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노동이사제 도입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2014년 11월24일부터다. 이날 서울시는 공공기관 혁신 방안의 하나로 참여형 노사관계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박원순 시장은 “노동이사제를 도입해 근로자의 이사회 참여를 보장하고 노사가 참여하는 경영협의회를 설치·운영하겠다”라고 밝혔다. 곧이어 서울시·공공기관 노사가 참여하는 노사정서울모델협의회가 꾸려졌다. 박태주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상임위원이 당시 노사정서울모델협의회 위원장을 맡았다. 지난 8월 노사정위원회 상임위원직을 맡기 전까지 서울시 노동이사제 설계·운영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누구보다 노동이사제 설계에 깊이 관여했다.

박태주 상임위원의 이력은 독특하다. 1987년 산업연구원에서 정부 출연 연구기관 최초로 노조 결성을 주도하는 등 노동 현장에 밝다. 오랫동안 노사관계·노동문제를 연구해온 학자로 한국산업노동학회 회장을 맡았다. 참여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정책실에서 노동개혁 TF 팀장으로 일했다. 현대자동차 주간연속 2교대제 자문위원회 대표를 맡아 중재자 구실을 하기도 했다.

서울시 노동이사제와 관련해서도 박태주 상임위원은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를 만나 서울시의 노동이사제에 대해 물었다.
 

ⓒ시사IN 윤무영박태주 상임위원은 서울시 노동이사제 설계·운영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서울시의 노동이사제 추진 과정은?

노사정서울모델협의회가 만들어지고 2015년 한국노동연구원에 연구 용역을 발주했다. 단순한 연구 결과가 아니라 ‘노사가 사실상 합의할 수 있는 안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용역 과정에서 노사·연구자들과 상호 협의하고 토론했다. 연구 용역 결과는 사실상 상당 부분 합의된 수준으로 제출되었다. 노동이사제가 한국에선 아직 낯설기 때문에 연구 용역이 진행되면서 지속적으로 노동이사제에 대한 교육·토론회·해외연수를 진행했다.

노동이사제가 왜 중요한가?

핵심은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에서는 정치학자 로버트 달의 표현처럼 ‘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의사결정 과정에 내 자신이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이사제는 작업장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는 과정이다. 또 노조 활동의 확장이다. 노조 활동이 단체교섭을 중심으로 진행되는데, 이는 경제적 이해 다툼의 영역이다. 노동이사제는 노동자가 기업에서 지위를 찾는 과정이고, 노조의 활동 영역을 단체교섭을 넘어 확장하는 데 의미가 크다. 경영이 투명해지고 노사 불신이 덜어질 수 있다.

서울시의 노동이사제를 설계하면서 노사와 서울시 관계자들을 만났는데 반응이 어땠나?

우선 박원순 서울시장의 의지가 강했다. 박 시장이 2005년 독일 폭스바겐을 방문했을 때 노동이사제가 시행되는 것을 보고 감명받았다고 들었다. 시장이 적극적이니 시 관계자·공공기관 대표 등이 반대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핵심 변수는 노조였다. 처음에는 노조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노조의 요구로 시작된 게 아니고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으니까. 당시는 박근혜 정부 때였는데, 정치 지형상 ‘노동이사제가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다. 한편으로 노동운동계에 ‘노동자를 경영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서 투쟁을 약화시키는 포섭 기제’로 보는 흐름이 있었다. 결국 토론하고 교육하는 과정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2015년 말이 되니까 노조가 적극적 태도를 보였다. 노조가 자체 교육을 주관하기도 할 정도로.

실제 노동이사들도 교육의 필요성을 많이 이야기하던데.

‘서울모델’에서 교육에 무척 신경 썼다. 독일에 노동재단 중 하나로 한스뵈클러 재단이 있다. 독일에서 노동이사가 되려는 사람은 노조에 각서를 쓰는데, 노동이사로 받는 수당의 거의 대부분을 이 재단에 기부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노조의 추천을 받지 못한다. 이 한스뵈클러 재단이 하는 가장 중요한 활동이 전국의 노동이사 교육이다. 스웨덴도 노동이사 재교육 과정이 있다. 한국에는 그런 시스템이 없다. 서울시의 적극적 교육 지원이 불가피했다.

노동이사제를 설계하면서 또 어떤 점이 어려웠나?

관련법이 미비해 기존 법 제도 속에서 설계할 수밖에 없었다. 가령 외국 사례와 달리 노동이사는 노조를 탈퇴해야 한다. 현행 법이 그렇다. 탈퇴를 안 하면 중앙정부가 그 노조를 ‘노조 아님’ 통보를 할 수 있다. 처음에 노조는 ‘버티자’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노동이사제와는 전혀 다른 싸움으로 바뀐다. 조례 제정에 매달린 것도 그 때문이다. 서울시가 할 수 있는 가장 상위의 법적 수단을 마련해야 했다.

‘독일은 경영이사회와 감독이사회가 분리되었고, 감독이사회에만 노동이사가 들어간다. 한국은 일원화된 이사회이기 때문에 노동이사제가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노동이사의 1차적 기능은 경영진(상임이사)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일이다. 이사회의 일원으로서 이해관계자(종업원)의 관점을 대변하는 것이 노동이사의 역할이다. 이런 역할은 일원화된 이사회든 분리된 이사회든 다르지 않다. 노조 측이 초반에는 상임이사로 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하지만 노동이사는 경영을 집행하는 사람이 아니다. 상임이사로 하자는 건 노동이사제의 취지와 맞지 않다고 설득했다. 현실적으로도 맞지 않다. 직원으로 일하다가 노동이사가 되었다고 본부장(상임이사)을 하다가, 임기 끝나면 직원으로 돌아갈 건가. 노조 측도 금세 주장을 접었다.

민간 부문으로 노동이사제를 확산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이도 있다.

노동이사제를 하는 많은 나라에서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에 동시에 도입했다. 프랑스 정도가 공공이 먼저 도입하고 민간으로 확산했다. 노동이사제의 취지가 민간이라고 달라질 이유가 없다. 주주는 경영에 책임지는 사람도 아닌데 이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는 것이 맞나? 민간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필요성이 더 크다.

노동이사제가 이사회의 의사 결정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유럽에서 노동이사제를 채택한 나라는 유럽연합(EU) 28개국 가운데 18개국에 이른다. 노동이사 수는 전체 이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독일에서는 직원이 2000명 이상인 경우 감독이사회의 절반을 노동이사로 채운다. 서울시 노동이사제는 노동이사가 한 명이나 두 명이다. 노동이사 한 명이 의사 결정을 지연시킬 수 있는 만큼의 영향이 있나. 이사회는 관행상 대개 만장일치가 많다. 만장일치가 안 될 가능성은 높지만 한두 명이 반대한다고 해서 의사 결정이 지연된다는 말은 과장이거나 핑계에 불과하다. 오히려 노동이사가 이사회에 들어가면서 의사 결정의 질이 좋아진다. 노동이사가 이사회에서 충분히 의사를 밝히는 것도 의미가 있고, 특히 노동이사가 어떤 안건에 대해 동의했다면 의사 결정의 권위가 높아진다.

서울시 노동이사제를 준비·시행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법·제도가 미비된 상태에서 준비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까지 한계로 남아 있다. 공공기관에서 노동이사제를 추진하려면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을 바꾸면 된다. 좀 더 포괄적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 제도의 지속성을 위해 국회에서 노동자경영참여기본법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이사제는 애초 노사협의회의 기능을 강화한 ‘경영협의회’와 함께 설계됐다. 노동이사제에 집중하느라 경영협의회 설치를 다루지 못했다. 노동이사제와 경영협의회는 노동자 경영 참가에서 중요한 두 축이다. 경영협의회 문제를 다루지 못해 무척 아쉽다.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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