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넘도록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주요국들에 미국 대사직이 여전히 공석으로 남아 있어 워싱턴 외교가의 우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사직 공백에 따른 우려는 지난해 여름 주한 미국 대사로 내정된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낙마하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그는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국장을 지냈다. 지명 초기만 해도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기조와도 어울려 주한 미국 대사로 ‘적임자’라는 평가를 들었다. 한국 정부의 아그레망(임명 동의)까지 받은 상태에서 백악관이 명쾌한 설명도 없이 내정을 전격 철회해 비난이 쏟아졌다.

미국외교관협회(AFSA)의 최신 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미국 대사직은 모두 188개. 이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 들어 최근까지 자리를 채운 대사직은 65개로 전체 약 3분의 1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직업 외교관에게 돌아간 자리는 26개이고 나머지 39개는 지난 대선 때 트럼프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이들이나 그와 끈끈한 정치적 친분 관계가 있던 인사들에게 돌아갔다.

ⓒ연합뉴스주한 미국 대사로 내정되었다가 낙마한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 한국석좌(오른쪽).
미국에서는 새 행정부가 들어서면 관례상 기존 대사들은 사직서를 낸다. 트럼프는 당선자 신분으로 지난해 1월20일 대통령 취임에 앞서 해외 주재 대사들에게 ‘예외 없이’ 사직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전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측근인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도 사직했다. 빅터 차가 트럼프 대통령의 공식 지명과 상원 인준을 받는 대로 늦어도 2월 중에는 부임하리라 예상되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낙마로 인해 차기 미국 대사 후보가 낙점되더라도 신상 검증과 상원 인준을 거쳐 부임하기까지는 최소 석 달이 걸릴 전망이다. 핵심 우방인 한국에서 대사 자리가 1년 이상 공백이지만 일본과 중국 주재 대사직은 일찌감치 채운 상태다. 영국·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트럼프 대통령이 유독 주한 미국 대사직만 장기 공백 상태로 둔 건 아니다. 독일과 유럽연합(EU) 대사도 여전히 1년 이상 공석이다. 중동의 핵심 우방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이고 요르단·터키·이집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아르헨티나·오스트리아·벨기에·아일랜드·헝가리 등도 미국 대사가 정해지지 않았다. 최근 CNN 보도에 따르면 대사가 지명되지 못한 주요국이 한국을 포함해 30곳에 이르고, 이와 별도로 7개국은 대사 지명자가 발표됐지만 아직 상원 인준을 받지 못했다.

반면 트럼프 행정부 들어 비교적 신속히 대사 관문을 통과한 사람도 있다. 정치인 출신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대사가 대표적이다. 헤일리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나흘 만인 지난해 1월24일 상원의 신속한 인준을 거쳐 대사 관문을 통과했다. 이어 지난해 3월에는 트럼프의 파산보호 전문 변호사인 데이비드 프리드먼이, 5월에는 테리 브랜스태드 전 아이오와 주지사가 상원 인준을 받아 이스라엘 대사와 중국 대사로 각각 부임했다.

전통적으로 미국 대통령은 핵심 대사직의 3분의 1을 직업 외교관이 아닌 자기 입맛에 맞는 정무형 인사로 채워왔다. 트럼프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선 때 기부금을 많이 냈거나 정치적 친분이 있는 인사들에게 대사직을 안겼다. 이를테면 프로 미식축구 뉴욕 제츠 구단주로 공화당의 ‘큰손’ 후원자인 우디 존슨에게 영국 대사직을 주었다. 트럼프는 대선 때 수십만 달러를 후원한 메이저리그 LA 다저스 공동 소유주 제이미 매코트에게 프랑스 대사직을, 2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한 여성 기업인 출신 켈리 크래프트에게는 캐나다 대사직을 선물로 각각 보답했다.

ⓒAP Photo1월29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사들과 오찬 중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
그나마 이들은 상원 인준을 통과해 모두 해당국에 부임하는 데 성공한 경우다. 반면 공화·민주 양당의 정쟁 탓에 1년 넘도록 인준이 지연된 불운한 경우도 있다. 대표 사례가 지난해 9월 트럼프에 의해 독일 대사에 지명되고도 상원 인준을 아직 받지 못한 리처드 그러넬 전 유엔 대변인이다. 그러넬 지명자는 한때 보수 방송 〈폭스뉴스〉의 해설가로 나서 민주당을 주로 공격했는데 이 점이 부메랑이 되었다. 민주당 크리스 머피 상원의원은 지난해 그러넬 지명자에 대한 인준 청문회에서 “케이블 뉴스 해설가 출신인 당신만큼 외교관직에 부적격인 사람도 드물다”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그는 상원 외교위 인준청문회는 거쳤지만 민주당 반발로 본회의 표결에 부쳐지지 못했다. 민주당 상원의원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리지 못하면 상원 본회의 인준 표결은 무한정 늦어질 수밖에 없다.

백악관은 국무부 탓, 국무부는 백악관 탓

일부 대사 지명자들이 상원 문턱에서 좌절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민주당 의원들을 가리켜 ‘업무방해주의자들’이라며 “이들이 대사직 후보자의 인준을 질질 끌고 있다”라고 맹비난했다. 하지만 대사 후보의 인준 지연을 민주당 상원 의원들 탓으로만 돌리는 건 무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빅터 차 CSIS 한국석좌처럼 아그레망까지 거친 사람을 전격 내친 데서 보듯이 백악관의 자체 모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대사직 후보 선발과 관련한 백악관의 지나친 간섭도 논란이다. 통상 대사 후보자는 직업 외교관이 아닌 정무형인 경우 백악관 인사실이 후보 명단을 국무부에 보낸다. 국무부가 검토하고 승인한 뒤 백악관으로 다시 보낸다. 이후 백악관이 해당 후보를 최종 승인하면 대통령의 공식 지명과 함께 상원에 인준을 요청한다. 문제는 백악관이 정파적 인사를 대사 후보로 골라 국무부에 보내다 보니 상호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ABC 뉴스〉는 최근 익명의 백악관 관리의 말을 인용해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트럼프와 이념적으로 가까운 백악관의 추천 후보를 승인하길 꺼려왔다”라고 노골적으로 불평했다. 대사직 선발을 놓고 초당적 인사를 선호하는 국무부와 친트럼프 인사를 선호하는 백악관 간에는 팽팽한 긴장이 있다.

국무부의 고충은 국무부 관리가 〈ABC 뉴스〉에 털어놓은 고백에서도 엿보인다. 이 관리는 “백악관은 전임 오바마 행정부와 정치적으로 너무 가깝거나 이란 핵 합의처럼 트럼프 행정부가 폐기를 약속한 정책에 깊숙이 관여한 인사들을 대사 후보직에서 철저히 차단한다”라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대사 후보자들에 대한 ‘정치적 여과’ 과정이 심각하다는 것이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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