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로 여행을 떠난 몇 해 전의 5월, 차량 출입이 완전히 통제된 금남로는 문화제를 기다리는 시민으로 가득했다. 들뜬 마음에 방향도 없이 걷던 그때, 한 중년 신사가 걸음을 붙들었다. 금남로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휴대전화로 찍어달라는 부탁이었다. 5·18 당시에는 대학생으로서 참상을 목격했고, 평생을 해외에서 일하다가 은퇴 후 광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 시절 이후로 이렇게 금남로를 걸어본 적은 처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사진을 찍는 동안 그의 상기된 얼굴에 20대 청년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이렇게 누군가는 금남로의 아스팔트로, 누군가는 전일빌딩의 선명한 탄흔으로 저마다 1980년 5월 광주를 기억할 것이다.

2007년 11월14일 개봉한 〈스카우트〉는 야구로 광주의 5월을 기억하는 영화다. 광주일고의 초고교급 투수 선동열을 데려가려는 신경전, 운동부 출신 스카우터 호창과 운동권 출신 세영의 옛 사랑,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엄혹한 시대라는 세 줄기를 솜씨 좋게 엮어냈다.

주인공 호창 역을 맡은 배우 임창정은 제작발표회에서 이 영화가 〈밀양〉과 같은 주제인 ‘속죄’를 다뤘다고 밝혔다. 코믹한 포스터 탓에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영화를 보면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우일 그림

호창은 남들보다 늘 한 발씩 뒤처진다. 선수 시절에는 라이벌전을 망쳐 주전을 뺏기고, 스카우터가 되어서도 선동열 쟁탈전에서 번번이 물먹는다. 유일하게 때를 놓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속죄’다. 대학 야구부 시절, ‘구교대(학내 소요에 투입돼 학생을 진압하는 조직)’에 동원돼 등록금 투쟁 진압에 가담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자마자 호창은 코앞에 다가온 선동열과의 계약도 미뤄두고 경찰서에 갇힌 세영에게 향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더 이상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호창이 낸 용기는 세영의 따뜻한 위로로 돌아온다.

5·18을 소재로 한 영화로서 〈스카우트〉가 가진 미덕은 국가폭력의 잔혹함이나 피해자의 고통을 전시하는 데 집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는 5월18일 이전의 열흘을 다룬다. 야구를 연습하는 초등학생 이종범 뒤로 지나가는 탱크 외에는 계엄군의 모습도 등장하지 않는다. 같은 학교 학생을 향해 야구 배트를 휘둘러야 했던 호창의 과거에서 우리는 국가나 자본의 이름 아래 저질러진 수많은 폭력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폭력에 동원되거나 희생되거나, 혹은 외면하는 이들의 얼굴은 결국 스크린 너머 우리를 비추고 있다.

피해자를 슬픔에 가두지 않는 담백한 연출에 호평

〈스카우트〉의 김현석 감독은 올해 〈아이 캔 스피크〉를 세상에 내놓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당선된 강지연 프로듀서의 원안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아이 캔 스피크〉가 피해자를 슬픔에 가두지 않았다는 호평을 받으며 흥행에 성공하자, 짝패처럼 닮은 〈스카우트〉도 10년 만에 다시 조명을 받았다. 〈스카우트〉의 호창도, 〈아이 캔 스피크〉의 나옥분 할머니도 너무도 쉽게 “이젠 잊자”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외친다. 용서와 화해에 이르려면 진실한 속죄가 앞서야 한다고.

김 감독이 대학원에 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스카우트〉 제작보고서’에 따르면, 원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MVP를 차지한 선동열 선수에게 전두환이 훈장을 달아주는 가상 뉴스였다고 한다. 호창이 가장 원하던 선동열과, 그것을 좌절시킨 원인 제공자 전두환이 한 프레임에 담기는 아이러니를 의도한 것이다. 각본 수정 과정에서 멜로 코드가 강해지면서 이 장면은 영화에서 빠졌다.

〈스카우트〉 이후의 10년을 돌아보면 이 장면보다도 현실은 더 지독한 블랙코미디였다. 전두환은 회고록까지 출간해가며 책임을 적극 회피했고, 국정원은 5·18 관련 유언비어와 호남 혐오를 전파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기자명 중림로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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