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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잃은 양자택일 ‘냉전이냐 통일이냐’

한국 정치는 ‘북한 변수의 힘이 약해졌으되 사라지지는 않은 장기적 전환기’를 지나는 중이었다. 4·27 남북 정상회담은
국내 정치 지형에 어떤 격변을 불러올까.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2018년 05월 07일 월요일 제5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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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변수는 언제나 국내 정치를 제약하는 거대한 힘이었다. 그래서 4·27 남북 정상회담은 이후 국내 정치에도 큰 충격파를 보낼 가능성이 있다.

반공주의는 북한 변수가 한국 정치를 규정했던 경로다. 이승만 정권은 갓 태어난 냉전 질서를 바탕으로, 미·소 대결 구도를 이용해 미국을 끌어들여 신생국가의 안전보장을 추구했다. 이는 1953년 한·미 상호방위조약으로 중요한 결실을 맺었다. 반공주의의 국내 정치 버전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2월 제정한 국가보안법이었다. 신생 반공국가는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을 향한 무기를 나란히 장착했다. 두 기둥인 한·미 동맹과 국가보안법은 사실상 ‘헌법 위의 헌법들’이었다.

주적이 분명한 반공국가에서 정치의 공간은 매우 좁았다. 특히 국가보안법으로 대표되는 ‘내부의 적 솎아내기’가 왼쪽에 그어둔 한계선은 뚜렷했다. 사회개혁과 재분배를 요구하는 정치세력은 ‘빨갱이’ 딱지가 붙었다. 진보파의 공간이 사실상 닫혔다. 이념적 폭이 좁은 ‘보수 양당 체제’가 굳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야당 대표 시절이던 1995년 중도 보수 노선을 내걸어 ‘원조 보수 논쟁’을 촉발한 적이 있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지는 진보파의 원류인 DJ도 한때 보수 깃발을 들 만큼 보수 양당체제의 힘은 강했다.

ⓒ시사IN 신선영
4월27일 관광객들이 서울광장에 설치된 판문점 사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묘한 역설도 있다. 북한은 한국 정치의 왼쪽만큼이나 오른쪽에도 한계선을 그었다. 어떤 의미로는 북한 덕분에, 한국 정치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신생국가 시절에 받아들여서 제법 오래 유지했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로도 한동안은 민주적 제도와 문화가 작동했다. 1972년에는 독재로 완연히 퇴행했으나 비교적 짧은 15년 만에 극복해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 중에는 흔치 않은 성취다. 냉전기 미·소 체제 경쟁 구도에서, 한국은 미국 체제가 우월하다고 세계에 선전하는 전시장이었다. 미국 처지에서 한국에 기대하는 최우선 가치는 반공이었으나, 이왕이면 자유민주주의적 질서도 함께 바랐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의 독재자들을 축출하지는 않았어도 제약했다. 1973년 박정희 정권이 김대중 납치 살해를 시도하자 주한 미국 대사관은 박 대통령을 압박해 김대중을 구출해냈다.

한 걸음 더 나가는 해석도 있다. 정치발전소 박상훈 학교장은 “진보 정당의 등장이 불가능했던 한국 정치에서 북한이 ‘유사 진보 정당’으로 기능했다. 이것이 여러 신흥 공업국들 중에서도 한국이 불평등과 폭력이 덜했던 이유였다”라고 말했다. 민주적 정통성이 없거나 불완전했던 남한 정권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해야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압력 때문에 한국은 남미의 신흥 공업국들보다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더 기울였다. 경제학계에서는 박정희 집권기에 불평등이 대체로 완화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최소한 남미보다는 확연히 더 평등했다.

이렇게 해서 북한은 한국 정치의 대역폭을 대단히 좁게 만드는 ‘이중의 한계선’을 그었다. 왼쪽으로는 진보적 정치세력의 등장을 봉쇄했다. 오른쪽으로는 민주주의와 재분배 정책을 위협하는 일련의 반동 시도를 그럭저럭 제약했다.

이 이중 한계선이 1990년대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국제사회에서는 소련이 붕괴하며 냉전체제가 끝났다. 한반도에서도 체제 경쟁이 남한의 승리로 끝났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었다. 왼쪽 한계선은 점점 더 약해졌다.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 정당이 제도권 정당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국가보안법은 ‘신성불가침’에서 ‘중대한 논란거리’로 위상이 격하되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17대 국회는 국가보안법의 핵심 독소 조항인 찬양고무죄를 없애는 합의에 거의 도달했다. 오른쪽 한계선도 닳아갔다. 한국의 불평등 수준이 1990년대 이후 치솟은 데에는 국제 환경 변화 외에도, 체제 경쟁의 종말이 나름 역할을 했다고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정부가 재분배 정책을 펼 유인이 약해졌다는 의미다.

정치 엘리트들은 이 중대한 변화에 적응하려 온 힘을 쏟았다. 보수는 약해져가는 냉전체제의 재활용을 시도했다. 반공이 대중적 설득력을 잃어가자 보수는 대체어를 개발하거나 외부에서 차용했다. ‘종북’은 내부의 적 서사를 이어가는 핵심 키워드였다. 박근혜 정권에서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영화 <변호인>과 같은 문화 상품까지도 국가의 적으로 간주했다. 냉전의 재활용이 시대착오였다는 사실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등이 불거지면서 적나라하게 확인된다.

민족주의 색채 옅었던 4·27 정상회담

ⓒ시사IN 조남진
4월27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에서 보수 단체 회원들이 남북 정상회담을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외부의 적으로는 ‘핵’이 반공의 대체어로 자리 잡았다. 남북 정상회담 일정이 다가오던 4월23일 자유한국당은 “이번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완전한 핵 폐기로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를 이끌어내길 바랍니다”라고 논평했다. 회담 결과가 나온 당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의원은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이 막연히 한반도의 비핵화만을 이야기했다. 대한민국은 북한에 모두 퍼주면서 북한으로부터는 실질적으로 얻은 것이 없다”라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썼다. 정상회담 당일 아침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약속한 듯 ‘비핵화’ 또는 ‘북핵’을 1면 표제로 뽑았다.

이는 보수 블록이 북핵을 다루는 전형적 방식을 보여준다. 비핵화는 수많은 산을 넘어야 겨우 달성 가능한 협상의 최종 목표다. 그런데 보수는 그걸 협상의 출발점으로 간주한다. 이 접근법으로 문제가 실제로 풀리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이명박·박근혜 집권기는 보여주었다. 하지만 국내정치용 메시지로는 효용이 남아 있다. 보수 블록이 말하는 ‘북핵’은 진지한 문제 해결 노력을 대표하는 말이 아니라 국내 정치에서 반대파를 압박하는 공격용 슬로건에 점점 더 가까워졌다.

진보파들의 대응에도 변화가 뚜렷이 감지된다. 냉전체제의 귀결이 분단이라면, 탈냉전이란 통일과 함께 올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분단 이후 진보파의 주류였다(김대중 대통령은 국제정치의 보편 맥락에서 북한 문제를 풀어보려 했던 예외였다). 이후 사반세기에 걸친 탈냉전 과정이 통일 없이도 진행되면서, 탈냉전과 통일의 연결고리가 서서히 약해졌다. 이제 진보파 주류들은 민족담론 없이도 대북관계를 다루는 법을 익혀가고 있다. 이는 국내 정치에서 북한 이슈가 불거질 때 진보파의 면역력을 높일 수 있다.

이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학생운동권 시절 민족주의 급진파에 속했던 임 실장은 이제 문재인 정부의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으로 보편주의 접근법을 이끌고 있다. 4·27 정상회담 추진 과정에서 민족주의 색채는 지난 두 차례 정상회담보다 훨씬 옅어졌다. 민족적 특수 관계를 강조하는 언어는 국제 관계를 묘사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언어로 대체되었다. 청와대는 정상회담 슬로건을 ‘평화, 새로운 시작’으로 정했다. 한민족을 강조하는 표현은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지난해 7월6일 문재인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에서 ‘베를린 구상’으로 불리는 중요한 연설을 했다. 거기 이런 대목이 있다. “통일은 평화가 정착되면 언젠가 남북 간의 합의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일입니다. 나와 우리 정부가 실현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평화입니다.” 민족적 특수 관계 이슈인 통일은 미래 의제로 일단 제쳐두고, 당장의 이슈인 평화를 보편적 목표로 제시한다. 그를 위해서는 제재가 필요할 때도 있다는 국제정치의 보편 논리를 충실히 따른다. “북한이 핵 도발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더욱 강한 제재와 압박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정상회담 합의문 발표 때 한민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의 준비 과정에 민족주의 코드가 얼마나 옅었는지가 더 두드러졌다. 박근혜 정부처럼 ‘통일’을 실질적 목표로 제시하는 일도 없었다. 4·27 정상회담은 지금까지 정상회담 중 통일담론이 가장 덜 분출한 회담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3월21일 남북 정상회담 준비회의에서 “남북이 함께 살든 따로 살든 서로 간섭하지 않고 서로 피해를 주지 않고 함께 번영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라고까지 말한다. 오히려 보수 언론이 반(反)통일 발언이라고 공격할 정도였다.

변화의 바탕에는 통일에 대한 국민 인식의 변화가 깔려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 준비 과정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논란이 터졌다. 민족적 특수 관계를 강조하는 논리가 설득력을 잃어간다는 징후였다. 왼쪽 <표>를 보면, 2007년에서 2017년 사이 10년 동안, 여론은 통일에 대해 덜 열정적이고 더 시큰둥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렇다고 대북 대결주의가 극적으로 강화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화에 대한 선호는 꾸준히 높아졌다. 통일이 민족적 특수 관계를 완성하는 목표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수단 중의 하나(반드시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로 조금씩 여론의 관점이 이동했다. ‘냉전이냐 통일이냐’라는 양자택일의 질문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렇듯 한국 정치는 북한 변수의 힘이 약해졌으되 사라지지는 않은 장기적 전환기를 지나는 중이었다. 한반도에서 냉전적 대결 구도가 부활한 탓에, 국내 정치에서 냉전적 문법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문법을 지탱할 국제 냉전체제는 더 이상 없다. 한반도의 대결 구도는 핵이라는 국제정치에서 특별한 무기를 둘러싼 갈등이다. 냉전식 체제 경쟁은 아니다.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평창 고속열차가 좋다던데 (문재인 대통령이) 북에 오면 참 민망스러울 수 있겠다”라는 말을 한다. 냉전식 체제 경쟁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북한 지도자마저 인정하는 시대다.

4·27 정상회담이 열린 것은 바로 이런 장기적 전환기의 한가운데였다. 정상회담이 국내 정치 지형에 격변을 불러올까. 알 수 없다. 만약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으로까지 이어진다면, 냉전을 재활용해온 보수는 다수파로의 복귀가 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북·미 정상회담 결과에 따라 한반도 평화체제가 다시 기약 없이 멀어질 가능성도 남아 있다. 냉전적 긴장이 불과 몇 달 만에 돌연 사라졌듯이, 돌연 되돌아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평가는 가능하다. 한국 정치의 대역폭을 대단히 좁게 만들었던 어떤 힘이 옅어져가는 장기적인 추세가 있었다. 4·27 정상회담은 그 추세를 한 번 더 크게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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