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교회 청년들과 내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이 당하는 차별과 혐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창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한 남자 청년이 불쑥 끼어들었다. “저도 그렇고, 제 주변 친구들도 그렇게(내가 말한 차별과 혐오의 사례) 하지 않는데 선생님이 너무 예민한 것 아닌가요?” 그러면서 내가 말한 내용 중 일부를 두고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며 ‘팩트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내 말은 못 믿겠다는 뜻이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게 없는 것이 되는 건 아니에요”라고 대답했지만, 그 청년의 불만을 해소해주지 못했다.

여자들이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이야기할 때면 셀 수 없는 부정적 질문과 의심이 자석처럼 달라붙는다. “네가 착각한 것 아니야?” “너무 예민한 것 같은데…” “남자도 많이 당해” “그러니까 그 시간에 거길 왜 갔어?” “너도 즐긴 것 아니었어?” 등등 현실을 회피하거나 왜곡한다. 심지어 명예훼손, 무고 등을 빨간 딱지처럼 남발하거나 ‘공작’의 날개를 푸드덕거린다.

ⓒ오수경 그림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징후를 말하면 ‘예민하다’고 하고, 사건이 일어난 후 말하면 ‘미리 도움을 청했어야지’라며 나무란다. 피해를 폭로하면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라’며 무시하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어떻게 몇 년이 지난 일을 그렇게 자세하게 기억하느냐’며 피해자를 ‘천재’로 둔갑시켜 조롱한다. 2차 피해가 두려워 익명으로 제보하면 “그게 사실이라면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라”고 등을 떠밀고, 막상 공개하면 피해자의 행동을 평가하며 흠집 낸다. ‘피해자’ ‘공익 제보자’로 존중받기는커녕 멀쩡하게 돌아가는 세계를 망치려는 ‘마녀’로 취급하면서 울타리를 치고 자신들만의 룰을 만들어 여성을 아예 ‘없는 존재’로 만들려 든다. 이런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현실과 피해를 드러내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일은 참 어렵다. 마치 하나의 미션을 해결하면 더 어려운 미션을 해결하고, 또 해결해야 하는 롤플레잉 게임 같기도 하다.

얼마 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회의에서 성폭력에 안이하게 대응하는 한국 정부를 비판하는 말이 쏟아졌다. CEDAW는 “사회·제도적 편견 때문에 성폭력 피해자들이 입을 열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폭로를 거짓말로 치부하거나 이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거는 등 남성 중심적인 조직 문화에서 비롯된 행태가 모든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죽여버리는, 침묵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2012년부터 2016년 사이에 성희롱 2109건이 보고됐는데, 단지 9건만 기소로 이어졌다. 왜 그런가요?”라는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온 피해 사실을 의심하고, 흠집 내고, 공작에 활용하며 ‘없는 것’으로 만들어 도리어 여성들의 입을 막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었다.

순수성은 ‘누가’ 훼손하고, 그 기준은 ‘누구에 의해’ 성립되는가?

미투(MeToo) 운동의 순수성을 말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다. 그 순수성은 ‘누가’ 훼손하고 있으며, 그 기준은 ‘누구에 의해’ 성립되고 있는가? 이 질문에 합당하게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미투 운동의 주체자, 유사 이래 가장 오래된 관습인 가부장 체제와 권력 구조에 함께 맞서는 동지가 될 수 있다. 미투 운동이 변질되거나 공작에 활용될 수 있다는 걱정을 하느라 주변에서 터지고 있는 아우성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 누구도 당신에게 그런 ‘룰 메이커’ 혹은 ‘공정한 심판자’ 구실을 맡기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자신을 위해, 또 다른 피해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용기를 낸 이들을 믿고 곁에 서는 ‘편애’다. 평등이 해일처럼 몰려오고 있는데 (자신들만의) 중립과 정의를 외치며 앉아 ‘정파’라는 조개만 줍지 말고.

기자명 오수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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