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조준래 옮김, 어크로스 펴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이어 무너지던 1990년대 초, 한국의 ‘자생적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화두가 있었다. ‘스탈린은 레닌의 계승자인가, 배반자인가?’ 그 나라들에서 일제히 발생한 반(反)사회주의 봉기의 동력이 단지 ‘자본주의 제국주의자’들의 음모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스탈린이라는 독재자가 사회주의를 타락한 체제로 전락시킨 것인가? 혹시 현실 사회주의를 지구상 최초로 실현시킨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이 당초에 잘못 설계한 것은 아닐까? 〈혁명의 러시아 1891~1991〉의 저자인 올랜도 파이지스 런던 대학 교수는 ‘레닌의 책임’에 무게를 싣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은 “제정 러시아 말기에서부터 소비에트 연방 몰락까지 100년의 지평으로 조망한 러시아 혁명사”라고 소개되었다. 책은 주로 1905년 ‘피의 일요일(차르의 군대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위대를 학살한 사건)’부터 1953년 ‘스탈린의 죽음’까지 48년 동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레닌이 ‘부르주아 혁명 이후에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가능하다’는 마르크스주의의 교의까지 살짝 왜곡하며 1917년 2월 혁명으로 성립된 임시정부를 무너뜨리는 복잡한 과정을 간략하지만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레닌 사후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농민 등 프티부르주아 계급을 희생시켜 공업을 육성하는데, 이 발전 전략이 부하린,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등 동지들의 대규모 숙청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것도 읽을 수 있다. 스탈린이 피비린내 나는 통치를 통해 소련 사회주의를 어느 정도 완성한 것은 1950년대 초반이었다. 하지만 이로써 혁명은 사실상 끝났다. 책은 그 이후의 역사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지 않는다. 흐루쇼프와 고르바초프라는 개혁가들이 레닌주의의 이상을 되살려 ‘인간적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헛된 수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레닌의 배반자가 아니라 계승자였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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