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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려인이다 어찌 두 마음을 먹겠는가”

1차 거란 침입 당시 서희의 담판은 유명하지만 2차 거란 침입 때의 상황은 1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공진은 그 위기일발의 순간에 홀연 나타나 몸을 내던졌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4월 25일 수요일 제5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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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년 고려 목종 12년, 고려에서는 엄청난 분란이 일어난단다.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와 내통한 김치양이라는 자가 역모를 꾸며 목종을 내쫓고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했지. 목종은 이를 진압하고자 서경(평양)에 나가 있던 강조 장군을 불러들이는데 강조 역시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어. 시원찮은 목종을 끌어내리고 임금의 숙부뻘 되는 사람으로, 오랫동안 감금 상태에 있던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리기로 한 거야. 목종은 폐위된 뒤 피살되는데, 이 소식이 거란 성종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들어. 신하가 임금을 시해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용납이 안 되는 패륜 행위였으니까. 또 ‘정당하게’ 상대방을 공격할 수 있는 안성맞춤의 명분이기도 했고.

ⓒ진양하씨 사랑공파 대종회
2차 거란 침입 때 고려 현종을 지키고
거란 황제와 담판한 하공진의 영정.
거란의 연호를 쓰며 그 패권을 인정한다 해놓고 송나라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고려가 가뜩이나 신경 쓰였던 거란의 성종은 강조에게 죄를 묻겠다는 핑계로 고려를 침공했어. 거란과의 두 번째 전쟁이었지.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 할 강조가 직접 거란군과 맞부딪쳐 초전에 승리를 거둬. 하지만 거란의 반격에 휘말려 고려 주력군 태반이 섬멸되고 강조 자신도 목숨을 잃고 말았단다. 서경은 가까스로 버텨냈고 오늘날의 평안북도 일대인 강동 6주에도 고려군이 남아 있었지만 거란 성종은 그들을 버려두고 개경을 목표로 빠르게 남하해. 강조의 군대가 사라진 뒤 고려에는 이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어. 후일 귀주대첩의 영웅이 되는 강감찬이 강력하게 몽진(임금의 피난)을 주장했고 고려 왕 현종은 제대로 된 호위병도 없이 허겁지겁 피난길에 올랐어. 이때만 해도 중앙집권제가 확립되기 전이고 후삼국 시대의 기억이 많이 남아 있었던지라 지방에서 왕의 권위는 그리 높지 않았고 그 피난길은 그대로 고난 길이었지. 지방 아전이 왕 앞에 나가 “상감, 나를 알아보겠소?” 따위로 우습게 놀아도 현종은 그저 외면할 뿐이었고 심지어 일단의 무리들이 왕 일행을 공격하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처참했겠니.

공포와 슬픔에 사로잡혀 있던 현종에게 또 하나 놀라운 소식이 들려온다. 하공진이 쳐들어온다는 것이었지. 하공진이라는 사람은 강조의 부하 장수였는데 동북쪽 국경을 넘어 여진족 땅에 들어갔다가 패배한 뒤 그 분풀이로 조공하러 온 여진족 일행 95명을 몰살시키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러 귀양 갔던 사람이야. 이에 한을 품은 여진족들이 거란을 충동질했으니 사실상 전쟁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기도 해. 어쨌든 현종이 귀양 보낸 사람이므로 현종에게 감정이 좋을 리 없었고 그가 쳐들어온다는 것은 그나마 현종을 따르던 수행원들에게 공포의 바람을 불러일으키지. 측근 몇 명만 남고 전부 도망갈 정도로. 하공진은 반역할 의사가 전혀 없었어. 그는 임금에게 이렇게 말하지.

“거란이 본디 강조를 토벌한다는 걸 명분으로 삼았는데 이미 강조가 죽었습니다. 만약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한다면 그들이 반드시 군사를 돌이킬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인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임금의 곁을 지키던 고위 관료와 장군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판에 적진으로 가서 담판을 지어보겠다는 거였지.

하공진은 거란군 본영에 부하를 보내 자신이 찾아가겠다고 알렸으나 부하가 돌아오기도 전에 거란군 선봉대와 맞닥뜨린다. 하공진도 식은땀깨나 흘렸을 거야. 고려 임금은 그로부터 겨우 10㎞ 밖에 있었거든. 하공진은 애써 태연하게 말한다. “군대를 물려주시면 우리 임금도 항복할 것입니다.” 여기서 거란 장수는 이런 질문을 한다. “고려 임금은 지금 어디 있는가?” 하공진이 강남으로 몽진했다고 대답하자 거란 장수는 “거리가 여기서 얼마나 되느냐?”고 재우쳐 물어온다. 하공진은 거란군이 고려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다는 걸 간파한다. 개경까지는 질풍같이 달려왔으나 거란군은 고려 땅이 남쪽으로 어느 정도 펼쳐져 있는지 몰랐던 거야. 그는 능청스럽게 대답한다. “너무 멀어서 몇만 리인지 알 수 없소.” 이 간단한 거짓말에 거란이 속았을 것 같지는 않구나. 그만큼 하공진은 고려의 지리를 그럴듯하게 과장했을 것이고, 추격의 힘겨움을 설득했을 거야. “항복하겠다는데 왜 그 먼 길을 가려 하시오?”

거란 성종을 속인 하공진의 빈틈없는 처신

ⓒ이천시청 제공
1차 거란 침입 때 서희 장군(왼쪽)이 거란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벌이는 모습의 동상.

이렇게 갈 길이 멀다는 걸 강조한 이유는 또 있었어. 거란 등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전쟁을 결행하면 주로 남쪽 농경민족들의 추수철인 가을에 쳐들어왔다가 봄이 오기 전, 자신들의 영역으로 돌아갔지. 가을, 즉 북방민족의 말들에 살집이 올라 전쟁을 치르기 쉬운 때라고 해서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는 말이 나온 거란다.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해가 바뀌고 거란으로서는 초조해질 즈음이었어. 더욱이 강동 6주에 남은 고려군들이 거란군의 배후를 위협했으니 돌아갈 길도 걱정되었고 말이야. 하공진은 그 점을 찌르고 들어갔지. 거란의 성종을 만나서도 마찬가지였어. “군대를 물리면 입조(入朝:황제의 조정을 찾는다는 뜻, 즉 국왕의 직접 항복)하겠습니다.” 어쩌면 하공진은 먼 훗날 몽골의 침략을 받았을 때 몽골의 뭉케칸을 찾아간 김수강과 똑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짐승을 굴 안에 가두고 밖에서 화살을 재고 윽박지르면 짐승이 어찌 나오겠습니까?”

거란 성종은 철병을 결정하지만 하공진을 돌려보내지 않았어. 일종의 인질이었지. 그런데 거란의 성종은 하공진을 후하게 대접하며 자기 신하로 만들려고 했어. 어느 나라를 정복하려면 반드시 그 나라 출신의 앞잡이가 필요한 법이니까. 하공진은 거란에게 충성하는 척하면서 거란 황제의 신뢰를 얻어. 하공진은 탈출을 시도하다가 연경(오늘날의 베이징)으로 옮겨져. 성종은 거란 양갓집 규수와 하공진을 결혼까지 시켜준다. 성종은 이 정도면 탈출을 꿈꾸지 않으리라 여겼으나 하공진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어. 연경에서 고려에 이르는 길 곳곳에 좋은 말을 사서 은밀히 모아두었던 거지. 누군가 이걸 고해바치면서 하공진은 체포되지만 거란 성종은 하공진을 포기하지 않고 마음을 돌리면 살려주겠다고 꼬드겨. 이미 본색을 들킨 하공진은 단호했어. “나는 고려 사람이오. 감히 두 마음을 먹을 수는 없소(我是高麗人 不敢有二心).” 죽음을 각오한 하공진의 말이 거칠게 나오자 배신감에 사로잡힌 거란 성종은 그 심장과 간을 꺼내 씹었다고 할 만큼 잔인하게 죽여버린다. 하공진에 대한 분노가 컸던 거지. 역으로 하공진은 그만큼 거란의 황제를 감쪽같이 속이며 고려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고.

1차 거란 침입 당시 서희의 담판은 유명하지만 2차 거란 침입 때의 상황은 1차에 비할 때가 아니었어. 거란의 대군에 정면으로 맞설 중앙군은 소멸해버렸고 한 나라의 임금이 호위병 하나 없이 벌벌 떨며 피난 가는 암담한 국면에 처해 있었지. 그 위기일발의 순간에 홀연 나타나 몸을 내던져 거란의 허점을 찌르는 담판을 벌이고 인질로 잡혀 있으면서도 빈틈없는 처신으로 거란 성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하공진의 활동은 의외로 많이 알려져 있지 않구나. 고려 사람들은 오래도록 하공진을 기억했어. 고려 예종 때에는 배우가 연기를 하며 하공진의 사연을 전하는 ‘하공진 놀이’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구나.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나 아마 하공진의 최후 장면은 반드시 재연되었을 것 같아. 어떻게든 회유하려 드는 거란 성종에게 일갈하는 고려의 충신이자 유능한 외교관 하공진의 일갈. “나는 고려인이다. 어찌 감히 두 마음을 먹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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