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를 떠나 남으로 온 할아버지 가족은 제주도에 상륙하게 돼. 고달픈 피란살이 중의 어느 날 할아버지는 기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나이 어린 여동생과 함께 항구 주변을 걷던 할아버지는 큼직한 수송선 위에서 “얘들아!” 하고 애타게 부르짖는 청년을 발견해. 깡마른 얼굴의 그는 두 손을 싹싹 빌면서 밧줄을 늘어뜨리고 있었다는구나. “얘들아 배가 너무 고프다. 뭐든 먹을 걸 밧줄에 매다오.” 배고프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할아버지는 그 청년이 너무 불쌍해 보였고 할아버지 남매의 그날 점심이었던 감자를 밧줄에 달린 주머니에 넣어주었다고 해. 감자 몇 개를 낚은 청년은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는 말을 수십 번 한 뒤 배 안으로 사라졌어. 얼마 뒤 이 얘기를 사람들에게 했더니 매우 낯선 단어 하나를 접하게 됐어. “그 사람들 국민방위군이다.”

ⓒGoogle 갈무리예비 병력으로 소집된 국민방위군이 늘어서 있다.
이들은 주먹밥이나 감자를 먹으며 버텼다.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국 정부가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전쟁 초반 북한 인민군이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남한 청년들을 징발했던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막고, 예비 병력을 확보하고자 군 입대 연령의 청년 약 50만명을 소집한 데에서 비롯됐다. 이 생때같은 장정들을 구름처럼 모아놓고는 보급품과 식량을 몇몇 간부들이 홀랑 가로채고 말았어. 하늘도 노할 도둑놈들이 그 막대한 돈과 물량을 삼키는 동안 정확히 얼마인지도 모를 수의 젊은이들은 엄동설한에 얇은 군복 하나 입고 소금국 먹으며 ‘행군’하다가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말았지. 

1951년 2월, 국민방위군 작전처장 이병국 중령은 미군 헌병대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아. “수만명의 거지 떼 같은 장정들이 문경새재를 넘어가고 있소.” 악에 받친 국민방위군 장정들이 대규모로 탈주하던 때였지. 이병국 중령은 나는 듯이 현지로 달려갔지만 말이 통할 상황이 아니었어. “죽더라도 고향에 가서 죽겠소.” 이병국 중령은 충남도청에 긴급 의뢰하여 장정들에게 쌀을 지급한 뒤 다시 후방 경상도로 이들을 이끌고 가려 했는데 문경새재를 넘어 내려오던 장정들은 주저앉고 말았어. “우리를 다시 죽이려고 데려가는 겁니까.” 이병국 중령은 마이크를 잡고 무슨 말이든 해보려 했지만 그만 서러워서 울음을 터뜨렸고 장정들도 함께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해(〈동아일보〉 1974년 2월11일자). 보급품도 무기도 식량도 없이 수십만 ‘대군’을 건사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인과 굶어 죽으나 탈영병으로 죽으나 마찬가지였던 ‘예비’ 군인들은 그렇게들 목 놓아 울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만의 청년이 요즘 말로 하면 좀비처럼 온 나라를 헤매고 있으니 어떻게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있겠니. 이럴 수는 없다는 얘기들이 오가고 국회에서도 문제가 됐지만 국방부 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고위 지휘관들은 코웃음을 쳤어. 병력 이동 중에 발생하는 불가피한 손실이라고 둘러대는 건 기본이고, 신성모는 이렇게 일갈한다. “국민병 문제 역시 불시적인 사태였음에도 희생자가 ‘아주 적게 난’ 것은 국민에게 아주 행복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5열(즉 간첩이나 불순분자)의 책동에 동요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국회의원들이 난리가 나고 대통령에게까지 얘기가 들어가서 헌병대의 조사가 시작되는 상황에서도 신성모는 헌병대 조사관을 불러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어. “조사는 철저히 하되 김윤근 국민방위군 사령관은 구속시키지 마시오.”

ⓒGoogle 갈무리신성모 국방부 장관(왼쪽)은 국민방위군 보급품 착복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다.

보급품도 무기도 식량도 없던 50만 대군

많은 이들이 분노했어. 그 가운데에는 수사를 담당했던 헌병사령관 최경록 장군의 장모 윤덕련 여사도 있었어. 그분은 야당 의원들을 직접 만나 사위가 수사 중인 국민방위군의 내막과 수사 상황까지도 털어놓았어. “장정들이 굶어 죽어가는데 국민방위군 지휘관들은 가는 곳마다 첩을 두고 살고 있어요.” 당시 장군들 가운데에서는 꽤 강직하다고 이름났던 최경록 장군이 장모를 부추겼는지도 모르지만.

참상은 눈에 보이고 윤곽도 그려지는데 확실히 국민방위군 지휘관들의 멱살을 거머쥘 만한 내부 증언이 아쉬운 상황. 후일 7선 국회의원으로 성장하게 되는 청년 이철승 역시 국민방위군의 실체를 까발리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어.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간 동료들의 참상을 접하고 이를 갈고 있던 그는 피란 수도 부산에서 깔끔한 미군 장교복을 차려 입은 사람 하나와 마주친다.

“어 김대운씨 아니오? 웬 장교복이오?” 김대운은 북 치고 장구 치는 재주가 있는 풍류꾼이었지만 장교복 입을 사람은 아니었거든. 그러자 김대운은 큰소리를 쳤다. “국민방위군 정훈공작대장을 몰라본단 말이오?”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김대운은 국민방위군 정훈공작대 산하 ‘국악연예대(國樂演藝隊)’를 거느리고 있었고 상관들 술자리에서 풍악을 제공하거나 미인계로 누군가를 매수하기도 하는 아름답지 않은 임무를 수행하는 장본인이었지. 당연히 그는 국민방위군 수뇌부의 사정을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어. 이철승이 술을 권하며 김대운의 장단을 맞춰주자 그는 놀라운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해.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돈을 가마니로 돌리고 있어요(〈동아일보〉 1974년 2월15일자).” 국민방위군 내부의 정보를 목 놓아 기다리던 국회의원들도 합세하여 “국민방위군의 진실을 밝히는 애국자”로 김대운을 치켜세우자 더욱 우쭐해진 김대운은 자신이 알고 있던 국민방위군의 실상을 홍수같이 토해놓았어. 그 실상은 국회의원들이 기가 질려버릴 정도였지.

국민방위군 지휘관들은 국회 조사단마저 매수하거나 눈을 속이려고 발버둥쳤어. 부산의 국민방위군 집결지를 방문한 국회조사단은 뜻밖에 고깃국을 먹고 있는 장정들을 만나게 돼. 뼈와 살이 붙어버린 몰골로 보아 그들의 일상이 고깃국과 거리가 멀다는 걸 금세 알 수 있었지만 장정들은 입을 다물었어. 국회의원 장홍염이 “여러분의 실정을 알고 왔는데 거짓말을 하니 도와줄 수 없다.” 일장연설을 하자 한쪽에서 흐흑 울음소리가 삐져나왔고 울음은 전염이라도 되듯 연병장을 통곡으로 가득 채우고 말았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무언(無言)의 폭로.

국민방위군 지휘관들만 배를 채웠다고 보기에는 빼돌린 물자와 돈이 어마어마했어. 이승만 정권이나 기타 권력층에게로 흘러간 심증도 있었지만 그 몸통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김윤근·윤익헌 등 국민방위군 지휘부를 사형시키는 것으로 이 사건은 서둘러 마무리된단다. 1951년 4월30일 국회는 국민방위군 해산을 결의했는데 그로부터 9일 뒤 당시 대한민국 부통령이자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존대를 받던 원로였던 성재 이시영은 부통령을 사임하면서 이렇게 통렬한 고백을 남긴단다. “…탐관오리는 가는 곳마다 날뛰어 국민의 신망을 상실케 하며, 나아가서는 국가의 존엄을 모독하여서 신생 민국의 장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으니 이 얼마나 눈물겨운 일이며 이 어찌 마음 아픈 일이 아닌가. (중략) 관의 기율이 흐리고 민막(民瘼)이 어지러운 것을 목도하면서도 워낙 무위무능 아니하지 못하게 된 나인지라 속수무책에 수수방관할 따름이니 내 어찌 그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것인가.”

탐욕 앞에 속수무책이었고 범죄를 두고 수수방관했던 나라. 그래도 뭔가를 하려고 했던 사람들, 밝히고자 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그 나라의 민낯은 서러울 만큼 느릿느릿 까발려졌어. 비록 그 치부를 완전히 해 아래 내놓지는 못했지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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