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평생 말 타거나 오토바이 모는 역할만 해왔어.” 그가 던진 이 한마디가 씨앗이 되었다. 함께 작업하며 친분을 쌓은 감독 브렛 헤일리의 가슴 위에 내려앉았다.

“당신에 대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감독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와 함께 씨앗이 싹을 틔웠다. “훨씬 더 다양한 작품을 소화할 수 있는 배우”라는 믿음으로, “평소 알고 있고 사랑하는 그의 모습”이 담긴 시나리오를 썼다. 그렇게 돋은 싹이 이내 튼튼한 이야기로 자라나 마침내 꽃을 피웠다.

2017년 선댄스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은회색 머리카락과 콧수염이 도드라진 한 남자의 초상이 포스터를 가득 채웠다. 영화 한 편을 소개하는 포스터 이미지가 이 남자의 고개 숙인 옆모습만으로 충분했던 이유. 감독은 이렇게 설명했다. “내 계획은 단순했다. 90분짜리 샘 엘리엇에 대한 이야기. 이것이 영화 〈더 히어로〉의 탄생 배경이다.”

1944년생. ‘목소리 좋은 카우보이’ 아니면 ‘노련하고 고집 센 군인’ 역으로 필모그래피 대부분을 채운 배우. 주연을 맡은 작품도 거의 없이 대체로 조연으로 평생을 산 배우 샘 엘리엇이 영화의 모든 장면을 책임지는 이 영화. 맞다. 〈더 히어로〉는 그의 이야기다. 아니다. 〈더 히어로〉는 단지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번엔 말을 타지 않는다. 대신 상을 탄다. 40년 전 찍은 대표작 한 편의 후광에 기대어 시시한 노년을 보내던 왕년의 웨스턴 무비 스타 리 헤이든(샘 엘리엇)이 평생공로상을 타면서 얘기는 시작된다.

‘서부극 평론 보존협회’라는 듣도 보도 못한 단체가 상을 준다기에 찾아간 리. 그날 만난 젊은 여성 샬럿(로라 프레폰)에게 슬쩍 과시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참석한 시상식. 술을 좀 마셨고 그 술에 마약도 좀 탔다. 괜히 기분이 좋았다. 말이 술술 나왔다.

“여기 오기 전에 사전에서 ‘공로’라는 단어를 찾아봤어요. ‘많은 노력의 결과.’ 네, 제가 많이 노력하긴 했죠. 하지만 이 세상에는 저보다 더 이 상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전 제가 왜 여기 서 있는지 모르겠어요. 우린 다 똑같아요. 그냥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죠. 제가 여러분보다 나을 게 없고 여러분도 저보다 나을 게 없어요. 이곳의 모든 분은 저만큼이나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어요.”

최선을 다한 모든 사람들에게

술김에 털어놓은 진심과 뒤이은 모종의 퍼포먼스가 수많은 휴대전화 영상에 담겨 퍼지면서 하루아침에 리의 삶이 요동치는 이야기. 들어오지 않던 출연 제의가 들어오고 얻지 못하던 오디션 기회를 얻는 이야기. 그리하여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그러므로 또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이야기.

남은 인생에서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석양을 잠시 넋 놓고 바라보는 장면에서, 쉼 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를 마주한 채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는 뒷모습에서, 그리고 곱씹을수록 가슴 깊이 파고드는 마지막 시 한 수에서. 맞다, 〈더 히어로〉는 그의 이야기다. 아니다, 〈더 히어로〉는 단지 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한 모든 사람들’에게 바치는 아름다운 헌정 영화다.

“사랑하는 이들을 땅에 묻으며 나는 체념하지 않는다.” 영화 속 한마디가 작은 씨앗이 되어 내 가슴에 내려앉았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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