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 쭈그리고 앉았다. 곧바로 그도 내 앞에서 바지를 내리더니 볼일을 보기 시작했다. 싱글벙글 웃던 그가 나에게 한마디 건넸다. “Which Country?”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는 표현이다. 이미 바지춤을 내리고 반쯤 볼일을 보던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코리아.”
인도에서 겪은 문화 충격 중 가장 자극적인 건 길에서 스스럼없이 ‘큰일’을 보는 사람들이다. 기차 여행 도중 해 뜰 무렵 창밖을 보면 기찻길 옆에 일렬로 쭈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는 인도인들의 ‘집단 군무’가 펼쳐진다. 어떤 해변 도시에서는 이른 아침 그 마을 사람이 모두 해변에 나와 바닷가에 볼일을 보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날 낮 해변의 수많은 잔여물들이 모두 사라진 걸 발견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얼마나 위대한지 새삼 깨달았다.
인도 사람들이 기찻길이나 해변에서 배변을 하는 이유는 집에 화장실이 없기 때문이다. 인도에만 국한한 정확한 수치는 없는데, 2017년 유니세프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약 5억5000만명이 길에서 배변을 한다. 그나마 인도는 최근 몇 년 사이 화장실 건설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다.
인도에 화장실이 부족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상수도 문제가 있다. 농촌인구가 절대적인 인도에서 전국 구석구석까지 상하수도를 설치하는 건 요원하다. 수도인 뉴델리조차 1년에 절반 이상 제한 급수를 시행한다. 건기가 되면 물 나오는 시간이 하루 3~4시간밖에 안 된다. 그래서 인도에는 집마다 물탱크가 있다. 급수 시간에 물을 확보해 물탱크에 보관한다. 우리처럼 수세식 화장실을 갖추는 건 꿈도 꾸기 힘든 사치다.
종교적 요인도 더해진다. 힌두교는 청결함과 불결함을 극단적으로 구분하고, 이게 결국 카스트로 이어진다. 청결한 일을 하는 사람은 상층 카스트이고, 화장실 청소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하층 카스트에 속한다. 그러다 보니 불결함의 상징인 화장실을 집 안에 두는 건 힌두교 전통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들로 나가는 것이다.
그랬던 인도가 갑자기 화장실 건설 운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하나의 사건 때문이다. 2014년 사촌 자매가 심야에 야외에서 용변을 보다 성폭력을 당하고 살해되었다. 당시 국내외 시선은 잔혹한 성폭력 자체에 맞춰져 있었을 뿐 이들이 심야에 용변을 보러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았다. 인도를 아는 사람에게 이 문제는 그저 해결할 수 없는 비극일 뿐이었다.
그해 인도 수상 나렌드라 모디는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성폭력을 막기 위한 화장실 건설 운동을 제안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형법을 강화하고 성폭력 범죄 기소율을 높여도 모자랄 판에 기껏 화장실 건설 같은 토건 정책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봤다.
화장실 건설 운동에 성폭력 범죄율 급감
그럼에도 전국적인 화장실 건설 운동은 진행됐다. 집에 화장실을 만들겠다고 하면 정부가 우리 돈으로 20만원가량을 지원했다. 당연히 돈을 떼먹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후 화장실 보조금은 후불제로 바뀌었다. 물 부족 현실에서 수세식 보급에 한계를 느낀 정부는 악취를 극적으로 감소시킨 ‘친환경 (Eco-Friendly) 화장실(A.K.A 푸세식)’을 개발해 보급했다.
지난 3월 기차를 타고 인도 중부를 가로지르다 깜짝 놀랐다. 눈에 띄게 많은 젊은이가 노상 배변 대열에서 ‘증발’했다. 완고한 노인 몇이 여전히 쭈그리고 앉아 있었을 뿐이다. 정말 놀란 것은 계속 늘어나던 인도 성폭력 범죄율이 화장실이 집중적으로 건설된 지역을 중심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인도를 좀 안다고 떠들어왔건만, 나 역시 ‘제3자의 시선’에 머물러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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