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포토언젠가 다시 읽게 되리라는 미련에 가까운 기대가 책 앞에서는 유독 길다.

모든 게 미세먼지 때문이었다. 볕은 좋았으나 외출은 꺼려지던 차에 이때다 싶어 미뤄두었던 집안일을 시작했다. 옷장에 잘 접어둔 겨울옷과 수납 상자 대신 캐리어에 넣어둔 봄여름 옷을 꺼내 정리했다. 담아둘 때는 몰랐으나 풀어놓고 보니 한 짐이었다. 차곡차곡 눌러 담은 마음과 와르르 풀어버리는 마음은 분명 다르리라. 겨우내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과 이쯤 입었으면 버려도 아깝지 않겠다 싶은 옷을 분리수거용 봉투에 담았다. 옷장 정리가 끝나자 이번에는 자연스레 신발장으로 손이 갔다. 정리하지 못했던 마음도 나름 간절했을 텐데 정리하자 마음먹으니 쓰레기봉투 속으로 잘도 들어갔다. 신발장 정리가 끝나자 다음에는 주방의 찬장으로, 화장실로 자연스레 정리의 동선이 이루어졌다. 시작할 때 흔쾌하던 기분은 오래지 않아 시들해졌다. 주말이었으므로, 쉬는 날 왜 사서 고생인가 싶었다. 틈틈이 쓸고 닦는데도 늘 청소하지 않은 집처럼 보이는 건 무슨 이유인지 모를 일이다 싶다가도, 이고 지고 사는 살림의 총량을 되돌아보게 되면 어째서인지 모든 게 이해되어버린다. 버리지 못하는 생활을 지속해서 지속하고 있다!

정리정돈의 마지막 종착지는 책장이었다. 정확하게는 수납공간이 없어서 방 이곳저곳과 베란다에 쌓아둔 책 무더기였다. 읽는 걸 좋아하고 가끔 쓰기도 하는 사람으로서 책을 정리하는 일만큼 큰 각오가 필요한 일도 없다. 수년 동안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으나 언젠가 다시 읽게 되리라는 미련에 가까운 기대가 책 앞에서는 유독 길다. ‘언젠가는’이라는 마음을 잘 정리하는 사람이 아마도 살림의 달인. 크고 작은 상자에 책을 눌러 넣었다. 오랫동안 모았던 영화 잡지와 글을 발표했던 패션지, 과월호 문예지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단행본이 상자에 담겼다.

책 상자 열 개를 묶고 들고 나르며 새삼 책의 무게에 관해 생각했다. 읽기 바쁘고 쓰기 바빠서 책의 무게를 좀처럼 실감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으므로. 들고 있을 때 알게 되는 책의 무게와 버리게 될 때 비로소 알게 되는 책의 무게는 얼마나 같고 다를까. 더는 내 삶과 무관하여 버리게 되는 책의 무게가 이러한데, 당분간은, 언젠가는 하고 버려지지 않는 책의 무게란 이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할 리는 없을 테다. 두 손이 무거워졌다. 겹겹이 쌓아놓은 책들 때문에 얼마쯤 휘어진 원목 책장의 선반이 그제야 눈에 띄었다. 쌓이는 무게와 휘어지는 무게. 독서라는 살림을 잘 꾸리는 사람이란 휘어지는 무게를 잘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자는 도중에 책장 선반이 무너지는 경천동지할 소릴 듣고 놀라 잠 깨는 사람의 의식은 한순간 얼마나 선연할까. 죽비에라도 맞은 듯이.

책장 사이에 끼워둔 그 계절의 산물

버리려고 놓아둔 물건 사이에서 엽서 두 장을 뒤늦게 발견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어디에다 뒀을까, 하고 찾게 될 것들이었다. 그때는 자주 사용했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것, 그때는 기념하려고 했으나 이제는 기념할 만한 게 남아 있지 않은 것에 깃든 마음에 어찌 실용적인 면만이 있으랴. 당장 쓸모없는 엽서 두 장을 다시 챙겨 들었다. 흔들렸다. 저 책이라면…. 애써 빈 수레를 끌고 집으로 들어섰다. 집안을 정리하는 일은 귀찮지만 거쳐야 할 감정의 노고가 생각보다 많은 일이다. 단출한 삶을 긍정하는 사람은 청결한 사람보다는 바지런한 사람에 가까울 테다.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인 탓에 이튿날 허리가 결렸다. 허리가 결리는 만큼의 양. 정리의 무게란 뭘까. 집안을 둘러보니 여전히 ‘언젠가는’이라는 물건이 그득하다. 그리고 떠올랐다. 버려버린 책의 책장 사이에 끼워둔 그 계절의 산물이.

기자명 김현 (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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