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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를 33바퀴 헤엄쳐 돈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의 운명은 대한해협 파도만큼 거친 도전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수영복이 없어 사각팬티를 입고 물속에 뛰어들었던 그는 금메달을 거머쥐며 ‘아시아의 물개’가 되었다. 수영은 불가능을 향한 자신과의 승부였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4월 10일 화요일 제5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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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금메달 두 개를 따고 활짝 웃는 조오련.
올해는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해야. 아빠가 어렸을 때만 해도 아시안게임은 온 나라가 떠들썩한 이벤트였고 대회마다 ‘아시아의 ○○’라 불리는 스타들이 혜성과 같이 나타나 국민들을 열광시켰단다. 오늘 소개할 사람은 살짝 민망하면서도 그럴 수 없이 어울리는 칭호를 보유한 사람이야. 바로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조오련(趙五連)이라는 이름이 좀 특이하지 않니? 오련. 그 이름에는 사연이 있단다. 그는 5남5녀, 10남매의 막내였어. 아들 다섯을 채웠다고 다섯 오(五)에 이을 련(連)자 이름을 쓰게 된 거란다. 해남은 바닷가 고장이지만 그의 집은 바다와는 좀 멀어서 동네 냇가에서 수영을 배웠지. 체계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니 글자 그대로의 ‘자유형’이었겠지만, 물을 좋아하는 소년은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고 귀에 물이 들어가면 쑥으로 틀어막고” 온종일 자맥질 치며 놀았지.

우연히 수영 대회를 구경한 조오련은 홀연 ‘저건 내가 낫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해. 이 막연한 생각은 조오련의 운명이 된다. 다른 친구들은 고향을 떠나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가난한 집 막내 조오련은 갈 데가 없었던 거야. 시골을 벗어나 도시에 가고 싶었던 청소년의 선택은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바로 수영이었어. 그는 해남에서 다니던 고등학교를 걷어치우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1968년 겨울이었지.  
완전히 ‘무작정’은 아니었어. 서울에는 누나 조현숙씨가 있었거든. 그녀는 별안간 서울에 나타난 동생을 보고 기겁을 했고 당장 내려가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동생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 자기는 수영으로 성공할 거라며. 1960~1970년대 한국에는 독특하고도 구슬픈 풍속도가 있었지. 될 성부른, 또는 무척 귀하게 대접받던 아들의 미래를 위해 희생해야 했던 딸들의 이야기, 동생의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공장에서 코피를 흘리고, 동생 고시 뒷바라지하기 위해 가정부로 들어가는 누이들의 사연은 전국 어디에서나 흔했단다. 누나 조현숙씨도 “밤에는 학교를 다니면서 낮에는 껌과 양말 행상으로(<중앙일보> 1970년 12월16일)” 오련을 뒷바라지하게 됐어.

조오련은 수영부가 있던 오산고등학교를 노렸지만 특기생이 되는 데 실패했고 체육회 신인 발굴 프로젝트에 응시했다가 미역국을 먹었어. 전문가들은 그의 수영을 보고 “도무지 수영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혹평하기도 했다고 해. 제대로 배운 수영이 아니라 동네 개울에서 배운 개헤엄이 몸에 배었을 테니 그 엉성한 폼이 전문가들 눈에 들었을 리가 있겠니. 조오련은 포기하지 않았어. 간판 집에 취직해 일하면서 악착같이 YMCA 수영장에 등록해 물속을 헤치고 또 헤쳤다. 돈은 없고 등록 기간은 끝나자 회원권 위조까지 감행하다가 들켜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조오련이 어느 정도 독기를 품고 살았는지에 대한 일화 하나. 어딜 가나 텃세는 있기 마련. 서울깍쟁이들은 이 ‘촌놈’이 영 못마땅했던 모양이야. 툭하면 시비를 걸던 그들이 하루는 단단히 맘을 먹은 듯 떼로 몰려왔어. 몰매를 주려는 심산이었을까. 그때 조오련은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 후 일하던 간판 집에서 얼마간 돈을 빌려 당시 골목에 흔하던 뱀탕집으로 향했어. 잠시 뒤 기세등등하던 서울내기들은 산 뱀을 뜯어먹으며 성큼성큼 나오는 조오련 앞에서 기겁을 하고 달아나게 된다.  

마침내 그는 1969년 수영 대회에 출전할 기회를 잡아. 소속이 없었던 그에게 수영연맹은 대학·일반부 출전을 명령했는데 여기서 수영복이 없어 사각팬티를 입고 물속에 뛰어든 청소년이 400m와 1500m 자유형을 석권해버린 거야. 이 모습을 본 체육 명문 양정고등학교 수영부는 재빨리 조오련을 스카우트했어. 조오련은 양정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고향으로 내려갔단다. 그는 그날이 인생에서 가장 뿌듯한 순간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어.  

ⓒ독도참치 제공
2008년 7월 조오련은 ‘독도는 우리 땅’임을 알리기 위해 독도 33바퀴를 헤엄쳐 돌았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출전한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그는 ‘대형사고’를 친다. 나이 열여덟, 수영을 정식으로 시작한 지 1년 된 조오련이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금메달을 거머쥔 거야. 그런데 이 장한 고교생이 첫 금메달을 딴 순간은 전혀 역사에 남아 있지 않아. 설마 풋내기가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기자들이 아무도 경기장을 찾지 않았던 거야. 뜻밖의 소식에 기절초풍한 기자들이 떼를 지어 호텔로 몰려왔고 조오련은 때 아닌 수영복을 입고 호텔 복도에서 ‘영광의 순간’을 촬영해야 했어. ‘아시아의 물개’가 탄생한 순간이었지.  

그의 활약은 계속 이어졌어.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2개를 따 순위 다툼에서 북한을 제치는 결정적 수훈을 세우기도 했고,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까지 메달을 따냈지. 한국 신기록 50개를 갈아치운 기념비적인 선수였지만 입바른 말 잘하고 잔머리 굴리기는 하지 못했던 조오련은 수영계에서 그만한 대접을 받지 못했어. 일종의 왕따였다고나 할까. 선수 생활을 마친 뒤 그는 국가대표 트레이너나 코치 자리는 구경도 못해보고 수영계를 떠나야 했어. 하지만 결코 수영을 떠날 수는 없었단다.  

“물을 믿을 때 물은 나를 친구로 받아줍니다”

1980년 그는 ‘아시아의 물개’만이 할 수 있는 이벤트를 기획해.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가깝고도 먼 바다 대한해협을 횡단하는 거였지. 이 수영 이벤트를 성공하기 위해 그는 도보로 전국을 걷는 맹훈련과 함께 살을 찌우는 작업에 돌입한다. 온도와 파도 모두가 풀장과는 질적으로 다른 바다 수영은 극한의 체력을 필요로 했고, 장거리 수영의 가장 큰 적인 체온 조절을 위해서도 두툼한 ‘지방질’이 필요했으니까. 선수 시절과는 달리 배불뚝이가 된 조오련은 1980년 8월11일 캄캄한 밤 부산 다대포 방파제에서 바다에 뛰어들었고 13시간 16분 10초 만에 대마도 북서쪽 소자키 등대에 상륙했어.

이제 조오련에게 수영은 출세의 도구도, 영광의 도전도 아닌 불가능을 향한 자신과의 승부였어. 대한해협 횡단은 시작일 뿐, 조오련은 일생 내내 수영을 통해 도전하고 또 도전했단다. 현지 가이드가 체류 비용을 탈탈 털어 도망가는 불상사 속에서도 도버해협을 헤엄쳤고 울릉도와 독도 사이의 ‘뱃길 따라 이백 리’를 갈랐으며 강원도 화천에서 서울 여의도에 이르는 한강 수백 리를 따라 헤엄쳤단다. 그는 한 번 더 대한해협을 건너고자 했으나 후원이 여의치 않아 백방으로 길을 찾던 도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009년 8월이었지.   

스포츠는 누군가와 겨뤄 이기는 것이 목적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신과의 싸움이고,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의 제약을 극복하고자 하는 맨몸의 도전이라고 할 거야. 자연의 장벽을 넘어서고 인간의 한계를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지. 이만큼이면 됐다고 생각한 순간 또 다른 도전이 생겨나고 그 도전에 기꺼이 응하고 승부를 가르는 것, 그게 스포츠겠지. 그렇게 볼 때 조오련은 우리 역사에 손꼽을 만한 빛나는 스포츠맨이었다.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고, 하다가 안 되면 주저앉아도 봤지만 물만 보면 뛰어들었던 아시아의 물개. “시공간을 초월해서 무념무상으로 헤엄친다는 거요. 무아지경은 물과 친구가 될 때 가능하고 내가 물을 믿을 때 물은 나를 친구로 받아줍니다”라고 말하던, 수영 선수라기보다 수영을 통해 자연과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뤘던 위대한 스포츠의 별이 우리 곁에 머물렀다가 하늘로 올라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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