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7년 고려는 17만 별무반을 총동원해 동북면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는다. 여진족들은 동북 9성의 고려군을 쉴 새 없이 공격하는 한편으로 납작 엎드려서 빌어. “이 오아속(여진족 지도자),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겠습니다. 옛 땅을 돌려주시면 기왓장 한 장 던지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동북 9성을 돌려받은 여진족은 그야말로 급성장을 해. 고려에 엎드렸던 오아속의 동생 아골타는 거란을 물리치고 금(金)나라를 세운단다.

세 번이나 큰 전쟁을 치렀지만 거란과 고려는 근 한 세기 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어. 신흥 여진족의 공세에 시달린 거란은 몇 번씩이나 고려에 응원군을 청한다. 하지만 고려는 움직이지 않아. “남의 나라를 위해 출병하는 것은 흔단(釁端:일이 잘못되는 것의 시초)이 될 것이니 장래의 이롭고 해로움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쉬운 말로 번역하면? “공연히 끼지 말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읍시다.” 고려에는 먹고 싶은 떡이 있었어. 바로 보주(保州)라는 곳이었지.

ⓒ시몽포토에이전시=연합뉴스금나라를 세운 ‘여진족 지도자’ 아골타의 모습.

금나라 건국으로부터 100년을 거슬러 올라간 1014년(고려 현종 5년), 대륙과 반도를 잇는 요충지였던 강동 6주를 탐내던 거란은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영토 보주를 빼앗아 고려와 대치하게 돼. 강동 6주 코앞에 거란의 요새가 자리 잡은 셈이지. 현종은 당장 군대를 일으켜 보주성을 공략했지만 여의치 않았어. 심지어 귀주대첩에서 대승리를 거둔 뒤에도 고려는 보주성을 탈환하지 못했다. 그만큼 거란도 심혈을 기울여 사수하려던 곳이었고 고려 처지에서는 되찾아야 할 숙원의 땅이었지.

거란의 새 황제 즉위식에 참가한 고려 사신이 보주를 내놓으라고 대놓고 요구를 했고 군대를 동원해 위협했지만 거란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 고려가 공세를 중단하자 이번에는 거란 쪽에서 보주 지역의 방비를 강화하고 농경지를 확대하고 무역장을 설치해 보주를 아예 거란 땅으로 확고히 만들 태세를 갖추거든. 그러자 고려는 거란에 시달리던 송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는 가운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천명하지. 이때 거란에 보낸 편지 내용.

“압록강 동쪽을 우리에게 준다는, 돌아가신 귀국 황제의 교서에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보주를 점령했습니다. 몇 번 간청을 드렸는데 거절하고 무역장까지 설치한다는 건 선대 황제의 뜻을 어기는 것이고 소국(小國:고려)의 충성을 옳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대를 이어 대국의 울타리를 지키는 기쁨이 분노로 변하려 합니다. 이런 작은 이득 때문에 서로 원망을 맺어야 하겠습니까.”

정중하지만 ‘에지’ 있는 메시지 아니냐. 잘 하려고 노력해왔는데 왜 몰라주느냐는 하소연과 자꾸 이러다가는 재미없을 것이라는 으름장이 적절히 배합된, 상대방을 높이 쳐주되 숭배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낮추되 비굴하지 않은 편지였지. 이런 고려를 대(對)거란 전선에 끌어들이고자 고생한 게 송나라였어. 송나라는 자신의 맞수였던 거란과 비슷한 급으로 고려 사신을 대우했고 고려 사신들이 지나는 곳마다 접대하느라 중국 백성의 허리가 휠 지경이었거든. 시인 소동파가 “고려 사신들은 해롭기만 하다”라고 아우성을 칠 만큼 말이야. 송나라는 고려를 이용하려 들었으나 정작 이용당한 것은 송나라였지.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양대 강국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며 평화를 유지해. 보주성은 100년이 넘도록 고려에 돌아오지 않았어. 그러던 차에 금나라의 흥성은 동북아시아 정세를 극적으로 흔들어놓는단다.

거란과 금나라(여진족) 사이에서 고려가 한 일

ⓒ국립문화재연구소북한이 국보로 지정한 의주성 남문.
고려는 보주성을 점령하고 ‘의주’로 이름을 바꾸었다.

1116년 금나라 군대가 보주성 인근을 공략했어. 보주성이 위기에 처하자 고려는 이곳을 지키던 거란 관리를 회유하는 한편 금나라에는 사신을 보내 이렇게 얘기를 한다. “보주는 원래 우리나라 옛 땅이니 돌려주기 바라오.” 이 역시 고려의 양다리 전략이었어. 거란 쪽에 우리는 거란과 우호국임을 과시하는 한편으로 금나라에는 우리랑 거란과 해결할 일이 있다는 걸 알린 거야. 승승장구하는 금나라였지만 바로 몇 년 전만 해도 고려에 “동북 9성만 돌려주시면 영원히 기왓장 하나 건드리지 않겠나이다” 하고 바짝 엎드렸던 바로 그 여진족 아니겠니? 금나라로서는 고려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지. 금나라의 대답이다. “고려가 스스로 그 땅을 회복하시오.” 즉 고려의 보주성 점령을 인정한 거야. “고려를 우군으로 삼아 거란과의 연합을 막으려는 금나라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고려는 금나라의 이런 의도를 미리 꿰뚫고 금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박종기, 〈고려사의 재발견〉).” 

한편 금나라의 공격은 더욱 드세졌고 고립무원이 된 보주성의 거란 관리 야율영은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 “반란으로 길이 막히고 곡식을 채 수확하지 못해 쌀값이 급등하여 백성들이 곤궁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에 식량을 빌려달라 청하였으나 여의치 않았으므로… 이제 고을 백성들과 관할 지역을 인계하고 가니 이를 인수한 뒤에는 우리 황제의 조칙에 따라 시행하기 바랍니다.” 고려가 망해가는 나라의 황제 조칙을 따를 까닭이 있나. 고려는 냉큼 군대를 출동시켜 주인 없는 들판이 돼버린 보주성을 점령하고 고려 영토로 말뚝을 박아. 이름까지 바꿔버리지. 의주(義州)로 말이다.

“압록강의 옛 터(보주)와 계림의 옛 땅은 멀리 선조 때부터 옷깃과 허리띠와 같이 우리나라를 둘러싼 요새였습니다. 중간에 거란에 빼앗겨, 사람들은 분노했고 신(神)조차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거란과 금나라가 다투어 보주성의 향방이 어찌 될까 걱정했는데, 하늘이 금나라로 하여금 이 땅을 우리에게 헌납하도록 길을 열었고, 거란이 성을 버리고 도망했으니 이는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곳의 우물과 연못이 우리 땅이 되어, 세금을 매기고 농사를 지어 우리의 영토를 넓히게 되었습니다(〈고려사〉 14권).” 무려 100년 만에 돌아온 영토에 고려 신하들은 이렇게 환호했다.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없는 것”이라는 미사여구에는 되레 우리가 그걸 해냈다는 자부심이 흘러넘치고 있지 않니.

고려는 이 자부심을 자만심으로 오염시키지는 않았단다. 거란을 멸망시키고 중국의 화북 지역까지 장악한 금나라가 고려더러 신하 노릇을 하라고 요구해왔을 때, “우리를 어버이로 섬기던 것들이!” 하며 발끈하기도 했지만, 결국 “정치를 잘 하고 군사가 강하여 날로 강대해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금나라를 상국으로 인정하니까 말이야. 금나라도 보주성에 대한 시비를 걸어왔지. 영토는 인정하겠는데 거기 살던 백성들을 송환하라는 거였어. 고려는 “속국이 지켜야 할 예의를 온 나라가 기꺼이 정성을 다해 지킬 것이며 자손에게 전할 것을 맹세합니다”라고 ‘립서비스’를 하면서 이런 거짓말을 한다. “세월도 흘렀고 풍토병도 들어서 다 죽었사와요.” 인구가 국력이던 시대, 기껏 점령한 보주성의 인적자원을 금나라에 돌려줄 이유가 없었던 거지. 금나라가 마지못해 이 거짓말을 수용하면서 보주는 완벽한 고려 영토로 굳어지게 돼. 1130년의 일이지. 무려 120여 년, 두 갑자에 걸친 끈질긴 노력과 담판, 협상과 줄다리기의 대가였단다.

거란과 전면전을 벌일 정도로 ‘깡다구’가 있었고 거란의 숙적인 송나라와도 ‘쿵짝’을 맞추며, 여진의 성장과 거란의 몰락이라는 커다란 굿판에서 떡을 챙길 줄 알았던 고려. 그 후 오랫동안 그들의 외교적 DNA는 잊혔던 것 같아. 하지만 잃어버린 것은 아닐 거야. 이 격동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속에서 슬기롭게 발휘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고려인의 후손이니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