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을 보는 게 이리 두렵기는 처음이다. 영화를 제작할 때부터 세트장 파괴가 이루어졌고, 인도 4개 주 정부는 영화의 상영금지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이 영화 상영을 막은 4개 주의 금지 조치를 철회하자 극장이 불탔고 도로가 점령됐다. 지난 1월 말 개봉한 인도 영화 〈파드마바트〉 때문이다.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인도 남부로 이동해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영화 상영으로 소요 사태가 발생한 라자스탄·구자라트·하르야나· 마디아프라데시 주는 피해야 했다. 뭄바이가 있는 마하라슈트라도 극우세가 만만찮은 곳이라 피했다. 결국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곳은 인도의 맨 끝, 힌두교·기독교· 이슬람이 황금분할을 이루고 있는, 종교분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케랄라 주밖에 없었다.
혹시나 매표 대열 중에 극우 세력으로 보이는 이가 없는지 잔뜩 긴장한 채 영화를 봤다. 영화는 아름다웠다. 인도 영화 역사상 가장 많은 의상비가 들었다는 배우들 복식도 그리고 마살라 영화 특유의 군무도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의 상영을 두고 왜 소동이 일어났는지 외국인인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영화는 16세기 인도에서 발표된 서사시 ‘파드마바트’를 재구성했다. 14세기 이슬람을 숭배하는 힐지 왕조와 힌두를 믿는 메와르 왕조 간에 벌어진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힐지 왕(술탄)은 메와르 왕비 파드미니의 미모를 탐해 전쟁을 일으킨다. 힐지 왕조가 전쟁에서 승리하자 파드미니는 힐지 왕이 청혼을 했는데도 ‘사티(Sati)’를 감행한다. 사티는 남편이 죽으면 여성이 불속으로 뛰어드는 인도 악습이다. 1829년 영국 식민정부에 의해 사티 금지법이 발효된 이후 요즘은 어지간한 힌두교도들도 이구동성으로 비난한다.
사실 파드미니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파드마바트〉가 제작된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우려를 표한 곳은 인도 여성계였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은밀하게 사티가 이루어지고, 이를 찬양하는 힌두 민족주의자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고’는 전혀 엉뚱한 데서 터졌다. 극우 힌두교 단체 ‘쉬리 라지푸트 카르니 세나’가 영화의 한 장면을 문제 삼고 나섰다. 힐지 왕이 꿈속에서 파드미니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이 힌두교를 모독했다는 주장을 폈다. 파드미니의 이야기가 어차피 서사시의 한 장면이고, 꿈이라는 매개를 이용해 이야기를 끌고 갔음에도 ‘성녀 모독’이라고 분개한 것이다.
“여배우 코를 베거나 감독 목을 잘라오면 현상금 주겠다”
놀랍게도 이 주장에 사람들이 반응했다. 논쟁은 급기야 영화 제작자와 감독이 정숙한 힌두 여인을 모독했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인기를 끌려는 극우 정치인들은 주연 여배우의 코를 베어오거나 감독 목을 잘라오면 현상금을 주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사티’를 다룬 것이 ‘표현의 자유’라는 주장도 공공연하게 등장했다. 〈파드마바트〉의 상영은 인도에서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다. 심지어 힌두 근본주의에서 벗어나 세속주의 정당을 표방하는 제1야당 인도국민회의조차 당내 논쟁이 심각했다. 이런 현실은 지금 인도에서 힌두 근본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지경까지 치닫는지를 보여준다.
영화가 개봉된 뒤 논쟁은 빠르게 봉합되고 있다. 난리의 원인이었던 술탄의 꿈속 장면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가 일으킨 초대형 헛소동이었던 셈이다. 그 이후에도 사티가 표현의 자유로 보호되는 부조리는 제대로 지적되지 않고 있다. 아시아의 갈 길은 여전히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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