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이 흘렀다. 나는 용산 참사를 모티브로 소설 및 영화 〈소수의견〉을 썼고 용산 참사 재판 과정을 추적한 르포르타주를 논픽션 〈옹호자들〉에 실었다. 시절이 바뀌자 한때 불온서적 취급을 받던 책들이 고교생들에게 열심히 읽힌다. 그것들은 독서토론 대회와 논술 경시대회의 지문이 되었다. 아직도 종종 강연 의뢰가 들어오곤 한다.

나는 10대 학생들 앞에 선다. 손들어보게 한다. 누구도 용산의 광경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 이야기는 똑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경찰 진압 중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학생들은 아직 놀라지는 않는다. 재로 산화하는 대신 바다 깊이 가라앉은 여객선을 쉽게 떠올리기 때문이다. 나는 용산 재개발 구역의 망루가 불타오르는 모습을, 똑같이 재개발될 운명인 옆 동네 북아현동에서 텔레비전 뉴스로 보았다. 바닥이 기울어 수평이 맞지 않는 주택이었다. 녹슨 쇠창 바깥에서는 철거 반대 시위 중인 동네 세입자들이 두드리는 꽹과리 소리가 어지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사IN 자료2009년 2월9일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본부 정병두 본부장이 1월20일 벌어진 ‘용산 참사’ 수사 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나는 화재가 일어난 서울 용산 4구역의 개발수익이 1조4000억원이라는 증권사의 예측치를 보여준다. 1조4000억원을 벌려면 잿더미 위에 어떤 건물을 세우겠냐고 묻는다. 녹다 만 눈더미와 부려놓은 짐짝과 자동차 몇 대가 차지한 공터의 사진을 보여준다. 그 주차장의 하루 주차비는 1만3000원이며, 대략 30만 년 동안 자동차를 세워둬야 1조4000억원이 된다고 말해준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침묵이 돌아온다. 나는 세입자를 걷어내듯 물리칠 수 없었던 부동산 소유주들의 천문학적인 보상금 요구와, 금융위기 속에 쌓여간 은행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퇴각하거나 쓰러진 개발사들의 최후에 대해 들려준다. 섬뜩한 말투로 덧붙인다. 할 수만 있다면 그 회사들은 부동산 소유권까지 깡그리 밀어버리길 바랐을걸. 그럴 수 없어서 그곳은 주차장이 되었다. 아껴둔 표현은 마지막에 꺼낸다. 우리 시대에 무너진 바벨탑은 이것이다.

내 기억은 업데이트되지 않은 채로 9년간 머물렀다. 영화 〈두 개의 문〉으로 홍지유 감독과 함께 용산 참사를 기록했던 김일란 감독은, 이번에는 이혁상 감독과 함께 연출한 〈공동정범〉으로 더 멀리 나아갔다. 〈공동정범〉은 내 기억이 전혀 미치지 않는 곳까지 나아간 영화다. 이 영화가 나아간 자리의 기억을 부분이나마 공유한 사람들은 불타는 망루 안에서 살아남은 철거민들 각각뿐이다. 진실을 몸으로 겪은 사람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목소리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는다. 관객의 추론과 상상력에 더 의존한다.

이 영화는 아주 위험하다. 저물어버린 권력에게 위험하지 않고, 순수한 악과 순수한 정의를 믿어왔던 선량한 시민들에게 위험하다. 영화는 꾸미고 숨기지 않는다. 생존자들의 증언 속에서 치명적인 기억의 불일치를 끄집어낸다. 죄책감과 후회의 눈물 속에 무시무시한 행간을 심어놓는다. 과거를 합의로 도출해야 하는 생존자들 사이의 갈등은 공포영화의 감각을 자아낸다. 그들은 권력뿐만 아니라 서로를 의심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도 더 이상 나를 믿을 수 없다. 내 기억은 사회적 기억에 의존했다. 그런데 망루 바깥에서 형성된 사회적 기억은 어디에 의존해왔는가? 충격을 소화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는 관객이 나온다. 〈공동정범〉은 기억보다 오래된 일을 눈앞의 기록으로 엮어냈다.

ⓒ㈜엣나인필름 제공이혁상·김일란 감독(왼쪽부터)이 연출한 영화 〈공동정범〉은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관객의 추론을 이끈다.
형량은 나눠 든다고 분할되지 않는다

〈공동정범〉은 생존자들에게 ‘공동정범’의 책임을 묻지 않고 ‘공동정범의 논리’에 책임을 묻고 있다. 화재가 일어나 사람들이 죽었다. 누군가는 잘못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잘못이 없을 수도 있다. 증거가 불충분하다. 망루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검찰은 편리한 방법을 택했다. 망루의 생존자들을 가리지 않고 공동정범으로 기소했다. 진실을 기억 속에 가둬버렸고 철거민들이 법적 책임을 나눠 들게 했다. 형량은 나눠 든다고 분할되지 않는다.

1997년 서울 이태원의 한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서 미국인 두 명에게 한국인 대학생이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둘 중 한 명은 범인인데 누가 범인인지 몰랐다. 검찰은 공동정범의 논리를 구성할 수가 없었다. 진범과 함께 무고한 죄인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만들어낸 딜레마였다. 검찰이 미적대는 동안 진범은 미국으로 도주했다. 이른바 ‘이태원 살인 사건’이라 불린다. 그러나 검찰은 관대할 정도로 섬세한 기소 판단력을 용산 참사 사건에서는 보여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현장에 있었다면 똑같이 유죄였다. 철거민들은 ‘공동정범의 논리’ 자체가 정치적 처벌이었다고 믿는다. 형기가 끝난 지금도 그들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원망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영화는 ‘공동정범 논리’의 화살로 다른 과녁까지 겨눈다. 용산 참사 진압은 망루가 설치된 지 하루가 채 못 되어 집행되었다. 어떤 교섭도 없었다. ‘테러 진압’ 목적으로 투입되도록 법이 규정한 경찰특공대가, 공식적인 출동명령을 받기도 전에 출동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작전 책임자인 김석기 서울지방경찰청장을 경찰청장에 내정한 다음 날이었다. 신속한 진압 명령이 떨어졌고, 목표 달성이 완벽했던 나머지 위험 상황에서의 퇴각 전술을 검토할 새가 없었다. 범죄와 함께 범죄 혐의자들이 현장에서 제거되었다.

공동정범의 논리로 철거민들의 삶을 붕괴시켰던 검찰은 진압 명령권자들에게 아무런 공동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용산 참사 재판이 법원에서 진행되는 동안 법조인과 시민들로 구성된 모의 법정이 개설되었다. 시민들은 검찰이 기소하지 않았던 이명박 전 대통령과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살인·상해 및 교사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지를 검토했다. 시민배심원단은 압도적 표결로 두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이 시민 모의 법정의 판결은 소꿉장난 취급을 받았다.

잃어버린 기억이 달처럼 떠오르는 계절이 왔다. 〈공동정범〉의 마지막 장면은 이 전 대통령이 웃으며 남긴 말이 장식한다. “적폐 청산이 아니라 정치적 보복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그걸 보복이라 부른다면 나는 여전히 그 시작을 기억하지 못한다. 색깔을 입힌다면 불과 같은 빨간색이길 원한다.

기자명 손아람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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