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개헌 정국을 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3월13일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이하 헌법자문특위)의 개헌안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정의로운 대한민국,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지금이 개헌 적기다” “이 시기에 개헌이 필요한 이유가 아주 강하게 설명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딱 잘라 지방선거와 개헌투표 동시 실시를 천명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헌법자문특위 관계자는 “대통령 핵심 참모들도 놀라더라. 예상 이상으로 발언 수위가 강했다”라고 전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발언 공개 여부를 대통령에게 다시 확인했다. 문 대통령은 “공개하세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특히 예상을 뛰어넘은 대목은, 대통령이 권력구조 개편 구상을 선명하게 제시한 순간이었다. 이날 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4년 중임제(1회 연임제)가 채택이 된다면, 이번에 선출되는 지방정부의 임기를 약간만 조정해서 맞춘다면, 차기 대선부터 대통령과 지방정부의 임기를 함께 갈 수 있다.” 개헌안 보고 전까지만 해도, 권력구조 문제는 적어도 1주일 뒤인 3월20일 국무회의까지 미뤄둘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다. 국회 논의에 가이드라인을 준다는 비판도 고려해야 했고, 무엇보다 국회 의석 분포가 불리했다. 자유한국당이 개헌 저지선(101석)을 넘긴 116석을 보유한 이상, 자유한국당이 동의하지 않는 대통령 1회 연임제를 내걸면 개헌 통과 가능성은 더 낮아진다.
 

ⓒ연합뉴스3월13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 초청 오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정해구 위원장(오른쪽)으로부터 국민헌법자문안을 전달받고 있다.

그럼에도 대통령이 선명한 권력구조 구상을 천명하였으니, 개헌 정국은 이렇게 예상 밖의 시점에 예상 밖의 방식으로 열렸다. 청와대는 3월26일까지 대통령 개헌안을 확정할 방침이다. 이 과정에서 국회의 움직임에 따라 급격한 반전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단 대통령이 명확한 제안을 내놓은 만큼 찬반 모두 논의는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가령 대통령 발의안에서 권력구조 관련 조항이 빠지는 반전이 일어난다고 해도, 일단 대통령의 발언으로 던져진 구상은 이후 논의에서 강력한 기준점으로 작용하므로 여전히 중요하다.

 

대통령의 권력구조 개편 구상은 이런 의미다. 대통령 4년 1회 연임제 개헌이 이뤄질 경우, 지방선거와 대선을 동시에 할 수 있다. 2022년 대선은 3월경에 있다(다음 대통령 임기가 5월10일부터 시작하므로, 헌법대로 40~70일 전에 대선을 치를 경우 3월이 유력하다). 2018년 6월에 선출되는 지방정부 임기를 3개월 정도 단축하면, 2022년 지방선거를 6월에서 3월로 당겨 대선과 함께 치를 수 있다.  

이 경우 정치체제의 규칙성이 높아진다. 대선·지방선거와 총선이 2년 주기로 교차하게 된다. 대통령은 4년 임기 반환점을 돌 때 총선으로 중간평가를 받게 된다. 1회 연임까지 고려하면, 정부는 8년 임기 중 2년마다 총선·대선·총선을 치르면서 평가를 받는 셈이다. 전반적으로 미국식 제도에 가까워진다. 이 2년 단위 전국선거 모델에서는, 총선이 대선 직후에 열려 입법부를 손쉽게 장악하는 ‘이명박식 행운’은 사라진다. 2007년 12월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배출한 한나라당은 4개월 만에 총선이 열린 덕에 153석을 얻는 압승을 거뒀다. 5년 단임 임기 중에 두 번의 중간평가(총선·지방선거)가 불규칙하게 돌아오는 현행 모델이 과도하고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 문 대통령의 문제의식이다.
 

ⓒ연합뉴스2017년 5월19일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가 첫 오찬 회동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러려면 개헌 시점이 중요해진다. 지방정부 임기 단축 문제가 걸려 있으므로, 지방정부가 구성되기 전에 개헌을 확정하는 편이 부담이 적다. 지방선거·개헌 동시투표를 문 대통령이 강조하는 이유 중에서도 이 대목이 핵심이다. 동시투표가 대선 공약이기도 하고, 개헌 국민투표를 별도로 할 경우 1200억원이 추가로 드는 등 비용 문제도 있다. 하지만 비용과 대선 공약 문제보다는 정치체제의 규칙성을 정비하는 문제가 대통령의 핵심 관심사로 보인다. 3월13일 헌법자문특위 보고에서 문 대통령은 되풀이해 ‘부칙’을 강조했다. “개헌 자문안에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본문은 다 준비가 되었는데 부칙이 없다. 현실세계에서는 부칙이 시행 시기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중요할 수 있다.” 이 시행 시기의 문제에 정치체제의 규칙성 문제도 걸려 있다.

이 구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원포인트 개헌’ 구상을 절반은 계승하고 절반은 갈라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 4년 1회 연임제를 제안했을 때도 정치체제의 규칙성 문제가 걸려 있었다. 선거 주기를 일치시켜 중간평가를 규칙적으로, 임기 중 1회로 하자는 취지였다. 여기까지는 문 대통령의 권력구조 구상과 같다.
 

ⓒ연합뉴스2월25일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운데)가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방한 저지 발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구상은 대선과 총선 시기를 일치시키고, 지방선거를 중간선거로 만드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주의 정치지형에서 어떤 정부든 여당이 원내 과반 의석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고 봤다. 대선과 총선 주기를 맞춰주면 집권세력이 안정된 의석을 갖추어서 통치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봤다. 이것은 지금 문 대통령의 ‘총선 중간선거’ 구상과는 정반대다. 헌법자문특위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맞추는 것보다는 대통령과 지방정부의 임기를 맞추고 총선은 중간평가 역할을 하는 것이 정치제도 면에서는 합리적이다”라고 말했다.

완벽한 제도는 없다. 대통령제에서는 입법부와 행정부가 둘 다 별개로 주권자가 선출했다는 정통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입법부와 행정부의 교착이 발생할 경우 이를 근본적으로 해소할 방법은 없다. 정치학계의 거장 후안 린츠가 대통령제의 핵심 딜레마라고 지적한 ‘이중 정통성 문제’가 이것이다. 청와대가 준비 중인 개헌안에는 입법부 선출의 비례성을 강화한다는 대목도 들어가 있다. 이 경우 이중 정통성 문제는 더 커질 수 있다. 비례성 강한 선거제도는 신생·군소정당 생성을 쉽게 하므로 집권당이 의회 다수석을 확보하기가 더 어려울 수 있다.
 

ⓒ시사IN 조남진2016년 박근혜 대통령 국정농단 이후 분권형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의 지지세가 일시적으로 올랐다.

총선이 중간선거로 갈 경우, 이중 정통성 문제가 불거진다. 물론 대선·총선 동시선거는 ‘이명박식 행운’이 입증했듯 행정부·입법부 간 견제와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중 정통성 딜레마를 중요하게 봤고, 문 대통령은 견제와 균형을 중요하게 봤다. 이중 정통성 딜레마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결국 행정부가 잘해서 국민에게 중간평가를 잘 받으면 해결될 문제다”라고 말했다.

헌법자문특위는 개헌 자문안을 준비하면서 또 다른 딜레마에 직면해야 했다.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의 핵심 교훈은 대통령이 자의적으로 권한을 휘두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촛불집회를 거치며 대통령 권한 분산이 시대정신이라는 데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대통령 권한을 분산하려면, 누군가는 그 권한을 인수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인수할 주체가 없다.

대통령의 권한을 인수할 주체는 선출된 권력이어야 제도 설계 원리에 맞다. 그렇다면 후보는 둘이다. 입법부와 지방정부다. 그런데 이 두 후보야말로 국민 여론이 지독히 불신한다. 국민 여론은 대통령의 권한 분산에는 원론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개별 항목으로 들어가면 입법부와 지방정부에 권한을 분산하는 개헌안에 거의 시큰둥하거나 심하면 적대적이다.

헌법자문특위는 개헌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문가 자문 외에, 일반인을 대상으로 국민인식 여론조사와 숙의형 시민토론회도 진행했다. 결과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사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지방정부에 입법권과 예산권을 주는 개헌안에 대해서는 국민 지지가 유독 낮다”라고 말했다. 이러면 대통령 권한을 분산하려 해도 인수자가 없어서 못하는 상황이 된다. 그렇다고 대통령 권한이 집중되고 자의적으로 행사되다가 온 나라가 흔들린 역사의 교훈을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다.

권한 이양은 입법부 아닌 지방정부로

문 대통령이 준비하는 개헌안은 크게 보아 입법부로의 권한 이양은 자제하고 지방정부로의 이양은 추진하는 방향으로 다듬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충돌도 있었다. 3월16일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는 ‘분권형 대통령제와 책임총리제’를 자유한국당의 개헌안으로 제시했다. 국무총리를 국회가 선출하는 방향이다. 이러면 총리가 대통령과는 다른 정통성(의회 정통성)에서 탄생하므로 의회제(내각제) 요소가 더 강해진다. 여론이 가장 싫어하는 방향이다. 정치제도 연구자들도 현실에서 잘 작동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지적한다. 대통령과 입법부의 권한 충돌 문제가 완화되기는커녕 더 극적으로 부각될 수 있다.  
 

ⓒ연합뉴스2월28일 임시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정세균 국회의장(맨 왼쪽)이 각 당 원내대표들과 법사위 안건 처리 및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방남과 관련한 긴급 대정부 현안 질문에 대해 대화하고 있다.

같은 날 오후에 나온 청와대 관계자의 반격이 여러모로 의미심장했다. “국민을 위한 개헌이 아니라 국회를 위한 개헌을 하자는 것 아닌가.” 민주주의 원리상 국회는 유권자를 대변하는 숙의기관이므로, 이 문장은 논리적으로는 어색하다. ‘국민을 위하는 대통령’과 ‘국회 자신의 이익을 위하는 국회’를 대비하고 있어서, 정치학에서 말하는 ‘선한 군주제 속성’도 잘 드러난다. 그래도 여론 호소력은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하다. 입법부에 대한 여론의 강한 불신은 개헌 정국에서 대통령의 무기다.

문 대통령도 이 문제를 핵심으로 꼽았다. 다시 3월13일 발언이다. “국회에 대한 국민의 불신, 지방정부에 대한 불신, 정당제도에 대한 불신을 현실적으로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문에 지금 단계에서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는 우리 현실에 맞지 않다, 좀 시기상조다 이렇게 생각한다. 최대한 국회에 많은 권한을 넘겨서 국회의 견제 감시권을 높일 필요는 있다 생각하는데, 그조차도 좀처럼 국민들이 동의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문 대통령은 의회제가 그 자체로 나쁘다고 생각하는 정치가는 아니다. 대선 첫 출마를 준비하던 2012년 7월 〈연합뉴스〉와 통화하면서 “대통령제보다는 내각책임제가 훨씬 좋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가 발전된 대부분의 나라들이 내각책임제를 하고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2017년 대선 때 내놓은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는 이런 대목이 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는 내각제가 더 나은 제도라고 봅니다. 우리가 백지에 처음 그림을 그린다면요. (중략) 권력의 균형이라는 면에서는 내각제가 낫고, 권력의 집중이라는 면에서도 그렇긴 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정치제도 이론가들의 논의를 정확히 포착한다. 의회제는 정부와 의회가 한 몸이어서 권력을 집중시키면서도(통치의 효율성), 한편으로 연립정부 내부의 감시와 야당의 감시를 통해 견제와 균형도 달성하는 제도라는 취지다. 이와 비교하면 대통령제는 통치의 효율성(권력의 집중)과 견제·균형 중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이 대목에서 총선을 중간선거로 할지 동시선거로 할지를 놓고 ‘노무현 구상’과 ‘문재인 구상’이 갈라졌다.

다만 문 대통령이 강조한 의회제의 장점을 살리려면 입법부가 공공의 감시를 받고 유능하게 작동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는 “내각책임제가 이론적으로는 우수하다 해도 지금 우리 현실에 맞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합니다”라고 유보를 달았다. 3월13일 문 대통령이 의회제를 “시기상조”라고 말한 데는 이런 조건들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판단이 깔린 것 같다.

대통령의 권력구조 구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회로의 권력 분산에서 대통령 중심제로 옮겨가는 경향을 보인다. 대통령 당선 열흘 후인 2017년 5월19일, 문 대통령은 당시 5당(민주당·자유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정의당) 원내대표와의 회동에서 이런 말을 한다. “선거제도 개편이 제대로만 된다면 꼭 현행 대통령제를 유지할 필요는 없지 않나. 다른 권력구조도 선택 가능한 것 아닌가.” 4년 중임제가 대선 공약이기는 하지만 다른 권력구조, 즉 의회로 권력을 더 넘기는 방안도 선택 가능하다는 의미다. 전제가 있다. 선거제도 개편이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성이 높아져서 국민 여론 분포에 더 가까운 의회가 구성된다면 지금보다는 더 신뢰받는 국회가 가능할 수 있다. 그렇게 불신의 문제가 완화되면 의회의 비중을 높이는 권력구조 개편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올해 3월13일 발언에서는 이런 가정이 모두 사라지고 “의원내각제·이원집정부제는 시기상조”라고 간명하게 바뀐다. 10개월 동안 의회 논의를 지켜본 결과, 의회 불신을 해소할 전망이 밝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문 대통령은 2012년부터 사실상 일관된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여러 시점의 발언들을 한데 모으면 이렇다. “백지 상태에서 제도원리만 보면 내각제가 더 나은 제도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에서는 대통령제를 오래 운영해오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국회에 대한 불신이 매우 심각하다. 국회가 나서서 제도 개혁으로 이 불신을 완화할 수 있었다면 모르겠으나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그런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대통령 중심제를 축으로 개헌안을 내놓겠다.” 대통령 4년 1회 연임제와 총선 중간선거를 축으로 하는 권력구조 구상은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문제의 핵심에는 뿌리 깊은 의회 불신이 있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박근혜 대통령 국정농단 시절에 일시적으로 분권형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의 지지세가 올랐던 적이 있다. 하지만 문 대통령 취임 이후 대통령제 지지는 다시 강고해졌다. 1987년 6월항쟁의 경험도 있고 해서, 대통령제 선호와 의회 불신은 한국에서 거의 상수가 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 의회 불신이 완화되지 않는 한, 권력구조 논의가 대통령제 이외의 다른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인터넷 여론은 의회의 난맥상이 드러날 때면 “이런데도 내각제를 하자고?”라고 조롱하는 댓글을 단다. 하지만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리 수사를 보며 “이런데도 대통령제를 하자고?”라고는 거의 묻지 않는다. 의회 불신과 대통령제 선호는 일시적 유행이라기보다는 구조화되어 있다. 이를 극복해야 할 주체는 결국 의회 자신일 수밖에 없는데, 전망이 밝지는 않다.

개헌 저지선을 확보한 자유한국당은 대통령 개헌안을 “관제 개헌”이라고 부르며 항전 태세다. 내용, 시기, 지지층 여론의 세 차원에서 자유한국당은 개헌안을 받기 어렵다. 내용상으로는 대통령중심제를 오히려 강화하는 4년 1회 연임제에 당내 지지가 거의 없다. 의회로의 분권을 주장하지만, 의회의 신뢰를 높이려는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드문 예외로, 3월16일 김성태 원내대표는 “국회의 국민대표성 강화”를 언급했다. 의원 선출의 비례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로 읽히는데, 진의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김 원내대표가 ‘분권형 대통령제’와 ‘국민대표성 강화’를 동시에 언급한 것은 지난해 5월19일 대통령과 5당 원내대표 회동 때 문 대통령의 발언 취지와 일단 결이 같다. 논의의 단초가 될 수 있을까? 문 대통령의 당시 제안은 10개월간 사실상 묵살당했고, 대통령의 구상도 대통령중심제로 더 기울었다. 김성태 원내대표의 제안 이후 반론에 나선 청와대 관계자는 의회로 권한을 넘기는 모든 아이디어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버스는 이미 떠났는지도 모른다.

자유한국당, ‘고려연방제 개헌’ 비난에 동조

시기상으로는, 6월 지방선거와 개헌 투표를 동시에 할 경우, 투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투표율이 올라갈 수 있다. 이것이 불리하다고 보는 기류가 자유한국당에 있다. 충성표 외에 확장성이 크게 떨어진 자유한국당의 현실에서 투표율 상승은 나쁜 뉴스다.

더욱이 자유한국당의 강성 지지층이 문재인 대통령의 지방분권 개헌안을 두고 ‘고려연방제 개헌’이라는 담론을 만들어 퍼뜨리고 있다. 북한식 통일방안에 맞춘, 적화통일을 지원하기 위한 개헌이라는 의미다. 자유한국당은 이 궤변을 강성 지지층 일각의 주장으로 남겨두는 데도 실패했다. 2월26일 홍준표 대표가 “문재인 정부는 개헌을 통해 연방제 수준의 지방자치를 하려 한다. 종국적인 목적은 남북 연방제 통일이다”라고 말하며 ‘당의 입장’으로 격상시켰다.

합리성이야 어쨌든 개헌 저지선 확보 정당이 이런 태세이기 때문에, 대통령 발의 개헌안의 통과 전망이 밝지는 않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 발의안만을 고집할 생각은 없다. 국회가 4월28일까지 합의된 개헌안을 만들어준다면 자연스럽게 그 합의안으로 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4월28일은 지방선거 동시투표를 위한 마지노선이다. 지방선거 동시투표를 대통령이 중요하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이 역시 국회 논의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다. 어쨌거나 헌법 개정의 권한은 국회에 있다.

너무나 많은 변수가 있어서 개헌 정국의 전개를 예측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대통령이 개헌 발의를 강행할지, 마지막 순간에 권력구조 문제가 빠지고 기본권과 지방분권만 다루는 ‘최소 합의 개헌안’이 발의될지, 국회가 4월28일까지 국회 개헌안을 도출할 수 있을지, 국회가 더 길고 책임 있는 숙의를 약속하며 기한의 문제를 뛰어넘을지, 합의 실패와 찬반 표 대결이라는 ‘정치의 실패’로 귀결될지, 셀 수 없는 변수가 기다린다. 권력구조 구상 외에도 대통령 발의안에 담길 전문 개정안, 기본권 조항, 지방분권 조항, 입법부·행정부 권한조정 조항, 사법부 권한조정 조항 등 하나하나가 중대한 주목을 받을 가치가 있다. 그 모든 변수, 이슈, 논쟁, 가치의 충돌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이 바로 개헌 정국이다.

그럼에도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고 전제하면, 현재로서 가장 가능성 높은 미래는 ‘대통령 개헌안 발의→의회 개헌안 합의 실패→대통령 개헌안 부결’로 이어지는 전개다. 모두가 민주화 이후 처음 등장하는 초유의 사태여서, 처음 겪어보는 논쟁과 예측 불가능한 후폭풍이 기다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헌법이 진정한 숙의의 대상으로 존중받을지, 혹은 “누가 후폭풍을 더 세게 맞을 것” 식으로 정치게임의 도구로 취급받을지도 확실치 않다. 이 갈림길이야말로 서른 살을 넘겨 어른이 된 ‘87년 체제’의 성숙을 검증할 중요한 지표가 될 전망이다. 87년 체제가 지금껏 가보지 않았던, 처음 가보는 90일이 기다리고 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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