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 제공그리스 선박 엘피다호 선원들이 표류하던 스텔라데이지호의 필리핀 선원 2명을 구조하고 있다.

 

“PD님이 그곳에 가주시면 안 돼요?” 자매가 간절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그 물음을 듣는 순간 어쩔 수 없이 ‘가야겠구나’ 생각했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우루과이. 우리에게는 축구와 우루과이라운드 정도로만 알려진 남미의 그 우루과이였다. 한국에서 정확히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대척점에 있는 머나먼 나라이다. 내게 그곳에 가달라고 부탁한 자매는 스텔라데이지호 실종 선원 가족이었다. 스텔라데이지호는 지난 3월26일 승무원 24명과 철광석 26만t을 싣고 브라질 구아이바 항에서 출발했다. 기착지는 중국 칭다오였다. 출발 5일째인 3월31일, 한국 시각으로 밤 11시20분 남대서양 해역에서 침몰했다. 배에 타고 있던 한국인 선원 8명과 필리핀인 선원 14명이 실종되었다. 필리핀 선원 2명이 겨우 구조되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한 뒤 곧바로 청와대에 민원을 넣었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1호 민원’이었다. 지난 5월20일 하승창 청와대 사회혁신수석이 실종자 가족들을 직접 만나 추가 수색을 약속했다. 곧바로 수색선 한 척이 긴급 투입되기도 했다. 하지만 실종자 가족들은 여전히 서울 광화문광장에 있다. 내게 우루과이행을 부탁한 두 자매는 실종된 허재용 2항해사의 누나인 허영주·허경주씨였다. 그들은 광화문 세월호 천막 한쪽에 자리 잡은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대책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연합뉴스5월10일 허경주(왼쪽)·허영주 자매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할 서한문을 들고 청와대로 향하고 있다.

 

나를 우루과이로 떠민 건 언론인으로서 ‘면피’ 의식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 국민이 실종된 사건 현장을 직접 취재한 언론사가 단 한 곳도 없었다. ‘가능하면 피하고 싶다. 하지만 기자들이 아무도 현장에 가지 않았다면 나라도 가야 하는 거 아냐?’라는 물음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실종자 가족들과 이야기를 해보니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 보였다. 왜 이들은 정부 발표를 신뢰하지 않을까? 그 불신의 뿌리도 확인하고 싶었다. 취재를 떠나기 전 나는 자매에게 “가도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사전 취재를 해보니 우루과이 언론도 스텔라데이지호 사건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알고 지내던 내 우루과이 취재원들조차 침몰 사건을 몰랐다. 스텔라데이지호 사고 현장은 우루과이에서도 3000㎞ 가까이 떨어진 망망대해였다. 엄밀히 말하면 우루과이가 사고 현장이 아니었다.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고의 구조 주체국이 우루과이일 뿐이었다. 허영주·허경주씨는 “우리는 선사와 정부한테 정보를 듣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믿을 수 없다. 우루과이 현지 정보를 직접 듣고 싶을 뿐이다”라고 부탁했다.

스텔라데이지호의 선사는 부산에 있는 폴라리스쉬핑이다. 사고 직후부터 폴라리스쉬핑은 선박에 구조적인 결함은 없다고 주장했다. 선박 검사기관인 한국선급도 정상적으로 검사를 통과했다며 심사 과정에 문제가 없었다고 밝혔다. 부산해경은 지난 5월25일 폴라리스쉬핑을 압수수색한 데 이어 6월29일 한국선급도 압수수색했다.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길이 311.89m, 선폭 58m로 축구장 3개 면적을 합친 크기의 거대한 스텔라데이지호가 어떻게 순식간에 침몰했을까? 선사는 이에 대해 정확히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원인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런 궁금증을 잔뜩 안고 지난 9월11일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로 향했다.

■ “배가 두 동강이 났다고요?”

늦여름에 출국했는데 도착한 우루과이는 겨울의 끝자락이었다. 강한 바람과 추위가 나를 맞았다. 내가 먼저 찾아간 곳은 우루과이 방송사 ‘채널 5’였다. 지난 뉴스를 검색해보니 스텔라데이지호 사건에 대한 단신을 두 번 보도했다. ‘스텔라데이지호가 침몰했고 우루과이 해군이 구조 대책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뉴스를 보도한 기자를 찾았다. 그는 자기가 그 기사를 썼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했다. 그 후 나는 우루과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엘파이스〉 신문사를 찾아갔다. 1918년 창간한 〈엘파이스〉는 우루과이 최대 일간지다. 스텔라데이지호 기사를 쓴 기자를 찾았다. 카멜리아 벨트랑이라는 젊은 여기자였다. 그녀는 지난 신문을 일일이 뒤적이며 자신이 쓴 기사를 보여주었다. 〈엘파이스〉에서도 기사가 두 번 나왔다. 이 신문 기사도 채널 5의 보도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벨트랑 기자에게 기사의 ‘소스(취재원)’가 누구인지 물었다. 그녀는 “우루과이 국방부(해군)에서 준 자료를 받아썼다. 독자적으로 직접 취재한 내용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내게 우루과이 기자협회를 소개해주었다.

ⓒ김영미 제공우루과이 기자협회 소속 기자에게 스텔라데이지호 사건을 취재 중인 김영미 PD.

우루과이 기자협회는 과거 군사독재 시절 ‘언론 자유’를 외치며 결성되었다. 민주화에 기여하면서 기자협회는 지금도 정치적 영향력이 크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사건을 아는 기자들이 거의 없었다. 우루과이 일간지 〈엘옵세르바도르〉의 다니엘 리마 기자는 “너무나 먼 바다에서 벌어진 일이라 뉴스가 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중요한 한 가지 정보를 얻었다. 우루과이 선원 노동조합을 찾아가면 누군가 스텔라데이지호 사건을 알 것이라고 했다. 물어물어 몬테비데오 항구 인근에 있는 선원 노조 사무실을 찾아갔다. 때마침 점심 식사 중이라 노조원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내가 스텔라데이지호에 대해 묻자 일부 선원들이 안다고 했다. 조합원인 소사 에티토 씨는 “그 선박이 침몰했다는 소식을 바다에서 고기 잡다가 무선 라디오로 들었다. 무척 큰 배가 순식간에 침몰했다고 해서 우리도 이상했다. 우루과이 선원들 사이에서 ‘스텔라데이지 미스터리’라 부른다”라고 말했다. 그는 내게 두 손을 모았다가 뭔가 부러지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배는 두 쪽으로 부러졌다. 그 큰 배가 왜 두 동강이 났을까 궁금하다.” 배가 두 쪽으로 부러졌다고? 처음 듣는 말이었다. 취재 오기 전 가족대책위원회에서 받은 자료 등을 살펴보며 사전 취재를 꼼꼼히 했다. 그동안 스텔라데이지호는 ‘2번 도크’에 생긴 크랙으로 침수되어 한쪽으로 기울어 침몰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가 두 동강이 났다는 증언은 그 어디에서도 접하지 못했다. 한국에 있는 허영주·허경주씨에게 국제전화를 했다. “배가 두 쪽으로 갈라졌어요?”라고 나는 물었다. 허영주씨는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우리 가족들은 정부나 선사한테 배가 두 쪽이 났다는 말을 전혀 들은 바가 없다”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우루과이 선원들에게 배가 두 동강 난 사실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물었다. 카를로스 선원 노조 조합장은 “우루과이 해경과 해군에서 발표한 내용이다”라고 답했다. 우루과이 해군이 낸 보도자료를 찾아보니 정말 그 증언과 일치했다.

ⓒ김영미 제공우루과이 선원 노조 카를로스 조합장은 “스텔라데이지호는 두 동강이 났다”라고 말했다.

 

막막하게 시작한 취재 일정 가운데 첫 진전이었다. 선원의 증언과 우루과이 해군 보도 자료에 따르면 스텔라데이지호는 한쪽으로 기울어 침몰한 게 아니었다. 두 동강이 나서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선박 자체의 결함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결함이 아니라면 멀쩡한 배가, 그것도 한두 번 항해한 게 아닌 배가 왜 두 쪽으로 쪼개졌을까? 다시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 생존 선원을 구조했던 배를 찾아라

스텔라데이지호는 건조된 지 25년 된 노후 선박이다. 이 배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1993년 건조되어 15년간 유조선으로 항해를 했다. 2000년대 들어 잇단 유조선 사고에 따른 기름 유출로 해상 환경오염이 심각해지자 외벽이 한 겹으로 된 단일 선체(Single Hull) 유조선 퇴출 정책이 전 세계적으로 시행되었다. 스텔라데이지호도 단일 선체 유조선으로 퇴출 대상이었다. 국제 해사기구의 해양오염방지협약(MARPOL)에 따라 1984년 이후 인도된 단일 선체 유조선은 2010년을 기해 모두 퇴출시키기로 했다. 2009년 폴라리스쉬핑은 스텔라데이지호를 사들여 중국에서 철광석 운반선으로 개조했다. 철광석 운반선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때였다.

 

원래 유조선이었던 스텔라데이지호는 2009년 중국에서 철광석 운반선으로 개조되었다.

3월31일 침몰 당시 스텔라데이지호 한국인 선장 조 아무개씨는 선사인 폴라리스쉬핑에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틀린 맞춤법이 다급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긴급상황입니다.’ ‘본선 2번 포트 물이 샙니ㅏ.’ ‘포트쪽으로 긴급게’ ‘ㄱ울고 ㅣㅆ습니다.’ 배가 두 동강이 난 상황을 더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심해에 가라앉은 스텔라데이지호를 육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었다. 사고 선박에서 구조된 필리핀 선원 2명이 떠올랐다. 이들에게 사고 당시를 물어보면 스텔라데이지호의 침몰 상황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고 당시 스텔라데이지호에는 30인승 구명정(동력이 있는 보트) 2척과 16인승 구명벌(동력이 없는 보트) 5척이 탑재돼 있었다. 구명벌에는 16명이 사흘간 먹을 수 있는 식량이 구비되어 있다. 스텔라데이지호 사고가 난 다음 날 4월1일 그리스 선박인 엘피다호는 사고 지역 인근에서 구명벌 한 척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필리핀 선원 두 명이 타고 있었다.

엘피다호의 선원들은 두 선원을 구조하며 영상을 촬영했다. 허영주·허경주씨가 SNS를 뒤져서 엘피다호의 선원들을 찾아냈고, 몇 달간 그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알아낸 사실이다. 나는 즉각 이들 생존 선원과 엘피다호의 행방을 찾아 나섰다. 생존 필리핀 선원은 선사와 한국 해경 조사에만 응했다. 필리핀으로 돌아간 이들은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대책위원회가 연락을 해도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이들을 구조한 엘피다호는 항해 중이었다. 또다시 막막했다. 다행히 엘피다호가 아르헨티나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인접 국가이다. 나는 여차하면 아르헨티나로 떠날 준비를 했다.

■ 마침내 구한 동영상 속에 드러난 진실

지난 9월 말 엘피다호의 아르헨티나 입항 날짜가 확정되었다. 허영주·허경주씨는 엘피다호 선원과 연락해 내가 구조 당시 영상을 받으러 간다고 그들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나는 즉시 아르헨티나로 이동했다. 아르헨티나 제일 큰 항구 쪽에서 기다렸다. 내 예상과 달리 엘피다호는 내륙수로 역할을 하는 파라나 강으로 입항했다. 다시 알아보니 엘피다호의 최종 기착지는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북서쪽으로 약 300㎞ 떨어진 산타페 주의 산로렌조라는 곳이었다.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광활한 초원지대 팜파스를 건너서 아르헨티나 제3의 도시 로사리오를 지나 산로렌조에 도착했다. 여기서 엘피다호를 어떻게 만날지도 막막했다. 항구는 경계가 삼엄했다.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그런 항구가 아니었다. 취재 허가를 받기가 힘든 곳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헛걸음을 할 순 없었다. 허씨 자매와 접촉한 엘피다호의 한 선원이 간장약을 사달라고 했다는 부탁이 생각났다. 그 약을 구해서라도 선원들을 접촉해볼 작정이었다. 그 약은 일반 약국에서 팔지 않았다.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며 간신히 약을 구했다. 항구 관할 경찰서에 가서 엘피다호가 어디로 도착하는지 물었다. 아르헨티나 경찰은 엘피다호가 항구 6터미널에 다음 날 도착할 예정이라고 알려주었다.

ⓒ김영미 제공
ⓒ김영미 제공사고 다음 날 그리스 선박 엘피다호에 의해 구조되고 있는 스텔라데이지호의 필리핀 선원들.

 

이튿날 호텔에서 일어나자마자 망연자실했다. 폭풍이 몰아쳤다. 나무가 쓰러질 정도로 바람이 거셌다. 이런 날씨에 엘피다호가 입항할 수 있을까? 역시 폭풍 때문에 항구에 배를 댈 수 없었다. 엘피다호는 항구 근처에서 날씨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했다. 나도 날씨가 좋아지기만 기다렸다. 그렇게 닷새를 또 기다렸다. 드디어 엘피다호가 입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른 새벽 항구로 달려갔다. 엘피다호는 그리스 선박이어서 선장의 동의가 있어야 승선할 수 있었다. 취재를 하려면 항구 관할 경찰서의 신원보증도 받아야 했다. 나는 경찰서에 가서 하소연을 했다. 스텔라데이지호 사연을 설명하고 “한국에서 저 배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다”라고 사정했다. “한국 선원들이 왜 실종되었는지 그 진실을 알고 싶다. 꼭 엘피다호에 들어가게 해달라.” 경찰관은 내 이야기를 듣고 “나도 내 조카를 선박 사고로 잃었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공감한다”라며 신원보증서를 써주었다. 가족을 찾는 마음은 비슷한가 보다. 항구 관계자를 통해 엘피다호에도 연락을 했다. 엘피다호 선장도 승선을 허락했다.

항구 안으로 들어가 한참을 걸어가니 저 멀리 그리스 깃발을 단 엘피디호가 보였다. 내 관심은 오로지 구조 당시 촬영했다는 그 영상뿐이었다. 엘피다호 선장은 필리핀 사람이었다. 그는 스텔라데이지호 선원 구조 장면이 담긴 영상을 내게 넘겨주었다. 나는 선원의 노트북으로 영상을 확인하며 어떤 내용인지 물어보았다. 선장은 구조된 선원들이 “‘배가 Y자로 두 동강이 나서 침몰했고 침몰 당시 흘러나온 철광석으로 바닷물이 갈색이었다’고 말하고 있다”라며 동영상 장면을 설명해주었다. 선장은 구조된 선원들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데려다주었고 그때 선사와 한국 외교부가 그들을 헬기로 이송해갔다고 말했다. 두 번째 진전이었다. 배가 두 동강이 난 사실은 이제 증명이 된 셈이다. 그 영상을 받아 나는 다시 우루과이로 돌아왔다. 한국에 있는 스텔라데이지호 가족대책위원회에 보내 번역을 부탁했다. 선원들의 말이 필리핀 지방 방언이라 여러 절차를 거쳐 한국어 번역이 완성되었다. 선원들의 영상에서 나오는 증언은 아주 구체적이었다(이 영상은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일부 공개되기도 했다).

 

ⓒ김영미 제공실종된 필리핀 선원 2명을 구한 엘피다호가 아르헨티나 산로렌조 항구에 정박해 있다.

나는 엘피다호에서 구한 영상에 나오는 생존 선원의 증언을 토대로 침몰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영상에 담긴 필리핀 생존 선원인 호세 씨의 증언이다. “3월31일 점심을 먹고 난 후 배가 엄청난 굉음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모든 선원들은 브리지(선교)로 집합하라’는 선장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나는 페인트칠을 하고 있다가 브리지로 달려갔다. 브리지에 도착하자 다른 선원들이 모두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다. 배는 계속 좌현으로 기울고 있었다. 항해사는 어디론가 ‘메이데이! 메이데이!’라고 구조 요청을 했다. 기관장은 브리지 문을 붙들고 있었다. 선장의 얼굴은 검은빛이었다. 그러던 중 굉음과 함께 갑판에서 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나는 세탁기 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구명조끼의 부력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고 주위를 둘러봤을 때 배는 이미 침몰하고 보이지 않았다.”

■ 구명벌 사진의 미스터리

이 증언대로 선원들이 구명조끼를 모두 입었다면 분명 부력으로 떠오른 이들이 더 있었을 것이다. 그들도 탈출해 구명벌에 올라탔을 가능성이 있다. 그때 나는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이 가장 찾고 싶어 하는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바로 미군 초계기가 촬영했다는 구명벌로 추정된 사진이다. 미국은 최신예 대잠 초계기인 보잉 P-8A 포세이돈을 사고 현장에 보내 수색을 지원했다. 4월9일 미군 초계기는 구명벌로 추정되는 물체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는 문서에도 적시되어 있다. 우루과이 해안구조센터(MRCC) 상황보고서에는 “미군 초계기가 구명벌(life raft)을 발견했다(AIRCRFT P8A FINDS LIFERAFT IN POSITION LAT 33° 06S LONG 018° 20W)”라는 문구가 담겨 있다. 미군이 우루과이 MRCC에 보낸 원문 전문도 입수했다. 전문에는 “우리는 처음 구명벌로 생각했는데, 착륙 뒤 살펴보니 기름띠일 수도 있다. 구명벌로 확정할 수 없으니 정밀 분석이 필요하다”라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 기상 악화로 미군 초계기는 추가 수색에 나서지 못했다. 그다음 날에야 미군 초계기가 다시 수색에 나섰다. 실종자 가족들은 미군 초계기가 찍은 구명벌로 추정된 곳에 생존 선원 일부라도 살아 있으리라 기대했다. 만약 미군이 발견한 게 구명벌이라면 지금까지 찾지 못한 구명벌 한 척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 외교부도 ‘4월10일(월) 우루과이 MRCC로부터 미 P8 촬영 사진 확보 예정’이라는 문건을 가족들에게 전달했다.

가족들은 미군이 찍은 이 사진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외교부보다 선사인 폴라리스쉬핑이 먼저 움직였다. 선사는 언론사에 ‘미 해군이 찍은 사진은 구명벌이 아니고 기름띠 사진으로 확인됐다’는 보도 자료를 뿌렸다. 여러 언론이 이 보도 자료를 베껴 썼다. 한국 언론은 미군 초계기가 찍은 구명벌 추정 사진을 사실상 기름띠로 확정했다고 보도해버렸다.

실종자 가족대책위원회는 이때를 스텔라데이지호 사건에서 아주 중요한 분기점으로 여긴다. 가족대책위원회 공동대표 허경주씨는 “기름띠로 밝혀졌다는 부산의 모 방송사 기사로 인해 사실상 스텔라데이지호 수색이 중지되었다. 이 일을 당하고 우리 가족들은 언론도 정부도 믿지 못하게 되었다. 그 사진을 찾아서 구명벌인지 기름띠인지 확실히 규명해야 선원들이 생존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다. 아직까지 외교부도 그 사진 자체를 입수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스텔라데이지호에 대한 수색은 5월10일 종료되었다. 통항 수색으로 전환되었다. 통항 수색이란 사고 지역을 지나가는 배가 육안으로만 살펴보는 것을 의미한다.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은 수색 재개와 미군 초계기 영상 및 사진 공개를 촉구하며 길거리에서 서명을 받고 있다.

한국 정부가 입수하지 못한 이 사진은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이 정부에 품는 불신의 시작이었다. 나는 우루과이 MRCC에 취재 요청을 했다. 이 사진이 실제로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취재 요청 자체를 거부하던 우루과이 MRCC가 내 취재에 공식적으로 응했다. 나는 집중적으로 이 사진에 대해 물었다. 우루과이 MRCC 소속 오캄포 대위는 “그 사진에 대해서는 일급비밀(confidential)이다. 그 사진을 보고 싶다면 미국 측에 요청하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사진은 존재하는가?”라고 물었고 오캄포 대위는 “사진은 존재한다. 하지만 나에게 묻지 말고 미군에 물어보길 바란다. 우리는 구조를 하는 게 임무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브라질에도 수색할 비행기를 요청했다”라고도 밝혔다.

ⓒ김영미 제공우루과이 해안구조센터(MRCC) 소속 오캄포 대위가 스텔라데이지호 구조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우루과이 시민사회가 보여준 연대

그렇다면 혹시 브라질 해군이 그 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브라질 해군은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당시 구조 작전에 참여했다. 나는 다시 브라질로 이동했다.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브라질 해군본부를 방문했다. 그들은 내게 스텔라데이지호 구조 작전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당시 구조 활동에 참여한 알렉산드로 함장은 “브라질 해군은 즉각 사고 해역에 전함을 보냈다. 그들이 사고 현장에 도착한 날은 4월6일이다. 그때부터 사흘간 사고 해역을 조사하고 생존 선원을 수색했다. 깨진 구명정 등 스텔라데이지호의 부유물을 가지고 귀환했다”라고 밝혔다. 또 브라질 공군 초계기가 사고 현장에 투입되었다는 점도 확인해주었다. 나는 미군 초계기 사진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미군한테 그 어떤 사진도 받은 바 없다”라고 말했다.

 

ⓒ김영미 제공스텔라데이지호 구조 활동에 나섰던 알렉산드로 함장이 당시 브라질 해군의 구조 작전을 설명하고 있다.

이제 미군 초계기 사진은 어디서 확인할 수 있을까? 궁리 끝에 나는 우루과이 정부에 정보공개를 요청하기로 했다. 우루과이는 군사독재 정권 시절인 1973~1985년 실종자가 많았다. 인권단체들은 군사정권 기간에 4700여 명이 체포돼 고문을 당했고, 이 가운데 200∼250명이 수감 중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실종자를 찾는 작업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시민단체들이 실종자를 찾는 과정에서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이 도입되었다. 

나는 ‘스텔라데이지호 구조 작전에 대한 모든 정보와 미군 초계기 사진 공개’라는 제목으로 우루과이 정부를 상대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의도하지 않게 이것이 ‘사건’이 되었다. 외국인이 실종자를 찾기 위해 정보공개 요청을 한 사례가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루과이 최대 일간지 〈엘파이스〉에서 인터뷰를 요청해왔다. 나는 인터뷰를 하면서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에 대해 설명했다. 그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서명을 받으며 재수색을 원하고 있고, 미군 초계기 사진을 구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취재를 하러 온 내가 거꾸로 취재를 당했다. 다음 날 내 인터뷰 기사가 나갔다. 내가 제공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서명받는 가족대책위원회 사진도 크게 실렸다. 우루과이 시민들은 올드 미디어인 종이 신문과 방송으로 대부분 뉴스를 접한다.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 사연을 담은 〈엘파이스〉 기사가 반향을 일으켰다. 시민들이 나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국회나 정부 청사에 가도 스텔라데이지호에 대해 점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늘었다. 특히 정보공개 운동을 전문으로 하는 ‘카인포’라는 우루과이 시민단체에서 나를 돕겠다고 연락해왔다. 카인포 간사인 페르난도 올리비에 씨는 “국적에 상관없이 실종자를 찾기 위한 정보공개이니 돕겠다. 우리 단체에서 스텔라데이지호 사건을 전담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제 스텔라데이지호 실종 선원들도 그들의 ‘실종자’ 범주에 포함된 것이다.

ⓒ김영미 제공우루과이 대표 신문 〈엘파이스〉에서 스텔라데이지호 사건과 실종 선원 가족의 활동을 기사화했다.

우루과이 국회도 내 정보공개 요청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처음 현지 취재에 나설 때만 해도 국회에 가면 하루 종일 기다리는 게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들이 먼저 우루과이 국회 출입기자로 등록시켜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그래야 취재가 더 용이하다고 했다. 급하게 한국에 있는 〈시사IN〉 편집국에 공문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한국 취재진으로서는 처음으로 〈시사IN〉 소속의 우루과이 국회 출입기자가 되었다. 우루과이 국회도 우리와 비슷한 국정감사 기간이 있다. 국방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내 취재에 관심을 보였다. 의원들은 정보공개 요청도 돕겠다고 했다. 특히 우루과이 첫 여성 부통령에 오른 루시아 토폴란스키 상원의원이 관심을 나타냈다.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으로 유명한 호세 무히카 전 우루과이 대통령의 부인이다. 나는 그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고 흔쾌히 응했다. 토폴란스키 부통령은 인터뷰에서 “한국인 선원 실종자 가족들이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기회가 된다면 부통령으로서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도 꼭 만나고 싶다”라고 약속했다. 우루과이 선원 노조에서도 정보공개 결과를 지켜보겠다고 연락이 왔다. 선원 노조 조합장인 카를로스 씨는 “선원들은 국적을 막론하고 함께 느끼는 게 있다. 언제나 위험한 파도와 싸우면서도 가족들 곁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한국 선원도 우루과이 선원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라고 말했다. 내가 만난 우루과이 선원들은 스텔라데이지호 사건을 남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국적은 다르지만 그들도 누군가의 아들이자 아버지였다. 그들 역시 실종자 가족이 재수색을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런 선원들과 시민단체, 시민들이 스텔라데이지호 정보공개 요청에 힘을 보태는 인증샷을 찍는 데 흔쾌히 응해줬다.

 

ⓒ김영미 제공우루과이 선원 노조 조합원들과 시민단체 활동가 그리고 시민들이 스텔라데이지호의 재수색을 촉구하는 인증샷을 찍었다.

■ 안전검사 없이 출발할 수 있는 사설항

나에겐 또 하나의 의문이 있었다. 배가 두 동강이 날 정도로 결함이 있었다면 스텔라데이지호는 어떻게 브라질에서 출항 허가를 받았을까? 더구나 생존 필리핀 선원들은 “배가 출항할 때 이미 기울어져 출발했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나는 스텔라데이지호가 출발했던 브라질의 구아이바 항으로 향했다. 그 항구에 가서 스텔라데이지호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남쪽에 있는 구아이바 항까지는 차로 4시간 정도 걸렸다.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한 뒤에야 나는 항구로 가는 길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다. 브라질의 치안이 좋지 않아 밤마다 총소리가 들리고 강도가 극성이었다. 취재 자체가 위험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브라질 기자와 함께 작은 택시로 이동해 단시간에 취재를 끝낼 계획이었다. 택시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택시 기사들도 위험하다며 치안이 불안한 외곽 지역으로는 가지 않으려 했다. 호텔 앞에 서 있는 택시 기사들 한 명 한 명에게 물었다. 모두 손사래를 쳤다. 마지막에 서 있던 기사가 가겠다고 했다. 그는 나를 현장으로 안내할 ‘브라질판 택시 운전사’였다. 나는 ‘망가라티바’라는 작은 어촌에 도착했다. 거기서부터 섬인 구아이바 항까지 컨베이어 벨트가 연결되어 있었다. 컨베이어 벨트 위로 철광석이 이동했다. 구아이바 항의 정식 명칭은 ‘터미널 이하 구아이바(TIG)’였다. 나는 스텔라데이지호가 이곳에서 어떻게 출항할 수 있었는지 바로 이해했다. 항구가 섬에 있었고 그 섬은 세계 최대 철광석 공급업체인 브라질 발레(VALE) 사 소유였다. 그러니까 스텔라데이지호가 출발한 곳은 발레 사의 사설 항구였다. 사설 항구는 안전검사를 할 수 있는 시설도 인원도 따로 두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출항 전에 안전검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김영미 제공브라질 구아이바 항구에서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철광석을 싣고 있는 운반선.

사설 항구라니! 현장에 와보기 전까지 알지 못했다. 발레 사에 취재 요청을 했다. 발레 사는 항구 취재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배를 빌려 항구로 접근하기로 했다. 섬은 발레 사 소유이지만 바다는 그들의 소유가 아니어서 접근이 용이했다. 배를 빌리러 이리저리 알아보고 간신히 작은 낚싯배를 구했다. 배를 타고 항구 쪽으로 접근하자 스텔라데이지호와 비슷한 모양의 거대한 철광석 운반선이 눈에 들어왔다. 배는 항구와 약간 떨어져서 정박해 있었다. 철광석을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가 배 위에 맞닿아 있었다. 철광석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배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지난 3월26일 스텔라데이지호도 이렇게 철광석을 싣고 마지막 항해를 시작했을 것이다. 섬을 한 바퀴 돌고 있을 때 멀리서 대기 중인 또 다른 큰 배가 보였다. 철광석을 싣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배였다. 망가라티바 인근의 작은 어촌 주민들은 한 번도 외국 선원들이 마을로 내려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 호르헤 씨는 “항구에 들어오는 배는 2~3일 정도 머물다 떠난다. 선원들은 절대 배에서 내리지 않고 마을로 오지도 않는다. 철광석을 실으면 바로 떠난다”라고 말했다.

브라질 선원 노조를 방문했을 때 노조 간부인 엔리케 씨는 “브라질의 사설 항구는 외국 선박의 안전검사를 하지 않는다. 안전검사의 책임은 한국 선박일 경우 한국 측에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텔라데이지호 사건을 알고 있었다. 엔리케 씨는 “스텔라데이지호 사건은 브라질 선박 업계에도 충격을 주었다. 이 엄청난 사건이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것도 문제이다. 침몰 원인을 모른 채 그대로 두면 같은 사건이 또 벌어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브라질 발레 사는 전 세계 철광석 운반업계의 큰손이다. 발레 사가 철광석 운반선 운송 입찰을 할 때마다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해운업계가 경쟁을 벌인다. 대부분 10~20년간 수조원대 장기 운송 계약을 맺기 때문에 수주 경쟁이 치열하다. 스텔라데이지호 대신 다른 한국의 철광석 운반선이 그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 심해 3000m에 가라앉은 블랙박스

취재 막바지 우루과이에서 선박 전문가를 찾았다. 선박 엔지니어 로드리게스 씨에게 엘피다호에서 구한 영상의 생존 선원들 진술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렇게 큰 배는 원래 안전 대책이 이중 삼중으로 철저히 되어 있다. 배가 Y자로 두 동강이 나는 경우는 배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뜻이다. 노후한 배라서 균열이 있을 수 있고, 그 균열로 물이 들어와 철광석이 물을 먹고 점점 무거워져서 침몰했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로드리게스 씨는 “블랙박스를 찾아내 사고 원인을 밝혀야 한다. 침몰한 배와 블랙박스는 심해에 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추측에 불과하다. 과학적·체계적 분석을 해서 사고 예방을 하려면 블랙박스를 수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제2의 스텔라데이지호 사건을 막으려면 사고 원인을 규명해야 한다. 사고 선박의 블랙박스 분석이 필요한 이유다. 블랙박스를 분석해보면 스텔라데이지호 선원들의 탈출 여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국내 여론은 심해 3000m에 가라앉은 스텔라데이지호의 블랙박스 수거에 대해 부정적이다. 내가 취재를 오기 전 가족대책위원회 대표 허경주씨는 “정부 부처 관계자들은 ‘그렇게 깊은 심해에서 수색 장비를 이용한다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정말 건져 올릴 수 있는 기술이 없는지 궁금하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취재 과정에서 심해의 블랙박스를 수거한 사례를 확인할 수 있었다. 2009년 5월31일 승객과 승무원 228명을 태우고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프랑스 파리를 향해 출발한 에어프랑스 447편이 대서양 상공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테러와 비행기 기체 결함 등 여러 추측이 난무했다. 며칠 뒤 브라질 인근 해안에 떠오른 50여 구의 시신으로 비행기가 폭파되어 심해에 가라앉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프랑스 정부와 에어프랑스는 비행기 동체와 블랙박스 수색에 나섰다. 여객기가 추락한 지점은 수심이 3000∼6000m나 되었다. 수색이 난항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사고 뒤 2년간 수색 작업에 4000만 달러(약 426억원)를 썼다. 프랑스 정부는 ‘레모라 6000’이라는 로봇 잠수정까지 투입해 2011년 7월 심해 3900m 지점에서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40×20×20㎝인 블랙박스를 찾아냈다.

에어프랑스 447편 유가족협의회는 2년간 수색 과정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 과정이 궁금해 그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프랑스 남부 도시 오를레앙에서 에어프랑스 447편 유가족협의회의 필리프 링게 씨를 만났다. 그는 사고로 동생(파스칼 링게)을 잃었다. 필리프 링게 씨는 “당연히 유가족협의회가 정부를 상대로 끈질기게 수색을 계속해달라고 요구했다. 사람들은 내게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동생을 포기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김영미 제공에어프랑스 447편 유가족협의회 필리프 링게 씨가 사고 수습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2년 만에 찾아낸 블랙박스 분석 결과 사고 원인이 드러났다. 테러도 기체 결함도 아니었다. 조종사가 휴식을 취한 사이 부기장의 실수로 비행기가 추진력을 잃고 바다로 추락한 것이었다. 링게 씨는 “만약 블랙박스를 수거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기체 결함이라고 추측했을 것이다. 앞으로 또 벌어질 수 있는 사고도 방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사고 당시 국가와 언론을 믿었나?”라고 물었다. 링게 씨는 “당연히 믿었다. 우리는 우리 정부와 언론이 우리 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나는 내 동생이 왜 죽었는지도 알았고 유해도 찾았다”라고 말했다. 나는 “정부를 신뢰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그를 보며 한국의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이 떠올랐다.

11월17일 우루과이-아르헨티나-브라질-프랑스로 이어진 4개국 67일간 취재를 끝내고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현실은 그대로였다.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스텔라데이지호 실종자 가족들은 광화문 광장에서 여전히 수색 재개와 미군 초계기 사진 공개를 요구하는 서명을 받고 있었다. 허영주·허경주 자매는 블랙박스 수거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국회와 정부 부처를 뛰어다녔다. 하지만 2018년 예산안 국회 심의 과정에서 “타당성과 선례가 없다”는 이유로 전액 삭감되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여전히 정부와 언론을 불신하고 있다. 만약 나를 비롯한 언론인이 사고 초기 우루과이 현장 취재를 갔더라면 실종자 가족들의 불신이 이렇게 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언론인으로서의 ‘면피’ 의식 때문에 오늘도 나는 스텔라데이지호에 대한 취재를 계속하고 있다(우루과이 정부를 상대로 한 정보공개 청구는 12월15일 현재 결과를 통보받지 못했다).

ⓒ시사IN 이명익11월24일 스텔라데이지호 실종 선원 가족들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재수색 촉구 서명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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