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들을 제외하면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가장 유명해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재호 KBS 해설위원(42·사진)은 대한민국 컬링 대표팀의 모든 경기를 해설했다. ‘아, 약하다는데요’ ‘됐어요 됐어요!’ 하는 그의 추임새는 전 국민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아나운서와 주고받는 만담으로 ‘아재 콤비’라는 애칭을 얻었고, 전술 그래픽인 ‘컬링노트’는 온라인에서 ‘망상노트’라고 불렸다. 평창에서 그는 선수들 못지않게 사인 요청을 많이 받았다.

이재호 해설위원은 현재 서울특별시청 컬링팀 감독이다. 2007 창춘 동계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전직 선수이기도 하다. ‘스크린 컬링장’까지 생겨나는 이례적 컬링 붐을 맞아, 태릉선수촌에서 이 감독을 만났다.

ⓒ시사IN 신선영

컬링은 어떻게 시작했나?

우리 세대는 거의 비슷할 것이다. 한국에 컬링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995년이다. 나는 군 제대하고 1999년에야 시작했다. 대학 졸업이 다가와 교육대학원에 가서 체육 교사 시험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시에는 이 시험에 전국체전 메달 가산점이 있었다. 나보다 1년쯤 먼저 컬링을 시작한 대학 동기가 ‘야 너도 이거 한번 해볼래?’ 했던 기억이 나서 합류했다. 그 친구가 평창 동계패럴림픽 휠체어 컬링팀의 백종철 감독이다. 가산점을 노리고 컬링을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교사라는 꿈은 저만치 가버렸다. 2007 창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는데도 ‘군필자’로 남은 사연이다(웃음).

올림픽 전 경기 중계라는 강행군을 소화했다.

지금도 운동을 하고 있어서 체력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도 관리해본 적 없는 목이 문제였다. 여자 대표팀이 준결승을 확정지었을 때쯤 목이 완전히 쉬고 피가 나왔다. 병원에서는 뾰족한 처방이 없다고 해서 그날 하루 말을 안 했다. 방송국 PD, 아나운서와도 글로 써서 대화했다. 방송국에서는 임시 해설위원을 데려와 하루라도 쉬라고 권유했는데 내가 ‘그냥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욕심도 있었고 다른 사람이 (임시로) 하면 모양새도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다음 경기 큐 들어가기 직전까지 뜨거운 물을 계속 마셨다. 투혼으로 했다(웃음).

가장 인상 깊었던 경기는?

물론 한·일전(2월23일 여자 대표팀 준결승전)이다. 한국 팀의 마지막 투구 때는 몰입하다 보니 말이 아예 끊겼다. 어떻게든 말하려다 보니 몇 초 동안 횡설수설했다. 원래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경기 뒤에는 좀 많이 울었다. 이틀 뒤 스웨덴과의 결승전에서도 눈물이 났다. 후배, 제자뻘인 선수들이 너무도 대견했다. 사실 컬링이란 종목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이 별로 없다. 자국 관중은 분명 도움이 되지만, 타 종목과 달리 홈팀이라고 공인구나 빙판을 미리 체크해볼 수 없어서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매 경기 최선을 다한 선수들이 자랑스러웠다.

개막 전에는 한국 대표팀의 수준을 어느 정도로 평가했나?

남자팀은 5~6위를 예상했다. 여자팀은 4강에 갈 수 있다고 봤는데, 객관적 전력을 한 단계 뛰어넘었다. 사실 국민들 생각과 달리, 여자 대표팀의 은메달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쾌거’는 아니다. 올림픽 직전에 열린 ‘월드 컬링 투어’라는 세계 대회에서도 워낙 성적이 좋았다. 김은정 스킵이 기복을 조금만 줄이면 4강 이상도 갈 수 있겠다는 게 내 관측이었다. 예선 초반 몇 경기를 중계하다 보니 다행히 김 선수가 기복이 거의 없었다. 예전에는 실수가 나왔을 법한 상황을 쉽게 돌파하는 모습을 보고 메달권에 들 수 있겠다고 느꼈다.

전략 그래픽인 ‘컬링노트’가 인기를 끌었다.

사실 꽤나 획기적이었다고 자부한다. 엔지니어가 그래픽으로 받아 적은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조작했다. 정신없었다. 입으로는 해설하면서 한 손으로는 컬링노트 만들고, 흥분하면 일어나고. 많이들 오해하는 점이, 컬링노트는 ‘선수들이 무엇을 할 거다’라고 맞히는 게 아니다. ‘무엇을 해야 한다’에 가깝다. 선수들보다 내 실력이 뛰어나다는 게 아니라 지도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다. 장기도 옆에서 훈수 두는 사람이 잘 보는 것과 같다. 대표팀에서 1년간 전력분석관을 하며 특정 상황에서 어떤 전략이 적합한지 연구했다. 하지만 이상적인 전략과 상황에 따른 선수들의 선택이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런 오해에서 나온 말이 ‘망상노트’다(웃음).

현장에서도 인기를 느꼈나?

놀랄 정도였다. 믹스더블 종목부터 시작해서 점점 눈에 보일 정도로 열기가 뜨거워졌다. 나를 알아보는 분들도 덩달아 많아졌다. 해설이 끝나고 일어나려 하면 사인을 받으려고 줄 서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강릉 바닷가에 나가면 사람들이 인사하고, 함께 사진 촬영하는 게 신기했다. 그런 경험이 점점 늘어나면서 ‘정말 뭔가 달라졌구나’ 실감할 수 있었다. 하루 3경기씩 중계하는 날도 있어서 PD들이 ‘혹사시켜 미안하다’고 했는데, 오히려 나는 정말 즐기면서 했다. 올림픽 기간 단 하루도 지루하지 않았다. 패럴림픽도 경기장은 꽉 찼으나 올림픽만큼 열기가 크진 않았다. 휠체어 컬링 선수들 대부분이 (소속 팀인) 서울특별시청 출신이고, 백종철 감독은 내 대학 동기이다 보니 가슴속 깊이 응원하면서 방송했다. 경기가 끝난 직후에는 마인드컨트롤에 지장을 줄까 봐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다.

자녀에게 컬링을 시키려는 부모도 늘고 있다. 필요한 덕목이 있나?

신체적 제약은 거의 없다. 너무 뻣뻣해서 손끝이 땅에 닿지 않는 정도만 아니면 된다. 손이 크든 작든, 팔다리가 길든 짧든, 키가 크든 작든 별로 상관이 없다. 정신적으로는 지도자마다 선호하는 상이 좀 다르다. 얌전하고 단순하고 진득한 아이가 잘한다는 얘기를 많이들 한다. 그런데 내 기준은 정반대다. 활발하고 영리해야 한다. 곰같이 시키는 것만 계속하는 아이보다 1시간을 하더라도 여우처럼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아이들이 빨리 는다. 조용한 아이들은 배포가 작아서 심리적 압박에 약하다. 특히 스킵은 외향적인 성격이어야 팀을 아우를 수 있다. 온순한 아이들은 투구하면서 손발이 덜덜 떨린다.

컬링에 가장 필요한 지원은?

무조건 컬링장이다. 현재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는 컬링장은 의성과 의정부(3월29일 개장) 단 두 곳밖에 없다. 공간이 있으면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사람을 끌어 모으기 마련이다. 사람이 모이면 인재풀이 생긴다. 한국에서 전지훈련을 하거나 대회에 참가하는 해외 선수가 늘어날 수도 있다. 이들과 맞서는 경험이 국내 선수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일본이 이렇게 실력을 키웠다. 한국은 유럽·미주에 비해 훈련 비용이 저렴하고, 외국 선수들의 문화적 호기심도 큰 곳이기에 지금도 인기가 높다. 컬링 붐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지자체 지원이 절실하다. 올림픽의 열기가 인프라 확대라는 결실을 낳았으면 좋겠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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