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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동석이 골든 슬럼버를 들고 돌아왔다

감시 사회, 권력의 음모, 이에 맞서는 힘없는 개인의 연대…. 자칫 허무맹랑해 보일 수 있는 영화 <골든 슬럼버>는 지난 9년 보수 정권의 전횡을 경험하면서 설정에 힘을 얻었다.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2018년 03월 07일 수요일 제5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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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자꾸만 비싸지는데… 우리도 꿈을 살 수 있을까?’ 영화 <마이 제너레이션>(2004) 포스터에 흐릿하게 새겨진 이 문장은 ‘88만원 세대’의 삶을 더할 수 없이 적확하게 요약한 질문이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2006)에서도 청춘은 잔인하리만큼 현실적으로 묘사된다. “형이 알고 있는 가장 먼 미래가 언제야?”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내일”이다. 이들에게는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도 도무지 내일 따위 그릴 수 없는 하루만이 차곡차곡 쌓인다. 주인공은 절규한다. “일한 만큼만 버니까 우리가 이렇게 사는 거야!”라고. “멀쩡하게 살기가 왜 이리 힘드냐”라는 대사 역시 여전히 유효하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노동석 감독은 영화 <마이 제너레이션>과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등 전작을 통해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얻었다.

남들보다 뒤늦게 간 군대에서 제대하고 난 후 ‘몸으로 하는 일’을 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적성에 맞지 않던 독문학 전공을 미련 없이 접었다. 학생도 군인도 아닌 채로 지내던 중 너무 외로워서 사람이나 만나려고 찾아간 곳이 하필 영화 강좌가 열리는 문화센터였다. 내친김에 영화아카데미까지 들어갔다. 노동석 감독은 이후 데뷔작 <마이 제너레이션>과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두 편의 영화를 통해 ‘한국 영화의 미래’로 주목받는다.

각각 3000만원과 3억원이라는 저예산으로 ‘청춘’ 영화를 만드는 동안 영리하게도 성장담이라는 유혹에 쉽게 빠지지 않았다. 위기를 극복하지도, 실패를 발판 삼아 성공하지도 못하는, 발에 차이듯 많고 흔한 21세기 ‘보통’ 청년들의 삶을 담담히 담아낸 두 영화는 차라리 다큐멘터리였다. 그렇게 자신으로부터 길어 올린 이야기를 찍는 동안 깨달았다. 영화는 현실을 따라갈 수 없었다. 현실은 언제나 영화보다 한 발짝쯤 더 비극적이었다.

평단과 관객의 호평이 나왔지만 흥행은 쉽지 않았다. 각종 영화제 수상과 입소문에도 독립영화의 ‘대박’을 가늠하는 1만 관객 달성은 어려웠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마지막 대사인 “훌륭한 소년이 될 거예요?”라는 질문을 노동석 감독에게 던졌을 때,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훌륭한 소년은 좀 그렇고, 훌륭한 중년이 되어야지(<씨네21> 제603호, 2007).”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노동석’은 잊힌 이름이었다. 누군가는 그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가 영화판을 아예 떠났다고 했다. 영화사 집이 제작하고, CJ엔터테인먼트가 배급하고, 배우 강동원이 주연을 맡은 영화 <골든 슬럼버>의 감독이 ‘그’ 노동석이라고 했을 때,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어떻습니까, 지금 훌륭한 중년으로 지내고 있나요?’ 노동석 감독이 ‘그렇다’라고 한다면, 그의 영화에 기대 청춘을 지나온 관객들도 얼마간 안도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는 “썩 훌륭한 중년은 아닌 것 같다”라고 대답하고 수줍게 웃었다.

소문과 달리 아주 영화판을 떠난 건 아니었다. 다만 영화 한 편 준비하는 동안 3~4년이 훌쩍 지나가고 또 엎어지기 일쑤였다. “다른 감독들처럼” 말이다. 가끔은 다른 일에 기웃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영화를 계속할 수 있을까 흔들리기도 했다. 조급했고, 무서웠고,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일정 시간을 견디는 동안 무뎌졌다. 10년은 그러고도 충분한 세월이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골든 슬럼버>는 서울 광화문에서 대통령 후보 암살범으로 지목된 한 남자의 도주극을 그렸다.
앞 왼쪽부터 배우 강동원, 김의성, 감독 노동석씨.

2년 전 영화사 집 이유진 대표로부터 <골든 슬럼버> 초고 상태의 시나리오를 받았다. 원작인 이사카 고타로의 동명 소설 <골든 슬럼버>를 인상 깊게 읽은 배우 강동원이 이 대표에게 7년 전 직접 영화화를 제안한 작품이었다. 강씨는 원작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끝나는 부분을 영화화를 통해 정확히 해결하고 싶어 했다. 이 대표는 제안 직후 판권을 바로 알아봤지만 할리우드에서도 구입하고 싶어 하는 작품이라 판권을 확보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고 한다.

원작이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춘 작품이었기에 노 감독은 각색에 참여하면서도 걱정이 컸다. 원작을 영화화한 일본 영화 <골든 슬럼버>가 국내에서 흥행에 재미를 보지 못했던 점도 부담을 더했다. 감시 사회, 권력의 음모, 그리고 이에 맞서는 힘없는 개인의 연대…. 이야기의 큰 뼈대와 설정만 가져오고 많은 부분을 한국화했다.

유력 대선 후보를 ‘죽이고’ 시작하는 영화

<골든 슬럼버>는 영화 초반부터 유력 대선 후보를 ‘죽이고’ 시작한다. 곤경에 빠진 사람을 지나치지 못해 모범 시민상을 받기도 한 택배 기사 건우(강동원)의 눈앞에서 대선 후보가 탄 차량이 서울 광화문 사거리에서 폭탄 테러를 당한다. 국정원이 기획한 이 사건에서 범인으로 건우가 지목되고, 졸지에 암살범이 된 건우는 러닝타임 내내 서울 곳곳을 뛰어다닌다. 통화 내역, 신용카드 사용 내역이 감시당하고 심지어 얼굴까지도 조작되는 상황에서 이를 해결할 ‘능력치’ 따위 전혀 없는 일개 소시민이 사건의 전모를 헤쳐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건우의 능력치라고 할 만한 건 택배기사인 덕에 서울 지리를 훤히 꿰고 있다는 점, 그리고 “손해 좀 보면 어때요”라는 대사에서 드러나듯 인간을 믿는다는 점이다. 국정원이 활용하는 능력에 비해 하찮다. 그러나 영화도 원작 소설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각자의 개연성을 갖고 결말을 향해 숨 가쁘게 나아간다.

일견 허무맹랑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는 지난 9년간 보수 정권하에서 보낸 덕분에 개연성을 확보했다. 간첩을 조작하고, 무작위로 사찰하는 권력의 전횡을 모두가 경험한 덕분이다. “저 역시 초기에 제안받았을 때 심리적 저항이 있었어요. 강동원씨가 택배 기사 역이 어울릴까, 만큼이나(웃음) 관객들이 과연 이 설정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고. 그 와중에 한국 사회에서 ‘설마’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대부분 사실로 밝혀졌잖아요. 함께 만드는 분들이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 전혀 문제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겠구나(웃음).”

<골든 슬럼버>는 최초가 많은 영화다. 서울 광화문 로케이션이 허가된 영화는 아직까지 <골든 슬럼버>가 유일하다. 2017년 2월, 4개월간 준비하고 끈질기게 유관기관을 설득한 끝에 탄핵 국면이었음에도 4시간 촬영 허락을 받았다. 영화의 주요 장면마다 등장하는 비틀스의 노래 ‘골든 슬럼버’ 역시 한국 영화 최초로 사용 허가를 받았다. 사용료는 배우 한 명 개런티에 맞먹는 금액으로 알려졌다. 건우와 친구들을 엮어내는 넥스트의 음악 ‘그대에게’와 ‘힘을 내’는 넥스트는 물론 고 신해철씨 유족의 전폭적 지지 속에 사용할 수 있었다. 그중 ‘힘을 내’는 미공개 음원을 하드디스크에서 발굴한 것으로 이를 먼저 건넨 것도 유족이었다.

노동석 감독은 함께 일하는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골든 슬럼버>를 만드는 동안 노 감독의 꿈에 가장 많이 나온 사람은 강동원씨였다. 극의 90%를 끌고 나가는 배역인 만큼 노 감독은 강씨를 그만큼 더 오래 관찰하고, 많이 묻고, 또 들었다. 그 속에서 캐스팅 전 구축했던 캐릭터를 종종 무너뜨리고 새로운 디테일의 캐릭터를 뽑아내려 했다. 이를테면 강씨가 실제 평양냉면 마니아라는 걸 알게 된 후 ‘건우가 평양냉면 먹는 장면을 넣으면 어떨까?’ 묻기도 했다(강씨의 거절로 무산됐다). <마이 제너레이션>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집단이나 세대가 아닌 한 사람, 한 순간을 얇게 썰어서 보여주고자 한다. 영화 속 배역이지만 다큐멘터리처럼 살아 있는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골든 슬럼버>는 이전 작품의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누긋하고 또 희망적이다. 노동석이라는 ‘인장’이 흐릿한 것은 세월의 영향일까. 혹은 지금껏 가장 많은 자본을 투자받은 (그래서 관계된 사람과 책임질 사람도 더 많아진) 덕분일까. 지난 10년 영화를 대하는 태도 중 가장 많이 바뀐 점을 물었다. “바쁘게 살다가 잠깐 시간을 내 돈을 주고 표를 사서 영화를 보시는 분들의 마음이 어떤 건지 예전에는 요만큼 알았다면, 이제는 좀 많이 알게 됐다고 할까요. 꼭 머리를 싸매면서 보는 영화만이 좋은 게 아니라, ‘극장에서 함께 좋은 저녁 시간을 보냈다’라는 느낌도 가치가 있구나. 그게 사소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골든 슬럼버>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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