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동이사제에 관한 논란이 떠올랐다. 11월20일 KB금융지주 임시 주총이 계기가 되었다. KB금융 노동조합협의회가 우리사주조합의 위임을 받아 ‘주주 제안’으로 하승수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추천했다(주주 0.1%의 위임을 받으면 주총에 안건을 제안할 수 있다). 안건은 부결되었지만 KB금융의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이 찬성 의사를 밝히면서 논란이 커졌다. 노동이사제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는데, 연기금을 통해 노동이사제를 추진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노동이사제 찬성한 국민연금, 정권 코드 맞추는 건가’(〈서울경제신문〉), ‘정치·노동계 눈치 보는 국민연금의 위험한 행보’(〈한국경제신문〉), ‘국민연금 동원한 노동이사제 추진의 심각한 문제들’(〈문화일보〉), ‘우리 사회에 안 맞는 옷, 노동이사제’(〈동아일보〉) 등등. 그즈음 여러 신문의 사설 제목이다.

실제 활동 중인 노동이사들은 이런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현재 공공기관 노동이사제를 시행하고 있는 지자체는 서울시가 유일하다. 12개 투자·출연기관에 노동이사 16명이 있다. 서울시 투자·출연기관에서 활동하는 노동이사를 만났다.
 

ⓒ서울시 제공11월13일 서울시 공공기관 노동이사들이 참여하는 노동이사제 관련 워크숍이 열렸다.

서울신용보증재단에서 일하는 천기문씨(40)는 두 종류의 명함을 갖고 있다. 한 장에는 ‘강남지점 회생지원팀장’이라 적혀 있고, 다른 한 장에는 ‘노동이사’라고 쓰여 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명함을 선택해 건넨다. 그가 두 종류의 명함을 준비한 건 지난 3월 이후부터였다. 서울시 공공기관에 노동이사제를 도입했고, 출연기관인 서울신용보증재단에서도 지난 3월에 노동이사를 뽑았다. 1년 이상인 재직자는 누구나 노동이사 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 2004년에 입사한 천기문 팀장이 비상임이사인 노동이사로 선출되었다.

천기문 노동이사가 근무하는 서울신용보증재단은 서울시에서 사업하는 자영업자·법인에게 금융 지원, 경영 컨설팅 등을 하는 서울시 출연기관이다. 담보가 미약하면 보증서를 발행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한다. 노동이사제 논란이 일었던 KB금융과 비슷하게 금융 업무를 한다.

천씨는 지난 3월 서울신용보증재단 노동이사 선거에 단독 출마했다. 왜 노동이사 선거에 나섰을까. “공공기관장이 부임하면 내부 사정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조직을 잘 모르니 사기업에서 하는 방식으로 업무 처리를 하려고도 한다. 노동이사 제도가 잘 되면 조직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팀장이면 회사 내에서 중간급이니까 조직 내 의사 전달이 원활하지 않을까 싶어 출마했다.”
 

천기문 서울신용보증재단 노동이사(왼쪽)와 박희석 서울교통공사 노동이사.

노동이사의 처우와 역할을 아십니까

노동이사는 비상임이사로 이사회에 참여한다. 노동이사로 선출되면 300인 미만 기관은 연간 300시간, 300인 이상 기관에서는 연간 400시간을 노동이사 업무에 사용할 수 있다. 직원으로 일하면서 동시에 노동이사로 활동하는 방식이다. 노동이사에게는 별도의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다. 이사회 출석 등에 따라 회의수당 정도를 지급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이런 노동이사제가 외부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조직 안에서도 노동이사의 처우와 역할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라고 한다. 천기문 노동이사는 “선출 이후에 회사 동기·후배로부터 ‘이사님, 한턱 쏴야죠’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웃음). 월급 똑같다고 해도 믿지 않아서, 회사 재무팀에 물어보라고 했다. 직원들도 노동이사제와 관련해 모르는 점이 많아서 조직 내외로 알려야 할 부분이 아직 많다”라고 말했다.

천기문 노동이사는 그동안 이사회에 3차례 참석했다. 이사회에는 서울시 등 주무부서와 사전에 협의된 안건이 주로 올라왔다. 공공기관이기 때문에 법률 용어가 바뀌면 수정할 사항이 생겨 이사회를 열기도 한다. 천기문 노동이사는 “언론에서는 노동이사가 이사회의 의사 결정을 좌지우지할 것처럼 쓰던데, 노동이사 일이 외부에서 보는 것만큼 스펙터클하지 않다(웃음). 그동안 이사회에 참석해서 사안을 다투거나 싸워본 경험이 없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공공기관 노동이사제를 시행하고 있는 지자체는 서울시가 유일하다. 위는 박원순 서울시장.

 

이사회에 현장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다는 게 노동이사제의 장점으로 꼽힌다. 천기문 노동이사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가 보기에, 공기업에서 내부 업무의 편의성이 개선되면 고객(시민)에게 유리해진다. 정식 안건은 아니지만 이사회에서 노동이사로서 의견을 전한다. 천 이사는 재산 상각과 관련해 처리 지연 요인으로 꼽히던 한 업무 프로세스에 문제를 제기했다. “다른 비상임이사들은 구체적인 업무 내용을 모를 수밖에 없다. 채권 관리하는 직원들에게 여러 차례 건의 사항이 올라왔던 내용이 있었다. 이사회에서 정확하게 검토해 그 문제가 해결되면 좋고, 해결할 수 없는 다른 사정이 있으면 그 사실을 직원들에게 정확히 알려 ‘아, 그런 문제가 있구나’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이사회에서 이야기를 하니까 당연직 이사로 들어와 있던 서울중소기업청장이 ‘개선과 관련해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고 하더라.”

이런 적도 있다. 기관평가 결과가 이사회 보고 사안으로 올라왔다. 이전에는 기관평가 결과를 직원들에게 요약 공개만 해왔다. 천 이사는 어떤 기준으로 평가했는지 세부 항목을 직원들에게 전체 공개하자고 제안했다. “직원들이 기관평가 결과를 못 보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소통을 위해서 보여줄 것은 확실히 보여주자”라는 그의 제안이 이사회에서 받아들여졌다. 얼마 전에 기관평가 결과가 직원들에게 공개되었다.

서울시가 도입한 노동이사제는 조례에 법적 근거를 두고 있다. 2016년 9월 서울시가 추진한 노동이사제에 관한 조례(서울특별시 근로자이사제 운영에 관한 조례)가 발효됐다. 서울시는 직원 100명을 하한선으로 삼아 이를 초과하는 기관을 노동이사제 도입 대상 기관으로 삼았다. 300명 미만인 공공기관은 노동이사 한 명을, 300명 이상인 공공기관은 노동이사 두 명을 선출한다.

서울교통공사 같은 경우, 노동이사 두 명을 뽑았다. 노동이사 투표권자만 해도 1만7500여 명. 인원이 많고 공사 내 노조가 3개(서울지하철노조·5678서울도시철도노조·서울메트로노조)인 만큼 선출 과정도 복잡했다. 각각 노조에서 추천자를 정하는 예비경선을 치렀다. 그런 후에 본선에서 다섯 명이 후보로 출마했다. 박희석 후보(57)와 박원준 후보(55)가 노동이사로 뽑혔다.

전동차 관리 분야 차장으로 재직하던 박희석 노동이사는 오랫동안 노조 활동을 해왔다. 해고와 옥살이도 경험했다. 상급단체 간부로 일하면서 교섭도 많이 해보았다. 직종과 노조를 대표하는 후보가 노동이사로 나서야 한다는 후배들의 권유에 출마했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정년이 3년 남았다. 그중 1년은 공로 연수이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에 출마를 망설였는데, 법률상 등기이사인 노동이사는 노조를 탈퇴해야 한다고 하더라. 재직 기간이 얼마 안 남은 내가 노조를 탈퇴하는 게 부담이 적을 듯해 나서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노동운동가 출신 노동이사가 느낀 이사회 풍경은 어땠을까. 박희석 노동이사는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한 건은 김포 경전철·안산-수서 간 자회사 설립 건. 안건은 통과되었지만 박희석 노동이사는 좀 더 디테일한 관련 자료를 이사회에서 요청했다. 다른 한 건은 노사가 합의한 임금지급 시한에 대한 것이었다. 당연직 이사인 서울시 측 이사가 수정안을 제시했는데, 회사 측 이사와 노동이사들이 주장한 안대로 결정되었다. 박희석 이사는 “당연직 이사나 사측 이사가 보기에 이전보다는 이사회가 더 까다로워졌다고 느낄 수는 있겠다. 하지만 노동이사가 정보를 정확히 알아야 회사를 대변할 수 있다. 현장의 의견이 경영에 반영되면 노사 간 마찰이 더 줄어들 수 있다”라고 말했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서울시의 노동이사들이 모이는 노동이사협의회의 의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노동이사제가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풀어야 할 문제점이 많다. 노동이사들이 모여 함께 토론하고 교육을 받고 서울시에 제도와 관련한 건의도 하기로 했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노동이사를 지원하는 행정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본다. 노동이사협의회 차원에서 논의해 서울시와 협의해볼 계획이다. 또한 박희석 노동이사는 “외국의 사례를 보면 노동이사가 매수되는 경우도 있더라. 노동이사 한 명이 잘못하면 노동이사제 안착에 걸림돌이 된다. 노동이사 윤리 강령을 제안해볼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코스콤·광주시 등도 도입 검토

서울복지재단의 장지현 노동이사(43)는 지난 10월 말에 선출되었다. 120여 명 직원 투표로 뽑혔다. 서울시 노동이사 16명 중 6명이 여성이다. 장씨는 그중 한 명이다. 이사회는 장지현 노동이사에게는 낯설지 않은 편이다. 기획팀에서 일할 때 이사회 준비 업무를 하기도 했다. 노동이사로 첫 이사회에 참석하고서 고민이 많아졌다고 한다. “이사회 분위기가 우호적이었다. 노동이사로서 나는 어떻게 행동하고 발언해야 하나 깊이 고민했다. 나에게 투표를 한 이들 중에 비노조원도 있다. 사측과 노조의 눈치를 안 보고 독립적으로 노동이사를 뽑아준 이들을 대변하겠다.”

장지현 노동이사는 다른 노동이사들을 만나면서 기관마다 상황이 다르다고 느꼈다. 한 기관의 경우, 대표가 노동이사를 불러 “앞으로 내 말을 잘 듣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노조가 추천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고, 출마·선출 방식도 다양하다. 장지현 노동이사는 기관장들의 노동이사제에 대한 이해나 태도도 각양각색이라고 전했다. 장 노동이사는 “노동이사제가 잘 실행될 수 있도록 간부·직원들에 대한 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을 공감했다”라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는 7월9일 발표한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 ‘문재인 정부 국정운영 5개년 계획(100대 국정과제)’에서 서울시 산하기관에 도입된 노동이사제를 중앙 공공기관에 확대해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코스콤, 광주시 등에서도 노동이사제 도입을 검토 중이다. 정부가 의지를 갖고 있는 만큼 노동이사제가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앞서간 서울시 노동이사제 사례를 주목하는 이유다.

 

기자명 차형석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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