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말이 들리세요?(Can you hear me?)”

약간은 거친, 기계가 합성한 듯한 소리가 흘러나오자 강당을 가득 메운 수천명이 일제히 박수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휠체어에 기대 거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한 나약한 인간이 컴퓨터의 힘을 빌려 대우주의 비밀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28년 전 물리학과 대학 신입생이던 나는 스티븐 호킹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시간의 역사〉라는 책을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그날 호킹의 강연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통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휠체어에 앉은 그 나약한 인간을 통해 우리 모두가 지금 우주와 연결돼 있다는 묘한 흥분을 느꼈다.

한참 뒤 대학원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입자물리학을 공부하면서 스티븐 호킹이 얼마나 위대한 과학자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시간의 역사〉를 다시 꼼꼼하게 읽어본 것은 박사학위를 받은 뒤였다. 아주 약간 자연의 이치를 알아가던 때라 오래전에 읽었던 느낌과 전혀 달랐다. 꼭 필요하고도 중요한 내용만 간결하면서도 가장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시간의 역사〉가 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가장 안 읽히는 책인지 알 수 있었다. 제대로 이해하려면 물리학과 대학원생 정도의 지식이 필요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스티븐 호킹이 아인슈타인 이후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평가받는 이유는 현대물리학의 가장 심오하면서도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현대물리학을 떠받치는 두 기둥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다. 상대성이론은 서로 상대적인 운동을 하는 두 좌표계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론이다. 두 좌표계의 상대속도가 변하지 않는 경우에는 특수상대성이론이, 상대속도가 변하는 경우에는 일반상대성이론이 적용된다. 상대속도가 변하는 경우, 즉 가속도가 있는 경우에는 가속도에 의한 관성력과 중력이 동등하다는 이른바 등가원리에 의해 중력을 시공간의 곡률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중력이론으로서의 일반상대성이론이다. 한편 양자역학은 원자 이하의 미시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양자역학과 궁합이 잘 맞아서 상대론적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일반상대성이론은 양자역학과 궁합이 잘 맞지 않아서 하나의 이론으로 통합되지 못했다. 이는 21세기 현재에도 물리학의 가장 큰 난제 중 하나이다. 호킹은 1970년대 중반 블랙홀 주변에 양자역학을 적용해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블랙홀은 좁은 영역에 질량이 집중돼 표면중력이 강력한 천체로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가상의 구면이 경계를 이룬다. 이 경계를 넘어서면 빛이라도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 호킹은 사건의 지평선 근처에 양자역학을 적용해 블랙홀이 질량을 잃어버리면서 에너지를 방출하는 현상이 가능함을 보였다. 이를 ‘호킹 복사’라 한다. 호킹 복사는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AFP PHOTO한 시민이 케임브리지 대학 곤빌 앤드 키스 칼리지 정문 앞에서 호킹 박사를 애도하며 헌화하고 있다.
“과학 이론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바꿔야”

호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블랙홀이 이렇게 호킹 복사를 계속해 마침내 완전히 증발해버리면 블랙홀이 간직한 정보가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결코 정보가 손실되지 않는다. 이를 정보 모순이라고 부른다. 현대물리학의 두 기둥인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블랙홀에서 만나 서로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을 벌이고 있음을 호킹이 밝혀낸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만물의 근원이 1차원적인 끈이라고 하는 끈이론이 발전하면서 과학자들은 이를 이용해 호킹 복사에서도 정보가 손실되지 않음을 설득력 있게 주장했다. 2000년대 중반 호킹도 결국 이전의 견해를 철회했다. 그러나 사건의 지평선을 가로지를 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특히 2012년 몇몇 과학자들은 사건의 지평선 근처에서 여전히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이 양립 불가함을 주장하면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2010년 호킹은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와 함께 쓴 〈위대한 설계〉에서 과학 이론 자체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21세기 들어서면서 우리 우주가 유일한 우주가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의 다양한 우주를 품고 있는 다중우주 속 하나의 우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자가 점점 많아졌다. 이 패러다임에서는 다중우주 속의 우주마다 기본 물리상수 값이 다를 수 있으며 심지어 물리법칙조차 제각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우주가 왜 이런 모습인가에 대한 답을 주는 근본적인 물리법칙은 아예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우연히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우주 속에 살고 있을 뿐이다. 마치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가 1억5000만㎞인 것과도 같다. 이 값에는 그 어떤 자연의 근본 법칙이 개입하지 않는다. 다만 우연히 그 정도 적당한 거리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리 같은 고등 생명체가 진화할 수 있었을 뿐이다.

언젠가 아인슈타인은 “신이 이 우주를 만들 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지 궁금하다”라는 말을 했다. 여기에는 신도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근본원리를 찾고 싶다는 20세기 대표 과학자의 포부가 담겨 있다. 아인슈타인의 후학들은 이 유지를 받들어 20세기 내내 자연의 궁극적인 원리로서의 최종 이론, 또는 만물이론을 추구해왔다. 과학자들의 이런 로망은 사실 보편중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 이래로 한결같았다. 21세기의 호킹은 이제 그런 로망을 접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호킹에 따르면 이 우주를 설명하는 궁극의 단일한 이론이 존재하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으로서의 수많은 우주가 다중우주 속에 있을 뿐이다. 호킹은 이제 우리가 과학 이론의 목표와 조건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꿔야 할, 과학사적인 전환점에 서 있는 것 같다고 전망했다. 만약 이게 훗날 사실로 밝혀진다면 과학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이제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우주로 영원한 여행을 떠난 호킹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아주 평범한 별의 작은 행성에 사는 고등 원숭이 족속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매우 특별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로서 매우 특별한 종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적어도 호킹에게 조금이나마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마땅하다. 21세기의 사피엔스가 매우 특별한 것은 호킹 덕분이다. 고마워요, 스티브.

기자명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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