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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환율조작국? 트럼프의 억지

2015년 미국 정부는 환율조작국을 구분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고안했다. 한국은 이 중 두 가지 조건에 해당한다. 기준은 철저하게 미국 중심적이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2017년 12월 26일 화요일 제53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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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부유한 상인 안토니오는 평소 경멸해온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돈을 빌린다. 담보는 자신의 살 1파운드. 돈을 갚지 못하자 샤일록은 안토니오를 법정으로 끌고 가서 계약을 이행하려 든다. 판사는 샤일록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이윽고 재판의 흐름을 뒤집고 만다. “계약서에 따르면, 담보는 살 1파운드로 한정되어 있다. 살을 베어내다 피까지 흘리게 되면 원고를 계약 위반으로 처벌한다.”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명판결’이다. 명판결이 아니라 억지라는 주장도 많다. 예컨대 금융기관의 압류로 채무 미상환자의 가정에 불행한 일이 생겨도, 해당 은행에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살을 벨 때 피가 흐르는 것은 계약 이행에 수반되는 필연적 현상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계약서에 명시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다.

<베니스의 상인>은 16세기 말에 나온 작품이다. 현대 국제사회에서도 ‘피 한 방울 흘리지 말고 살을 베어내라’는 식의 억지가 통한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다른 나라들에 대해 주장하는 ‘환율조작 금지’가 그렇다. 자칫 한국이 사실상의 첫 피해국으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른바 환율조작이란, 의도적으로 통화의 가치를 내려(절하시켜) 자국 상품의 수출경쟁력을 높이는 행위다. 1달러가 1000원이라면, 1만원짜리 한국 상품은 미국 시장에서 10달러로 팔린다. 그런데 한국 원화의 가치가 1달러에 2000원으로 떨어지면(1000원으로 사던 1달러에 2000원을 내게 되었으니 원화 가치가 하락한 것), 해당 상품의 가격이 5달러까지 떨어질 수 있다. 그만큼 미국 시장에서 한국 상품의 가격경쟁력이 강화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중국·일본 등이 의도적으로 자국 통화가치를 낮춰 미국 시장을 점거하는 바람에 자국 기업과 일자리에 치명적 피해를 끼쳐왔다고 주장한다.

ⓒReuter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중국·일본·타이완·독일·스위스를 환율조작 관련 ‘관찰 대상국’으로 분류했다.
문제는, 통화가치 하락의 원인과 경로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한국은행이 금리를 인하한다면, 국내 경제주체들이 적은 부담으로 쉽게 빌려 투자·소비하도록 만들려는 경기 부양 정책이다. 다만 높은 이자를 노리고 국내 은행의 계정에 머물렀던 자금들은 더 높은 금리를 보장하는 다른 나라로 떠나려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원화로 저축된 자금을 다른 고금리 국가, 예컨대 브라질 헤알화로 바꿔야 한다. 한국 원화를 팔아(원화 공급 증가) 브라질 헤알화를 사는(헤알화 수요 증가) 것이다. 결국 원화의 가치는 절하된다. ‘수출경쟁력 제고’가 아니라 단지 국내 경기 부양을 위한 금리 인하가 통화가치 절하로 이어지는 경우다.

일본 엔화는 아베 신조 총리가 취임한 2012년 말부터 현재(12월14일)까지 한국 원화에 대해 무려 26%나 통화가치가 떨어졌다. 한국 제품에 대한 일본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강화되었다. 엔화의 큰 폭 절하가 아베 총리의 양적완화 정책(엔화 공급을 무제한적으로 증가) 덕분이라는 사실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양적완화는 국내의 만성적 디플레이션(불황으로 물가가 인하되면서 불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상태)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국내 경기 활성화라는 ‘순수한’ 의도로 엔화를 풀었는데, ‘뜻하지 않게’ 통화가치가 내려갔다는 이야기다.

중앙은행이 외국 통화를 사들여도 자국의 통화가치가 떨어진다. 예컨대 한국은행이 외환시장에서 100억원으로 1000만 달러를 매입하면, ‘원화 팔아 달러 사자’라는 수요·공급 흐름에 따라 원화 가치가 떨어지고 달러 가치는 상승한다. 중앙은행이 사들인 달러는 이른바 ‘외환보유고’로 비축된다. 이에 따라 외환보유고가 많은 나라들을 ‘환율조작 상습범’으로 몰아붙이는 논리가 등장한다. 통화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외환을 대량 매입해왔으며, 그 증거가 바로 비대한 외환보유고라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중국·일본·타이완·독일·스위스 등 6개국을 환율조작 관련 ‘관찰 대상국(Monitoring List)’으로 분류해놓았다. 6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외환보유고를 가진 국가이다.

ⓒ연합뉴스
통화가치 하락의 원인과 경로는 매우 다양하다. 금리 인하도 통화가치 하락을 초래할 수 있다.
외환보유고가 많으면 ‘상습범’이라고?


그러나 손에 묻은 피를 살인의 증거로 단정할 수는 없다. 의사나 도축업자 혹은 큰 부상을 당한 사람들도 손을 피로 적실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많은 외환보유고 역시 ‘수출경쟁력을 위한 상습적 환율조작’ 혐의의 증거로 미흡하다. 미국 이외의 국가들은 달러를 충분히 보유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달러는 국제 거래와 결제에서 압도적 비중을 점한다. 모든 기업과 채권자들은 달러로 물품 대금이나 이자를 받고 싶어 한다. 한국과 중국 기업들도 원화나 위안화가 아닌 달러로 거래한다. 아무리 경제 기반이 튼튼한 국가라도 평소 달러를 의도적으로 쌓아놓지 않으면, 유사시에 해외 기업이나 채권자·주주 등에게 지급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이른바 국가부도 사태다. 한국만 해도 지난 1997년 IMF 환란을 겪으며 외환보유고를 충분히 쌓아둘 필요성을 혹독하게 절감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적하듯이, 미국 이외의 다른 국가들이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환율을 조작할 수 있다. 그러나 국내 경기 부양이나 외환위기 방지를 위한 노력의 ‘의도치 않은’ 결과가 통화가치 하락이기도 하다. 이를 어떻게 구분할까? 법률적으로 범죄가 성립되려면, 가해자가 그 범행을 의도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환율조작 같은 범죄의 경우, 의도를 입증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미국 정부는 2015년 이 무서운 국제범죄를 색출·처벌하기 위한 수사 방법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세 가지 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을 모두 충족하면 환율조작국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에 대한 무역흑자가 연간 200억 달러 이상인 나라다. 미국과의 상품 거래에서 상당한 흑자를 남긴다면 뭔가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둘째, 경상수지 흑자가 해당국 국내총생산(GDP)의 3% 이상인 경우다. 경상수지 흑자는, 한 국가가 다른 나라와의 모든 거래에서 벌어들인 순수익이다. ‘전체 살림살이(GDP)’에 필요한 돈 가운데 상당 부분을 외부에서 조달한다면 일단 수상쩍게 봐야 한다. 셋째, 중앙은행이 외환을 순매입(외환 매입액-외환 판매액)한 규모가 GDP의 2% 이상인 국가다.

이 기준들을 살펴보면 ‘새벽에 등산복으로 출현하고’ ‘정부에 불만이 많으며’ ‘갑자기 생활수준이 높아지는’ 등의 요건을 충족하면 간첩이라는 1970년대 한국의 간첩 식별 지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슬쩍 훑어보더라도 다른 나라와 많은 거래를 하는 국가라면, 오히려 걸려들지 않기가 어려운 기준들이다. 미국이 10월 중순에 발표한 환율 보고서(미국 재무부가 주요 무역 상대국의 통화가치와 변동, 환율조작 가능성 등을 분석해서 6개월마다 의회에 보고)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 12개월(2016년 7월~2017년 6월) 동안 220억 달러 규모의 대미 무역흑자를 냈다. 경상수지 흑자는 840억 달러로 한국 GDP의 5.7%다. 환율조작국의 두 기준을 충족시켰다. ‘다행히’ 같은 기간에 한국은행의 외환 순매입 규모는 약 50억 달러(GDP의 0.3%)로 기준(2%)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환율조작국이 아니라 ‘관찰 대상국’으로 분류되었다.

같은 기간에 중국은 3570억 달러의 대미 무역흑자를 거뒀다. 환율조작국 기준(200억 달러)의 약 18배다. 경상수지 흑자는 1550억 달러로 GDP의 1.3%에 불과했다. 더욱이 이 기간에 중국 인민은행은 ‘위안화로 사들인 외환’보다 ‘외환으로 사들인 위안화’가 3110억 달러나 더 많았다. 중앙은행은 외국 통화를 매입하는 방법으로 자국 통화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다. 반대로 이미 보유 중인 외환보유고를 털어서 자국 통화를 사들이는 경우도 있다. 자국 통화의 가치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인민은행은 2014년부터 의도적으로 위안화 절상을 추진해왔다. 미국의 지속적 압박(‘위안화 가치 절상하라’)도 중요한 이유이지만 이른바 ‘위안화 국제화’ 정책으로 인해 위안화 가치를 올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환율조작 부문의 챔피언(트럼프의 발언)”으로 불렸던 중국은 ‘환율조작 혐의’의 기준 세 개 가운데 하나만 위반한 우량한 국가로 탈바꿈했다.

ⓒAP Photo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운데)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 제4차 협상을 마치고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압박했던 중국은 ‘환율조작 혐의’ 벗어나


결과적으로 2017년 말 현재 3개 기준을 모두 충족시킨 공식적 환율조작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2개 기준을 초과한 나라는 한국·일본·독일·스위스 등 4개국이다. 환율조작 때문에 피해를 봐왔다고 믿는 미국의 산업협회, 시민단체, 일부 의원 등은 다른 나라들에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환율조작 기준을 강화해서 ‘범죄국’을 실제로 색출하자는 주장도 있다. 미국자동차협회의 경우, ‘6개월간 연속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외환보유 규모가 3개월간 수입물량 가치보다 높으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해서 제재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한국의 경우, 올해 평균적인 ‘3개월 수입 물량 가치’가 900억 달러를 조금 웃도는데 외환보유고는 4000억 달러에 근접해 있다. 미국자동차협회 기준으로 보면 꼼짝없는 환율조작국이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혐의 기준을 바꿔 환율조작국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글로벌 패권국인 미국으로서도 부담이 크다. 미국의 위협 때문에 국가경제 차원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자국 통화의 가치를 조절하지 못하게 된 나라들이 크게 반발할 것이다.

결국 미국 정부는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환율 관련 규범을 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게 된다. 일방적 환율조작국 지정과 비교하면 몇 가지 이점이 있다. 일단 자유무역협정은 상대국과 ‘대화’를 통해 만들어가는 형식을 띠기 때문에 ‘패권국의 횡포’라는 비난을 최소화할 수 있다. ‘환율조작은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에 반(反)한다’라는 이데올로기를 서서히 전파해나가는 데도 도움이 된다. 첫 시도가 2015년 말에 타결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이뤄졌다. 다만 절반의 성공이었다. 12개 TPP 회원국의 거시경제 정책당국이 모두 참여해서 ‘우리나라는 환율조작을 하지 않겠으며, 외환시장 개입(중앙은행의 외환 매입 등) 상황도 공개하겠다’라는 내용의 공동선언문을 발표한 것이다. 선언문은 문자 그대로 ‘말’에 불과하다. ‘환율조작 금지’가 회원국에게 구속력을 발휘하려면(환율조작에 따른 제재에 승복하려면), 협정문 본문에 공식적 조항으로 삽입되어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 역시 자유무역협정(FTA)의 틀에서 환율조작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TPP 당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협정문 본문에 관련 조항을 넣어 구속력 있는 규범으로 만들겠다는 적극적 의도다. 그 시험대가 바로 현재 진행 중인 북미자유무역협정(나프타·NAFTA) 재협상이다. 무역 전문지 <인사이드 유에스 트레이드>(11월17일)에 따르면,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이미 환율조작과 관련된 지침을 정해놓은 상태다. 우선 환율조작이 있을 경우 해당국 정부가 자국 기업들에게 지급한 부당한 보조금으로 간주해서 불이익을 주겠다고 한다. 만약 멕시코 정부가 환율을 조작했다면, 나프타 회원국인 미국과 멕시코 간에 적용되는 ‘특혜 관세’를 무효화하겠다는 것이다. USTR은 이런 ‘적절한 장치(appropriate mechanism)’를 선언문 따위가 아니라 나프타 협정문에 삽입하고 싶어 한다.

꿈을 꾸긴 쉽지만 그것을 이룰 세부 계획을 세우기는 힘들다. 지침을 세우기도 쉽지만 효과 있는 조항으로 구체화하기는 정말 어렵다. 예컨대 USTR의 ‘적절한 장치’로는 환율조작국에 실질적인 처벌을 가할 수 없다. 현재 나프타 회원국인 미국과 멕시코는 상당수의 제품을 무관세로 교역한다. 멕시코가 환율조작으로 나프타 특혜 관세를 적용받지 못하게 되면, 양국 사이의 관세는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으로 돌아간다. 문제는, 세계무역기구 규범에서 미국의 관세가 멕시코 관세보다 훨씬 낮다는 것이다. 미국 기업이 멕시코 기업에 비해 오히려 불리한 처지로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USTR의 지침에 따라 ‘적절한 장치’를 구체적 조항으로 만들어내야 할 재무부가 반발하고 있다고, <인사이드 유에스 트레이드>는 보도했다. USTR은 나프타 재협상이 5차까지 이뤄진 지난 11월 중순까지도 환율조작 관련 구체적 조항들을 의회는 물론 나프타 협상에도 내놓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머니투데이>는 12월8일 “(미국 측이) 환율조작 금지 관련 조항 도입을 한·미 자유무역협정 개정 협상 의제로 논의할 것으로 우리 정부에 요청했다”라고 보도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개정과 관련해 미국 측에서 환율 관련 구체적인 사항을 제기한 바 없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정문에 ‘환율조작 금지’ 관련 문구를 삽입하려고 시도할 것은 명확해 보인다. 나프타 회원국인 캐나다와 멕시코는 양국 모두 대미 무역 흑자국이지만 환율조작 혐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USTR은 나프타 재협상 테이블에 환율조작 금지를 올리기 위해 필사적이다. 곧이어 시작될 새로운 재협상을 위한 ‘연습 게임’으로 볼 수밖에 없다. 바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이다.

다만 USTR도 나프타에서 난항을 겪고 있는 만큼 한국에 내밀 요구 조항이 어느 정도의 수준일지는 아직 가늠하기 힘들다. TPP 공동선언문 같은 추상적인 형태일 수도 있고, 좀 더 명확하고 구속력 있지만 기괴한 ‘적절한 장치’일지도 모른다. 일단 나프타 재협상에서 환율조작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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