

가장 멀리 있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흐르게

멋지다고 말하는 이유는 단지 그런 모티프를 다루었기 때문이 아니다. 작가가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이 멋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떻게 끌고 나가서 어떤 인간관과 세계관으로 수렴시키느냐가 멋지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붓질은 대단히 힘차고 과감하다. 잡담 빼고 본론으로 들어가는 듯 형체와 색이 현장감을 한껏 증폭시킨다.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 간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농부들의 타들어가는 속이 뜨끈하고 뜨끔하게 전달된다. 약속, 질서, 배려 같은 도덕률 이전의 원초적 생명의 힘이 느껴진다. 그리하여 ‘약속을 어기고 제 논에 물꼬를 트는’ 한 농부를 비난할 수가 없게 된다. 그의 ‘절박한 눈’에 동조하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독자를 생태적 공감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자연과 인간을 함께 끌어올려 더 높은 종교 같은 차원으로 데려간다. 집단의 약속을 어긴 농부가 어떤 벌을 받는지 보여주는 대신 갈가리 찢어진 땅의 가슴을 보여준다. 곧이어 모두를 용서하는 듯 비가 쏟아진다. 개구리가 울어대고 풀은 다시 푸르게 자라 오른다. 내내 회색과 갈색의 무채색 톤이던 그림이 파랑과 초록으로 일어선다. “농부는 기어이 울고 만다.” 아마도 물을 빼돌린 그 농부이리라. 혹시 그를 용서할 수 없었던 독자라도 ‘기어이’ 때문에 마음이 무너질 것이다. 그의 내리깐 눈과 살짝 양 꼬리가 들어 올려진 입 때문에 그가 그동안 겪었을 마음고생을 이해할 것이다. 

그 바로 뒷장면, 마지막 장면은 밥 한 공기, 벼 한 포기를 상에 올려놓고 나란히 절을 올리는 농부들 모습이다. “쌀 한 톨의 무게를 하늘도 땅도 농부도 안다”라는 글 덕분에 아이들에게 책을 건네는 어른들은 안도한다.

물론 이 책을 통해 아이들에게 농사의 어려움, 농작물의 소중함을 강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생각도 뻗어나간다. 예를 들면 ‘팻물’이 논에 대는 물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돈이건 교육의 기회건 보살핌의 손길이건, 풍성한 원천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장 속이 타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먼저 흐르게 해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칠 수도 있다. 그렇게 해야 ‘더 큰 싸움을 막고 사람과 논을 살린다’. 혹시 누군가 중간에서 가로채거나 빼돌리더라도 하늘이 ‘기어이 울고 마는’ 상황을 만든다는 것도 떠올릴 수 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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