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박근혜·최순실 재판은 몹시 피로한 취재였다. 늘 같은 표정의 박근혜 피고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최순실씨는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만 했다. 변호인들과 검찰은 증인에게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아침 10시부터 저녁 7시까지, 주 4회 재판 기록을 받아 치면 A4 용지 120쪽 정도. 같은 업무를 한 지 반년쯤 지나자 멍해지는 일이 잦았다. 혼자 느낀 감상은 아닐 것이다. 재판 중 한숨을 쉬는 타사 기자들이 점점 늘었다. 지금은 주인 없는 기자석이 대다수다.
소송 관계인이나 기자들보다 방청객의 집중력이 더 강했다. 예닐곱 시간씩 이어지는 증인신문 가운데에도 방청석을 꽉 채운 ‘박사모’나 ‘태극기 부대’ 사람들은 재판을 면밀히 살폈다. 오히려 박근혜 피고인은 억지로 학원에 끌려나온 초등학생처럼 넋 나간 표정만 지었다. 박사모의 태도는 훨씬 더 치열해 보였다. 재판이 끝난 뒤에도 이들의 ‘활동’은 이어졌다. 기자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무조건 무죄다” “질 수가 없는 재판이다”라고 품평했다. 흡사 마지막 라운드 후 서로 이겼다고 주장하는 피투성이 복싱 선수들 같았다. 늘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동기가, 60대 노인들의 투지를 이다지도 끌어올리는지.
지난해 말 박근혜 피고인이 사실상 재판을 거부하면서부터 박사모나 태극기 부대는 변했다. ‘박근혜 없는 박근혜 재판’에서 방청객들은 집중력을 잃었다. 조는 사람들이 늘었고 나머지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해가 바뀐 뒤 들어간 한 재판에서는 단 두 사람만이 자리를 지켰다. 이날 재판이 조용히 끝난 뒤 나는 심증을 확증으로 굳혔다. ‘혹시 저 사람들은, 오로지 박근혜의 얼굴을 보고 ‘사랑합니다!’를 외치기 위해 여기 오는 게 아닐까’라는.
취재하는 처지에서야 힘들었으나 재판 내용은 분명 귀중했다. 정권의 폭력과 기업의 탐욕이 결합되면 어떤 일까지 벌어지는지 낱낱이 드러냈다. 증인으로 나온 피해자들이 눈물을 쏟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 과정을 모두 지켜봤던 이들이, ‘박근혜 응원’이라는 목적이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것이다. 이 맹목적인 팬클럽이 무언가 깨달으려면 충격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선고 후 박사모나 태극기 부대가 정권 피해자들 이상의 피눈물을 쏟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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