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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 비키니 굴레를 벗은 사령관

중림로 새우젓 (팀명) webmaster@sisain.co.kr 2018년 01월 11일 목요일 제5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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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 피셔에게 “당신에게 <스타워즈>는 어떤 의미입니까?”라고 질문을 한다면 무슨 대답이 돌아올까. 구체적인 문장을 떠올리긴 힘들어도 짐작은 할 수 있다. 아마 육두문자가 섞인 농담을 하면서 냉소적인 웃음을 날릴 것이다.

사람들이 <스타워즈:새로운 희망>(1977)의 레아 오르가나 공주에 대해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웃기는 헤어스타일이었다. 머리 양옆으로 머리카락을 동그랗게 만 모양은 ‘헤드폰 머리’라는 말을 들었다. 그 스타일을 한 이유가 조지 루카스 감독이 캐스팅 조건으로 내건 체중 감량에 실패해서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웃음거리가 되었다. 영화의 후속편이 나와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화제가 되었던 건 <스타워즈:제다이의 귀환>(1983)에서 입었던 금색 비키니였다.

캐리 피셔에게 <스타워즈> 시리즈는 큰 명성을 주었으나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이기도 했다. 레아 공주의 이미지를 벗으려 해도, 사람들은 금색 비키니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사이 캐리 피셔의 인생은 빠르게 망가져갔다. 현실도피를 하려고 손댄 마약은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그를 무너뜨렸다. 꾸준히 영화 활동을 했으나 <한나와 그의 자매들> (1986) 정도를 제외하면 기억에 남는 작품이 없었다. 그렇게 캐리 피셔는 사람들에게서 잊혀가는 듯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캐리 피셔의 이름이 세간에 다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재밌게도 배우로서가 아니었다. 캐리 피셔는 자신의 마약중독과 재활에 대한 책들을 출간했고, 문제가 있는 영화 대본을 고쳐주는 ‘대본 교정가’로 활동하면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우일 그림
재기에 성공한 캐리 피셔는 미디어를 통해 <스타워즈> 시리즈에 대해 애증 어린 농담들을 하기 시작했다. 조지 루카스 감독이 했던 “우주에서는 브래지어를 입지 않는다”라는 말을 두고 “브래지어로 목을 매 자살하고 싶었다”라고 했다. 레아 공주에 대해서는 “일차원적이고 흰색을 좋아한다는 것만 확실한 인물”이라고 혹평했다. “왜 레아 공주는 광선검이 없는가?”라는 질문에 “우주에서조차도 이중 잣대가 존재한다”라고 뼈 있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니 새 <스타워즈> 시리즈에 다시 출연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이 영화 시리즈에 캐리 피셔는 무슨 생각으로 다시 나오겠다고 한 것일까. 놀랍게도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의 레아 오르가나는 더 이상 공주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저항군의 리더이자 장군이었다. 젊은 시절 성질은 누그러지고 현명함을 갖춘 레아 오르가나 장군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작품의 진짜 주인공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가장 단단한 존재

“시대가 변해서 자연스럽게 관점이 달라졌다”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레아 공주의 캐릭터가 변한 데는 캐리 피셔의 힘이 가장 컸다”라고 했을 때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긴 세월 자신을 괴롭혔던 이 캐릭터에서 벗어나보려고도 했고 거친 농담으로 지워보려고도 했지만, 캐리 피셔는 레아 공주를 버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이 레아 공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금색 비키니를 입은 성적 환상 속 대상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닥을 치고 올라온 캐리 피셔가 아니었다면 레아 오르가나는 여전히 공주로 남아 있었을 게 분명하다.

얼마 전 개봉한 <스타워즈:라스트 제다이>의 레아 오르가나 장군은 이제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가장 단단한 존재가 되었다. 3부작 중 마지막 한 편이 남았는데 과연 레아 오르가나 장군 없이도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캐리 피셔가 이 말을 들었다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겠지. “그 대본, 내가 쓸 만하게 고쳐줄까?” 2016년 12월27일, 캐리 피셔가 가운뎃손가락을 날리며 은하계의 별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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