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막차보다 더 먼저 온다(정호승의 ‘밤눈’)”고 했던가. 한 해의 끝자락이 코앞이다.

“얼굴 한번 보자”, “밥 한번 먹자”라고 공수표만 날렸던 지인들의 이름을 적어보니 수첩이 빼곡하다. 그 와중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이른바 ‘불우이웃’ 돕기다. 움츠러들수록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이 생각나는 게 인지상정이다.

방송이나 길거리에서 후원금을 모금하는 방식은 전형이 있는 듯하다. 비썩 마른 팔다리와 볼록 튀어나온 배, 검은 피부와 대비되어 더욱 퀭해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의 어린이. 또는 희귀병에 걸린 아이와 엄마가 등장해 치료비가 없다며 눈물로 호소하는 모습은 모금 단체의 이름만 다를 뿐 대체로 정형화되어 있는 듯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고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요즘이야 보기 힘든 광경이지만 한때 눈먼 아비나 지체 장애인 부모가 어린 자녀를 앞세우고 구걸했던 ‘앵벌이’가 한 예다. 동정과 연민은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동참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맹자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 즉 측은지심을 일러 어짊의 극치라 평가하고 사람의 선한 마음의 4가지 바탕 중 하나로 꼽았다.

그럼에도 일부 길거리 모금과 방송 광고를 보면서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것을 감추기 어렵다. 오죽 딱하면 저러겠나 싶으면서도 아이를 동정심을 유발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 같아 씁쓰레하다. 인간을 도구화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함을 훼손하는 일이며 더구나 그 주체가 어린이라면 굳이 유엔의 아동권리협약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동정심에 호소하는 방식도 재고해봐야 한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페터 비에리는 동정에 대해 “사람을 왜소하게 만들고 무시되는 것처럼 느끼게 해 존엄을 위협한다”라고 말한다. 특히 자립할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동정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무력감을 확인시킨다. 비록 악의적으로 무시하거나 자신의 선함을 과시하는 경우가 아니라 해도 동정심이라는 동전의 이면에는 자칫 상대방의 무능을 확인하고 굴욕감을 불러일으킬 미묘한 위험이 있다.

지난해 한국에 살고 있는 난민들을 만났을 때, 그들 또한 섣부른 동정은 한마디로 “노(No)”라고 잘라 말하는 것을 여러 차례 들었다. 어떤 민족 출신의 난민들은 한국인들이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고 조심스레 내비쳤다. 그들이라고 왜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경제적 어려움은 물론이며 자녀를 학교에 보내거나 본국과는 매우 다른 문화와 관습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도움은 필수다.

불쌍한 존재가 아닌 자유와 평등 누려야 할 인간으로 대해주길

자청해서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들의 선의를 잘 이해하면서도 굳이 난민들이 도움의 손길을 마다했던 이유는 이랬다.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언뜻언뜻 내비치는 동정 어린 말이나 표정 때문에 자존심과 존엄함에 생채기가 나는 것을 여러 차례 겪어서다. 그들은 자신들을 가난하고 불쌍한 존재로 여기기보다 자유와 평등을 누릴 권리가 있는 존엄한 인간으로 대해주기를 더 원했다.

 

 

ⓒ연합뉴스9월26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난민 심사의 절차권 보장과 남용 방지를 주제로 열린 난민인권 토론회. 왼쪽부터 사단법인 피난처 이호택 대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황필규 변호사, 하용국 난민과장, 대한변호사협회 이재동 부협회장,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제인 윌리암슨· 채현영 법무관, 한국 난민지원네트워크 이일 의장의 모습.


누구에게나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인권적 접근은 도움받는 사람을 비굴하게 만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효과를 낳는다. 인간은 자존감과 내면의 힘을 확인하며 살아갈 때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성장해나간다. 한 개인이나 가족의 빈곤을 해결하는 데 개인이나 이웃의 도움은 그 한계가 너무나 뻔하다. 근본적으로 국가의 보편적 복지가 사회적 안전망으로 촘촘히 준비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은 세계인권선언이 천명하고 있듯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인간으로서 갖는 의무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얇은 지갑이나마 조금만 덜어내 어려움에 처한 이웃과 나눠보자. 동정심과 연민은 버리고 존중과 연대의 의미를 살짝 얹어서.

 

기자명 문경란 (인권정책연구소 이사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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