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살아 있고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것 이상을 원한다는 게 무엇인지, 여전히 마음속에 뭔가를 간직한 사람으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사람의 얼굴을 사랑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무엇보다 희망이란 무엇인지 세사르 바예호의 시집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그러나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 그저 하는 일이라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음습한 포유동물/ 인간이 때로 슬픔에 잠겨/ 울고 싶어 하며 자신을 하나의 물건처럼/ 쉽사리 내팽개치고/ 훌륭한 목수도 되고, 땀흘리고, 죽이고/ 그러고도 노래하고 밥먹고 단추 채운다는 것을/어렵잖게 이해한다고 할 때/ 인간이 진정/ 하나의 동물이기는 하나, 고개를 돌릴 때/ 그의 슬픔이 내 뇌리에 박힌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내가 사랑함을 알고/ 사랑하기에 미워하는데도/

인간은 내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할 때/ …손짓을 하자 내게/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세사르 바예호 지음 고혜선 옮김다산책방 펴냄
온다/ 나는 감동에 겨워 그를 얼싸안는다/ 어쩌겠는가? 그저 감동, 감동에 겨울 뿐…”(〈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의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중에서)

시집 제목처럼 인생이 싫은 날이 올해도 몇 번이나 있었다. 사망한 제주도 특성화고 이민호군이 혼자 기계에 목이 눌려 있던 20여 분과 참으로 쓸쓸한 장례식장, 그리고 이군의 과실로 죽었다는 것을 명시한 서류를 들고 장례식장에 온 업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생이 참 싫었다. 그러나 다시 바예호를 생각했다. 그의 슬픔이 나의 슬픔보다 낫기 때문이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이지 팔짱 끼고 구경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과 타인의 슬픔을 뇌리에 박을 줄 아는 존재라는 것과 그리고 저절로 다시 힘을 내는 게 아니라 ‘어쩌겠는가’ 어쩔 수 없이 다시 힘을 내는 존재라는 것, 힘겹게 다시, 겨우겨우 다시, 그렇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다시 힘을 내는 존재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세사르 바예호는 ‘일용할 양식’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문이란 문은 모두 두드려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안부를 묻고 싶다./ 그리고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돌아보고 모두에게 갓 구운 빵조각을 주고 싶다…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나 대신 가난한 이가 커피를 마시련만.”

그의 꿈보다 더 나은 것은 없어 보인다. 세상을 다시 만들어주고 싶은 꿈이기 때문이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당신들에게 세상을 다시 만들어주고 싶다. 추운 방에 온기를, 어두운 방에 빛을, 꽁꽁 언 손에 내 손을.

기자명 정혜윤 (CBS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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