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50년 세월이 만든 문학의 전경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2018년 01월 10일 수요일 제538호
댓글 0
<중국인 거리>를 처음 읽었던 날의 ‘사로잡힌’ 기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버짐 핀 아홉 살짜리가 되어 할머니도, 엄마도, 매기 언니처럼도 살고 싶지 않은 주인공의 마음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연민도 기만도 없이, 성장하는 여성의 이야기가 담긴 <중국인 거리>는 내가 처음 만난 페미니즘 소설이었다.

<오정희 컬렉션>(전 5권)
오정희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이후 수업에 들어갔을 때 교수는 이렇게 강의를 시작했다. “이 펜을 만든 이유가 뭘까. 귀를 파려고 만든 건 아니겠지. 마이크로 등을 긁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려고 만든 건 아니지. 인간이 만든 모든 물건은 만듦에 목적이 있다. 존재 그 자체가 목적을 포함하고 있다. 문제는 인간은 어떤 존재냐는 것. 목적이 뭐지? 여기서 실존주의가 나타난다. 즉, 인간만이 실존적 존재다.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정한다.” 나는 그 교양 수업을 녹취해 붙잡아뒀다. 2008년 겨울의 일이다. 이후 뒤늦게 만난 오정희의 작품을 게걸스럽게 따라 읽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는 더 많은 ‘여성’ 작가가 필요했고 또 필요하다.

지난 12월15일 등단 50주년을 맞은 오정희 작가의 소설 컬렉션이 출간됐다. 새 판본을 준비하며 작가는 가까이는 10년, 멀게는 40년 만에 다시 교정지를 펼쳐들고 문장 앞에서 골몰했다. 더러 다듬고 바로잡았다. 소설집 <불의 강>과 <유년의 뜰> 및 <바람의 넋> <불꽃놀이>를 비롯해 첫 경장편소설 <새>까지 모두 다섯 권이 새 옷을 입었다.

오정희 작가에게 지난 50년은 예술과 생활의 균형을 잡기 위해 애썼던 날들이었다. 그 속에서 망설임이 많았음은 말하지 않아도 헤아려지는 무엇. 출판사가 공개한 북 트레일러 속에서 흰머리 소복한 모습의 오 작가는 젊은 여성들에게 당부한다. “작은 실패에 너무 좌절하지도, 작은 성공에 너무 연연하지도 마라. 때때로 정말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거 같은 결단이 인생에서는 필요할 때도 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살자.”
<저작권자 ⓒ 시사IN (http://www.sisai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