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고어(위 가운데)의 대통령 출마를 원한 응답자는 41%에 그쳤다.

지난 2000년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섰다가 공화당 조지 W. 부시 후보에게 ‘대법원 판결’로 패한 바 있는 앨버트 고어 전 부통령(59)이 다시 한번 분명히 자신의 대선 출마설에 쐐기를 박았다. 7년 전 쓰라린 패배 뒤 환경운동가로 변신한 고어가 마침내 유엔 산하 ‘정부 간 기후변화위원회’(IPCC)와 공동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자 한국을 포함해 전세계 언론은 즉각 그의 재출마 여부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노르웨이의 한 방송인과 가진 인터뷰에서 대선 출마설을 부인하고 “나는 현재 다른 캠페인에 몰두해 있다. 기후 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지구적 캠페인이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완전한 환경운동가로 변신한 고어의 소신이기도 하다. 그런 그를 부시 대통령은 한때 ‘오존맨’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지난 2000년 대선에서 고어를 꺾은 부시는 재임 7년째 이라크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실패한 대통령’으로 대다수 미국 국민에게 각인돼 있어 좋은 대조를 이룬다. 

고어의 대선 출마설은 수년째 끊이지 않는다. 지난주 뉴욕 타임스에는 고어의 열성 지지자들이 운영하는 ‘Draft Gore’란 인터넷 웹사이트 명의로 그의 재출마를 권유하는 전면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도 그에게 여러 번 출마를 권유했을 정도다. 지난 2002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카터는 고어의 수상 소식이 전해진 직후 NBC TV에 나와 “여러 차례 고어에게 대선 출마를 권유했는데, 언젠가 마지막으로 고어한테서 ‘이제 그런 전화 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었다”라고 털어놓았다. 고어의 불출마 결심이 얼마나 확고한지 보여주는 일화다.

그동안 고어의 재출마설이 수그러들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인데, 당시 대선 패배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지지자들이 많다는 점과 과거 민주당 내에 변변한 대권 주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정이 크게 다르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비롯해 배럭 오바마, 존 에드워즈 등 쟁쟁한 후보가 즐비하다. 

고어의 노벨상 선정 발표 직후 초미의 관심은 여론이 어떻게 움직일까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미풍에 그쳤다.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고 해서 일반 유권자의 마음이 그다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그의 수상 발표 직후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1009명의 응답자 가운데 54%가 그의 재출마에 부정적이었고 찬성은 41%로 나타났다. 지난 3월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찬성과 반대가 각각 38% 대 57%로 나왔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 일반 유권자는 그렇다 치고 친정 식구나 마찬가지인 민주당원들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결과는 비슷하다.

현역 민주당 대선 후보군에 포함된 고어의 지지도는 어떤가. 우선 노벨 평화상 발표 전인 지난 10월4일부터 7일까지 실시한 조사를 보면 고어는 힐러리의 43%, 오바마의 24%에 이어 3위인 10%를 차지했다. 노벨상 수상 직후 조사에서도 고어는 약간 증가한 14%로 나타나 여전히 힐러리, 오바마 두 후보에 비해 열세를 보였다. 결론적으로 고어는 노벨 평화상  덕에 7년 전 대선 패배의 오욕을 말끔히 씻어낸 위대한 환경운동가로 인정 받았지만, 적어도 미국민 시각에서 보면 차기 대통령감은 아닌 것으로 판명된 셈이다.

ⓒReuters=Newsis고어의 지지도(10%)는 10월7일 현재, 43%의 힐러리(오른쪽)와 24%의 오바마(왼쪽)에게 뒤진다.

정치 후원금 준 힐러리 클린턴 밀까

비단 이런 수치가 아니더라도 고어가 재출마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환경운동가로 굳어진 자신의 이미지에 먹칠을 할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측근들은 고어가 다시 정치판에 뛰어들 경우 노벨상 수상으로 탄탄해진 위상은 물론 자유 진영 인사들에게 ‘현자’로 굳어진 자신의 이미지가 깨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절대로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고어가 지난 2000년 대선 패배 뒤 환경운동가로 변신한 후 요즘처럼 인기를 구가한 적이 없다. 그는 부통령 재임 시 일반 미국인의 평판은 좋은 편이었으나 클린턴 행정부 말기엔 인기가 시들했다.

그러다 그가 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면서 다시 인기를 얻었지만 대선 투표함 개표가 한 달 이상 계속되면서 그에 대한 미국 국민의 호감도도 덩달아 떨어졌다.

고어가 다시 인기를 만회한 것은 대법원이 부시의 손을 들어줬을 때 이에 불복하지 않고 깨끗이 인정한 뒤다. 그 뒤 고어는 패배한 대선 후보로서 개인적으로도 쓰라린 아픔을 겪었지만 미국 국민 대다수로부터도 ‘잊혀진 정치인’으로 기록됐다. 그러다 환경문제를 고발한 기록영화인 〈불편한 진실〉로 아카데미상을 받으면서 고어에 대한 미국인의 관심은 급속히 호감으로 변하고, 이미지도 재구축되기 시작했다. 그가 노벨 평화상까지 받을 수 있었던 데는 정치인이 아닌 환경운동가로서 벌인 각고의 노력 덕분이다. 따라서 고어로서는 이런 프리미엄을 버리고 대선에 나서기가 힘들 것이다. 

물론 고어가 스스로 대선 불출마를 밝혔어도 마음만 먹는다면 출마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가 출마를 결심한다면 50개 주 가운데 제일 먼저 11월2일 실시되는 뉴햄프셔 주 예비 경선에 등록해야 한다. 고어가 싫다면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후보등록을 대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고어가 공개적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하지 않은 상황에서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아이오와 주의 경우 이미 일단의 극성 팬들이 예비 경선 시 고어를 후보로 밀 태세다. 그러나 이 역시 고어가 출마 선언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일부 정치 분석가들은 고어가 오히려 적당한 시점에 선호하는 후보를 공개적으로 밝힐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일종의 킹 메이커 역이다. 그는 아직 민주당 대선 후보 가운데 특정 후보를 점찍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정치후원금을 낸 인사들을 보면 희미하게나마 단서는 잡힌다. 고어는 지난 2000년 힐러리 클린턴이 뉴욕 상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500달러를 기부했다. 그러나 2006년 그녀의 재선 출마 때엔 한 푼도 안냈다. 2004년 대선 예비 경선에서 그는 당시 존 케리 후보에게 2000달러를 기부한 적이 있지만, 케리는 현재 민주당 대선 후보군에서 빠져 있다. 그 밖에도 고어는 일부 민주당 연방상원 후보들에게 과거 수천 달러에서 1만 달러에 이르는 후원금을 낸 적이 있다. 그가 2000년 이후 후원금을 낸 사람은 힐러리가 유일하다.

기자명 워싱턴=권웅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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