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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라데이지호, 우루과이를 울리다

<시사IN>의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이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 대표와 함께 우루과이·브라질을 다녀왔다. 지난해 67일간 4개국에서 이 사고를 취재했는데, 7개월 만에 다시 찾은 것이다. 우루과이 정부를 상대로 한 정보공개 청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우루과이·브라질 김영미 국제문제 전문 편집위원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5월 02일 수요일 제5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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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시간 비행하는 동안 허영주씨(40)는 말이 없었다.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가족대책위원회 공동대표인 그녀가 지금 향하는 곳은 남미의 땅끝 나라 우루과이다. 나는 지난해 9월부터 11월까지 67일간 우루과이·아르헨티나·브라질·프랑스 등을 찾아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를 취재했다. 지난해 12월 <시사IN> 제536호에 ‘스텔라데이지호를 찾아서’라는 커버스토리를 썼다. 내게 이 취재를 부탁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허영주씨와 그 여동생 허경주씨였다.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가족대책위원회 공동대표인 자매는 “우리는 선사와 정부한테 정보를 듣고 있다. 그들을 믿을 수 없다. 우루과이 현지 정보를 직접 듣고 싶다”라고 부탁했다. 자매의 부탁과 한국 언론사 어느 한 곳도 사건 현장을 취재하지 않았다는 부끄러움이 나를 우루과이로 이끌었다. 그리고 7개월 만에 다시 우루과이를 찾은 것이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시사IN 김영미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 대표 허영주씨(맨 왼쪽)는 브라질 해군본부 앞에서 아이들에게 희망 팔찌를 나주어주었다.

허씨는 비행기 안에서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남미 대륙이 가까워지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창밖으로 남대서양 바다를 바라보았다.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에게 남대서양은 잊을 수 없는 바다이다. 지난해 3월31일 그녀의 동생 허재용씨(2등 항해사)가 탄 스텔라데이지호가 이곳에서 침몰했다. 

스텔라데이지호는 2017년 3월26일 한국인 8명, 필리핀인 16명 등 24명과 철광석 26만t을 싣고 브라질 구아이바 항을 출발했다. 중국 칭다오로 향하던 스텔라데이지호는 출발 5일째인 3월31일 우루과이에서 3000㎞ 떨어진 남대서양에서 침몰했다. 허재용씨를 비롯한 한국인 8명과 필리핀인 14명이 실종되었다. 배가 침몰하지 않았다면 동생 재용씨는 5월6일 칭다오에 도착해 한국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항해 뒤 늘 그렇듯, 동생은 누나가 차려준 밥을 먹으며 바다 이야기로 꽃을 피웠을 것이다. 서른세 살 재용씨는 돌아오지 못했다.

지난 1년 동안 허영주씨를 포함한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은 거리에 있었다. 먼바다에서 실종된 아들을, 그리고 동생을 찾기 위한 재수색을 요구했다. 가족들은 침몰 원인을 밝혀줄 블랙박스 수거도 주장했다. 제2의 스텔라데이지호 사고를 막기 위해서다. 현재 한국에는 스텔라데이지호처럼 유조선을 개조한 노후 선박 27척이 운항 중이다.

스텔라데이지호는 여러모로 운이 좋지 않았다. 침몰 당시 한국은 탄핵 정국이었다. 대통령이 탄핵된 뒤, 정부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벚꽃 대선’을 앞두고 언론과 국민들 관심도 선거에 쏠렸다. 침몰 사고 구조 책임국이었던 우루과이는 구조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사고 현장으로 유일하게 군함을 보냈던 브라질 정치 상황도 우리와 비슷했다. 지난해 5월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탄핵 심판이 시작되면서 직무가 정지되었다(지난해 8월31일 연방 상원 표결로 탄핵이 확정되었다). 실종된 선원들에 대한 수색은 지난해 5월10일 끝나버렸다. 지구 반대편에 있던 한국의 실종자 가족들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아들이, 동생이 살아 있을 것 같은 그 먼바다 남대서양을 허영주씨가 보고 있었다.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허씨는 긴 비행시간을 견뎠는지도 모른다.

미군 초계기가 촬영한 ‘문제의 사진’은…

허재용씨는 딸부잣집의 남동생이자 막내였다. 법과대를 졸업하고 로스쿨을 준비하다, 친한 선배 권유로 항해사로 진로를 바꾸었다. 원래 외국 여행을 좋아하고 영어를 잘했기에 가족들도 그의 결정을 이해했다. “재용이는 실종된 것입니다. 가족들은 아직 내 동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지 못했어요.” 허영주씨의 우루과이행은 동생의 실종 원인을 밝혀줄 단서를 확인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시사IN 신선영
3월31일 2등 항해사 허재용씨의 어머니 이영문씨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문화제 ‘1년의 기다림’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가족대책위원회 제공
지난 2월 브라질 인근 해역에서 인도 선박이 발견한 구명정.

지난해 나는 우루과이에 오래 머무르며 취재했다. 스텔라데이지호 구조작전 책임을 우루과이 해안구조센터(MRCC)가 맡았기 때문이다. 취재 당시 우루과이 정부를 상대로 ‘스텔라데이지호 구조작전에 대한 모든 정보와 미군 초계기 사진 공개’라는 제목으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이 중에서도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과 내가 특히 관심을 둔 것은 미군 초계기가 스텔라데이지호 구조작전 중 촬영했다는 구명벌(life raft) 추정 사진을 공개할 것인지였다.

스텔라데이지호에는 30인승 구명정(동력이 있는 보트) 2척과 16인승 구명벌(동력이 없는 보트) 4척과 6인승 구명벌 1척 등이 있었다. 구명정은 동력이 있어서 탈출한 선원들이 운항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구명벌은 구명뗏목이라고도 불리며 동력 자체가 없다. 해류에 떠다닐 수밖에 없다.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다음 날인 4월1일, 그리스 선박인 엘피다호는 사고 인근에서 구명벌 한 척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필리핀 선원 두 명이 타고 있었다. 수색에 나선 브라질 해군 또한 아무도 타지 않았던 구명벌 2척을 수거했지만 16인승 1척과 6인승 1척 등 나머지 2척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미국은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 일주일 뒤인 4월8일 최신예 대잠 초계기인 보잉 P-8 포세이돈을 사고 현장에 보내 수색을 지원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수상한 물체가 사진에 찍혔다. 당시 MRCC 상황 보고서에는 “미군 초계기가 구명벌을 발견했다”라고 적혀 있다. 한국 외교부는 ‘4월9일 우루과이 MRCC로부터 미 P-8 촬영 사진 확보 예정’이라는 문건을 실종자 가족들에게 전달했다. 허영주씨는 “(지난해) 그날 밤 한숨도 못 자고 내 동생이 그 구명벌 안에 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몰라요. 그날만 생각하면…”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4월9일, 미군은 우루과이 MRCC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처음 구명벌로 생각했는데, 착륙 뒤 살펴보니 기름띠일 수도 있다. 구명벌로 확정할 수 없으니 정밀 분석이 필요하다.”

현재 그 사진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진을 입수해 가족들에게 제공하겠다던 한국 외교부는 미국에 요청했지만 사진을 받지 못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한국 외교부가 미국한테 받은 답신에도 사진 자체는 없었고 기름띠였다는 분석 결과만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기름띠라도 그 사진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실종 선원들이나 혹은 구명벌이 사진에 찍히지 않았다는 것만 확인하면, 수색 재개 요구 등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실종자 가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게 사진의 존재는 묻혀버렸다.

나는 지난해 현지 취재 당시 우루과이 MRCC 오캄포 대위를 만나 그 사진에 대해 집중적으로 물었다. 오캄포 대위는 “사진은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 사진은 대외비(confidential)로 알고 있다. 우리에게 묻지 말고 미군에게 물어봐라”고 덧붙였다. 더 이상 미군 초계기 사진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나는 우루과이 정부를 상대로 정보공개를 요청한 것이다.

1973~1985년 우루과이는 군사독재 정권을 거치며 실종자가 많았다. 그동안 시민단체 중심으로 실종자 찾기가 활발했고, 2008년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도 제정되었다. 지난해 취재하는 과정에서 만났던 우루과이 국회의원이나 변호사,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내게 정보공개를 요청하라고 제안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허영주씨가 우루과이를 방문한 가장 큰 목적도, 그때 내가 청구해놓은 정보공개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 대부분은 60~70대이다. 이렇게 나이 든 노인들을 대표해 허씨가 우루과이를 찾았다. 그들에게 내 정보공개 청구 결과는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가족들은 내게 우루과이로 함께 가서 정보공개 청구 결과를 확인하자고 했다. 내가 정보공개를 청구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이번에도 실종자 가족들의 요청으로 우루과이에 갔다.

4월8일(현지 시각) 일요일, 세 번이나 비행기를 갈아탄 뒤 실종자 가족을 대표한 허영주씨가 드디어 우루과이 땅을 밟았다. 공항에 내릴 때 영주씨 표정은 긴장돼 있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공항을 빠져 나오고서야 비로소 우루과이에 온 것을 실감한 듯했다. 우리는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 항구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숙소에 도착한 영주씨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스텔라데이지호의 구명벌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팔찌와 리본이 그려진 스티커였다.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이 서울 광화문광장 한쪽에서 실종자들을 기다리며 만든 팔찌와 리본이었다. “이거라도 만들고 있어야 우리 아들에게 뭔가 해준다는 생각이 들어”라고 말하며 눈물만 흘리던 박성백 1등 항해사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가족들의 눈물과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는 그 리본과 팔찌를 영주씨는 가져온 것이다. “이걸 왜 들고 왔느냐”라고 묻자 그녀는 “우루과이 시민들에게 단 한 사람이라도 이 사고를 알려서 스텔라데이지호가 잊히지 않게 하려고요”라고 말했다.

허영주씨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큰딸로 공부를 잘해 서울대 입학도 가능했다. 동생들을 생각해 4년 장학금을 받고 지방의 국립대학을 택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그녀는 동생들을 뒷바라지했다. 동생들에게는 환경에 구애받지 말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라고 했다. 동생 경주씨는 언니의 지원으로 서울대에 입학했다. 막냇동생까지 항해사가 되면서 이제 좀 살 만해졌다고 여겼는데, 지난해 3월31일부터 삶이 달라졌다. 허영주씨는 “나는 이제 눈물도 말랐어요. 엄마는 아직도 펑펑 우는데 나는 눈물도 안 나와서 그게 더 힘들어요”라고 말했다. 그동안 옆에서 지켜본 영주씨는 뭐든 똑 부러지게 일처리가 뛰어났다. 실종자 가족들이 허씨 자매를 공동대표로 세운 이유였다. 그녀는 생전 써볼 일 없던 보도자료도 뚝딱뚝딱 잘 썼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 때는 출산을 앞둔 만삭의 동생 경주씨와 둘이서 국회의원을 만나러 다니기도 했다.

우루과이의 인권 변호사가 보여준 연대의 손짓

그런 준비성이 이번에도 발휘되었다. 여행 가방에서 오렌지색 리본을 정리한 뒤 뭔가를 또 꺼냈다. 한국에서 만들어온 포스터였다. 현지인에게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를 알리려고 스페인어로 된 4종류의 포스터를 직접 만들어올 정도로 그녀는 꼼꼼했다.

4월9일 나는 영주씨와 발레리아 에스파냐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발레리아 씨는 우루과이에서 손에 꼽히는 인권 변호사이다. 지난해 내가 취재 왔을 때 발레리아 변호사는 시민들과 스텔라데이지호 가족을 응원하는 캠페인을 열고 그 사진을 영주씨에게 보내기도 했다. 영주씨는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변호사를 통해 내가 청구한 정보공개 결과도 알고 싶어 했다.

ⓒ시사IN 김영미
발레리아 변호사가 ‘스텔라데이지호 구조작전 정보공개를 해주세요’라는 문구를 들고 있다.
ⓒ시사IN 김영미
추가로 우루과이 정부에 정보공개를 요청한 서류.

2008년 우루과이는 정보공개법을 제정했다. 특히 2010년 3월 좌익 게릴라 출신으로 집권한 호세 무히카 대통령은 정보공개법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지난 군사정권 시절 실종자 문제와 인권 탄압 진상 규명을 위해서다. 법률에 따르면 모든 공공기관은 시민이 요청하면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법률에 “정보공개에 대한 접근권은 신청인의 국적이나 나이 등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의 권리이며, 정보공개를 요청하는 특별한 사유 없이 행사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나처럼 외국인도 청구할 자격이 있다. 청구인이 서면이나 인터넷을 통해 신청하면 20일 이내에 답변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했다. 지난해 내가 정보공개를 요청할 때 발레리아 변호사가 도와주었다. 내게 통보가 없었다면 변호사인 그녀에게 따로 답신이 갔을 수도 있었다.

발레리아 변호사 사무실은 시내 중심가에 있었다. 영주씨를 맞은 발레리아 변호사가 반가워했다. 그녀가 보여준 연대의 손짓과 영주씨의 고마워하는 마음이 서로 포개졌다. 둘은 처음 만났고 언어도 달랐지만 오랫동안 알았던 사이처럼 서로 반가워했다. 영주씨는 가장 먼저 정보공개 청구 결과를 물었다. 하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발레리아 변호사도 정부로부터 그 어떤 답변도 받지 못했다. 그녀는 “법률에 정보공개 예외 조항이 있는데, 예를 들면 국방이나 국가 안보와 관련한 정보는 정부가 공개하지 않아도 된다. 스텔라데이지호 정보에 국가 안보 정보가 포함되었다면 공개를 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예외 조항에 해당되는 정보가 있는지 추가로 정보공개를 요청하는 게 나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허영주씨는 한국에서 출발할 때부터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한 듯했다.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안고 떠나왔던 터라 실망감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 표정을 보고 발레리아 변호사도 안타까워했다. 그녀는 재빨리 제안을 했다. 이번에는 자신이 청구인이 되어 직접 다시 한번 정보공개를 요청하겠다고 했다. 또 실종자 가족들이 우루과이 언론에 나가 정보공개 요청을 호소하는 방법도 고려해보라고 제안했다.

여러 우루과이 언론이 김영미 <시사IN> 편집위원과 허영주씨의 활동을 취재하고 보도했다.

발레리아 변호사와 만남을 끝내고 나온 영주씨는 “생각보다 쉽지 않나 봐요. 여기까지 오면 뭔가 알려줄 걸로 알았는데”라고 말했다. 영주씨가 실망한 표정을 보니, 앞으로 일주일, 이 짧은 시간에 내가 뭘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도 들었다. 빈손으로 돌아간다면 우루과이에 안 오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에스펙타도르(ESPECTADOR)’라는 라디오 방송사에서 연락이 왔다. 우루과이 시민들은 우리와 달리 모바일보다 라디오나 신문, 텔레비전으로 뉴스를 접한다. 에스펙타도르는 시민들이 많이 듣는 라디오 채널이다. 방송사는 우리에게 생방송 출연을 제안했다. 모니카라는 유명한 라디오 진행자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를 우루과이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영주씨는 단박에 출연하겠다고 답했다. 나는 걱정이 앞섰다. 언어 문제였다. 허영주씨는 한국어를 쓰고 진행자인 모니카 씨는 스페인어밖에 모른다. 우루과이에서 한국어를 쓰는 한국인이 방송에 출연하는 경우가 드물다. 고심한 끝에 영주씨가 한국어로 말하면 내가 영어로, 다시 영어를 하는 스페인 통역사가 통역하기로 했다. 사전 녹음을 해서 충분히 통역을 거친 뒤 편집해 방송하기로 했다.

4월10일 아침부터 일찍 움직여 에스펙타도르 방송국을 찾아갔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 시절부터 국민들에게는 저항의 상징이라고 여겨지는 방송국이었다. 우루과이 전역에 나가는 라디오 방송이라 인근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들도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작업을 한다고 한다. 진행자 모니카 씨는 “농장 건초 더미 위에서도 내 프로그램을 들으며 일한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긴 머리카락의 모니카 씨는 말솜씨도 뛰어났다. 방송 녹음 시작 전에 그녀는 영주씨와 만나 거의 한 시간을 대화했다. 모니카 씨는 서울에 있는 다른 가족들의 상황을 궁금해했다. 그녀는 “실종자들을 기다리는 가족들의 애타는 마음이 우루과이 사람들에게 잘 전달되어야 할 거 같다”라고 말했다. 드디어 녹음 시작. 모니카 씨는 “오늘은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에 대한 특별 기획이다”라며 입을 뗐다.

이어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옆에서 지켜보니 모니카 씨는 명성대로 능숙한 진행자였다. 영주씨와는 초면인 데다 언어도 달랐지만 인터뷰는 잘 진행되었다. 영주씨는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가족대책위원회 대표로 살았던 지난 1년, 한국에서 영주씨는 누구에게도 자기 고통을 털어놓을 여유가 없었다. 정부 관계자를 만나면 재수색을 해달라, 블랙박스를 수거해달라 호소했고, 노트북을 들고 뛰어다니며 국회의원 100여 명을 만나 설득하는 강한 모습만 보였다. 냉정하게 따지며 말하는 영주씨를 두고 한국에선 “너무 세다” “정말 실종자 가족이 맞느냐”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렇게 마음고생을 했던 영주씨가 생전 처음 보는 모니카 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다. 나는 한편으로 안심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그동안 가슴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고통을 털어놓는 것. 최고의 치유로 보였다. 그녀를 지난 1년간 지켜보며 처음 본 모습이었고 그만큼 내겐 인상적이었다. 방송 말미에 영주씨는 “우루과이 정부가 빨리 정보공개를 해서 실종자 가족들의 고통을 끝내주길 바랍니다”라고 호소했다.

이 방송이 나간 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외국인이 ‘우루과이판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와 가슴 절절하게 말한 내용이 우루과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듯했다. 이어 우루과이에 있는 라디오, 신문 등 여러 매체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나는 취재하러 왔다가 영주씨 ‘매니저’가 되었다. 짧은 방문 기간이라 요청하는 모든 인터뷰에 다 응할 수 없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 10여 군데만 인터뷰하기로 했다.

국적도, 언어도 달랐지만 공감의 힘은 컸다

그날 오후 허영주씨는 몬테비데오의 광화문광장이라 할 수 있는 ‘독립광장’에서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찾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광장에는 우루과이 독립전쟁의 영웅인 호세 헤르바시오 아르티가스 장군 동상이 있다. 우루과이 사람뿐 아니라 관광객도 많이 찾는 곳이다. 광장 남쪽에 대통령 집무실이 있다. 영주씨는 이 광장에 한국에서 준비해간, 스페인어로 된 포스터를 붙였다. 포스터에는 “스텔라데이지호 구명벌이나 보트를 보신 분은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에게 알려주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이메일이 적혀 있었다. 영주씨는 또 스텔라데이지호를 상징하는 오렌지색 희망 팔찌를 시민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하던 일을 우루과이에서도 익숙하게 했다. 영주씨는 시민들을 붙들고 “스텔라데이지호 가족입니다. 우리는 가족들을 찾고 싶습니다. 우루과이 정부가 구조작전 정보를 공개하게 도와주세요”라고 말했다. 햇살은 따가웠다. 영주씨는 그 땡볕을 받으며 한 명에게라도 더 희망 팔찌를 나눠주기 위해 뛰어다녔다. 희망 팔찌를 몇 개 더 나눠준다고 스텔라데이지호 사고가 당장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시사IN 김영미
허영주씨가 몬테비데오의 ‘독립광장’에서 우루과이 정부에 정보공개를 요구하는 캠페인을 했다.

영주씨의 정성이 우루과이 사람들에게도 통했나 보다. 처음에는 눈길도 주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포스터 내용도 물어보고 우루과이 정부가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이 요구하는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려 하느냐고 묻기도 했다. 광장을 지나던 시민 리카르도 씨는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를 신문에서 본 기억이 있다. 저분이 실종 선원의 가족이냐”라고 내게 물었다. 나는 “저분은 2등 항해사의 친누나다. 한국에서 40여 시간이나 걸려 이곳으로 왔다”라고 말한 뒤 정보공개 청구 상황 등을 설명해주었다. 리카르도 씨는 “군사정권 시절 내 아버지도 어디론가 끌려가 실종 상태이다. 어디 묻혔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저분도 나와 비슷한 마음일 것 같다. 꼭 동생을 찾았으면 좋겠다”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날 독립광장 캠페인은 성공적이었다. 캠페인을 마치고 영주씨는 “우리나라에서 정말 먼 곳인데 이 나라 사람들은 나를 격려해주고 안아주었어요. 이렇게 공감해주는 것이 너무 감격스러워요”라고 말했다. 국적도, 언어도 달랐지만 공감의 힘은 컸다. 그녀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캠페인을 시작하고 나서 더 많은 우루과이 매체가 관심을 보였다. 결국 우리 스스로 정한 10군데 매체하고만 인터뷰하겠다는 기준을 깨야 했다. 하루에 대여섯 개 인터뷰를 강행했다. 그 힘든 일정을 영주씨는 모두 소화했다. 우리는 우루과이 유명 매체인 <라 파블리카>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이곳은 자체 규정상 생방송으로만 진행해야 했다. 한국어-영어-스페인어 동시통역을 했다. 영주씨는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는 가족들의 상황을 주로 설명했다. 이 방송을 진행한 페페 씨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힘들었을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의 이야기에 가슴 아프다. 우루과이와 한국, 양국 정부가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면 양국의 시민들이 나서서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을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페페 씨는 방송에서 스텔라데이지호 희망 팔찌를 설명하고 독립광장의 캠페인도 자세히 소개해주었다. 페페 씨 덕분에 허영주씨의 독립광장 캠페인을 시민들이 더 많이 알아보기 시작했다. 일부러 먼저 다가와 희망 팔찌를 가리키며 받아가는 시민도 있었다. 시청에서 근무한다는 에스파냐 씨는 “실종된 가족을 둔 사람의 마음을 우루과이 시민이라면 다 이해한다. 군사정권 시절 우리도 실종 사건을 많이 겪었다.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이 힘을 내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허영주씨는 우루과이 텔레비전 ‘채널 4’ 메인 뉴스와 ‘채널 5’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특히 채널 5의 페르난도 기자는 우루과이에서도 신뢰받는 방송 진행자이다. 그는 영주씨에게 한국 정부가 침몰 당시 어떤 일을 했는지 물었다. 그 질문을 받자 영주씨는 “우리는 당시 한국 정부를 신뢰할 수 없었어요. 지금 정부와는 다른 정부였거든요”라고 대답하면서(당시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였다) 표정이 어두워졌다. 실종자 가족들이 정부를 믿지 못한 계기가 있다. 희망에서 좌절로 바꿔놓은, 바로 그 미국 초계기 사진 사건이었다. 그때 그 사진만 보여주었어도 이렇게까지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이 정부를 불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페르난도 기자는 “어서 우루과이 정부가 정보공개를 해서 가족들의 아픔이 줄어들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시사IN 김영미
허영주씨가 우루과이의 국영방송 ‘채널 5’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 페르난도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나는 연일 이어지는 방송과 캠페인에 녹초가 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영주씨는 지치지 않았다. 발레리아 변호사를 다시 만나 추가 정보공개 청구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발레리아 변호사는 흔쾌히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녀는 대행료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 4월11일 발레리아 변호사는 정보공개를 요청한 뒤 그 서류를 영주씨에게 보여주었다. 영주씨는 “이번에 우루과이 국방부의 스텔라데이지호 구조작전 정보가 공개되고, 미군 초계기가 찍은 사진과 그 사진에 구명벌이 있었는지, 구명벌 안에 생존 선원이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이렇게 나흘 동안 이어진 우루과이 방문은 끝났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허영주씨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우루과이에서 한국으로 가려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독일로 가는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다. 독일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여정이었다. 영주씨는 독일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경유 시간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공항 밖으로 나가길 원했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9시간 동안 브라질 해군과 해안구조대를 방문하자고 했다. 브라질 해군은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당시 구조 작전에 참여했다. 지난해 취재 때 나는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브라질 해군본부를 방문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 2월 브라질 인근 해역에서 인도 선박이 구명정을 발견한 사건도 있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이것이 혹시 스텔라데이지호 구명벌이 아닌지 가슴을 졸였다. 브라질 해안구조대 확인 결과, 2016년 12월 화재로 조난당했던 안타이오스호의 구명정이었다. 나는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브라질 해안구조대와 여러 차례 연락을 주고받았다. 비록 스텔라데이지호와 관련이 없는 구명정으로 밝혀졌지만 허영주씨는 브라질 해군과 해안구조대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그녀는 “브라질 해역에서 아직 찾지 못한 구명벌이 발견될 수도 있어요. 미리 브라질 해군을 만나서 부탁을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녀의 뜻은 충분히 이해가 됐지만 리우데자네이루의 불안한 치안이 마음에 걸렸다. 이에 지난해 취재 때 호흡을 맞췄던 브라질 프리랜서 기자 레오 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흔쾌히 요청에 응하며 택시까지 섭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4월13일 우루과이를 떠나 브라질에 도착했다. 레오 씨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택시 뒷좌석 가운데 영주씨가 앉고, 나와 통역이 양쪽에 앉아 그녀를 보호했다. 브라질 해군본부와 해안구조대는 한 건물에 있었다. 미리 브라질 해군본부 방문이 가능한지 물었고 브라질 해군본부는 방문을 허락했다. 하지만 영주씨가 브라질 해군본부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방문 불가를 통보해왔다. 해안구조대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직접 전화를 걸어서 물었다. 해안구조대 벤슨 소령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허영주의 방문을 허락할 수 없어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어렵게 시간을 쪼개 여기까지 왔는데 방문이 불허되자, 영주씨는 “여기까지 와서 아무도 못 만나고 가려니 너무 실망스럽다. 나는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라고 말을 잇지 못했다. 레오 씨는 “브라질 해군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아마도 스텔라데이지호 가족의 방문을 원치 않는 외부 요청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누나는 광화문광장에서 동생을 기다리고 있다

ⓒ시사IN 김영미
허영주씨는 브라질 해군 병사들에게 희망 팔찌를 나눠주며 구명벌을 발견하면 연락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방문 목적이 사라졌으니 공항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허영주씨는 그게 아니었다. 다시 가방에서 희망 팔찌와 포스터를 꺼냈다. 이번 포스터는 포르투갈어 버전이었다. 한국에서 올 때부터 브라질에서도 캠페인을 하려고 미리 준비해온 것이다. 영주씨는 브라질 해군본부와 해안구조대를 방문하면 이 포스터를 붙여달라고 요청할 계획이었다. 그녀는 그 포스터를 해군본부 앞 길거리 바닥에 붙이고 시민들에게 희망 팔찌를 나눠주었다. “이것이라도 하고 공항으로 돌아가야겠어요. 여기 해군 병사들 중 누구든 우리 스텔라데이지호 구명벌을 나중에 만날 수도 있잖아요.” 해지기 전까지 남은 시간에 영주씨는 브라질 시민들에게 스텔라데이지호 사건을 알리려고 뛰어다녔다. 금요일 오후라 일을 마친 브라질 해군들이 밖으로 외출을 많이 나왔다. 그들을 붙들고 영주씨는 “혹시라도 바다에 작전하러 나가서 구명벌을 보면 우리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에게 꼭 알려주세요”라고 호소했다. 병사들은 그녀가 나눠주는 희망 팔찌를 받고 “힘내라”는 말을 했다.

이 광경을 보던 레오 씨는 “너무 가슴 아프다. 멀리서 왔는데 가족들의 아픔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우리가 이 가족들을 위해 뭘 할 수 있을까”라고 내게 묻기도 했다. 지난해 나와 동행했던 그는 브라질의 한 주간지에 스텔라데이지호 사고 기사를 쓰기도 했다. 레오 씨는 “나는 이번 허영주의 방문을 기록하고 브라질 사람들에게 다시 알리겠다. 그리고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들을 잊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영주씨는 브라질 해군본부 앞에서 레오 씨와 인터뷰를 마치고 공항으로 돌아갔다. 공항으로 돌아가기 직전 해군본부 앞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마지막 포스터를 붙이던 영주씨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4월15일 우루과이와 브라질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허영주씨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서울 광화문광장으로 향했다. 오늘도 그녀는 광화문광장에서 서명을 받으며 동생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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