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살 때 처음 US오픈 출전. 그로부터 24년 동안 선수로 뛰면서 그랜드슬램 타이틀 39개 획득. 그렇게 미국 여자 테니스의 전설이 된 빌리 진 킹. 그의 전기 영화 〈빌리 진 킹:세기의 대결〉은 그가 치른 수많은 시합 가운데 오직 한 경기에 집중한다. 1973년 9월20일 미국 휴스턴에서 열린 일명 ‘세기의 대결’. 전 세계 시청자 9000만명이 지켜본 역사적 일전에 임하기까지, 유난히 길고 힘들었던 빌리 진의 ‘그해 여름’을 그린다.
시작은 돈이었다. 똑같이 만원 관중을 기록해도 남자 선수가 여자 선수보다 8배 많은 상금을 받는 게 당연했던 시절. 그게 하나도 당연한 일이 아니라고 따지느라 진이 빠진 빌리 진(에마 스톤)이 세계여자테니스협회(WTA) 창설을 주도한다.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 직접 전단지를 돌리고 관중을 모은다. 그래도 힘든 줄 몰랐다. 진심으로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좋아서, 힘들어도 웃으면서 경기하는 여자들 때문에 괜히 심사가 뒤틀린 수많은 남자들 가운데 바비 릭스(스티브 커렐)도 있었다. 한때 잘나가는 프로 선수였지만 이제는 잊힌 쉰다섯 살 시니어 선수가 스물아홉 살 현역 랭킹 1위 빌리 진에게 맞대결을 제안한다. 여자가 정말 남자보다 열등하지 않다면 자신을 꺾어 증명하라는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서커스임을 알면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여성들이 더 이상 우스꽝스러운 대접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시합에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시합에 나가기로 한 이상 어떻게든 이겨야만 했다. ‘기울어진 운동장’ 위에서 쓰러지지 않고 악착같이 버텨내야만 했다.
영화에서 빌리 진은 딱 한 번 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딱 한 번 흐느끼는 빌리 진. 그 ‘딱 한 번’을 위해 나머지 모든 장면이 필요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눈물에 충분히 공감하고 싶어서, 정말 만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그 표정에서 단 두서너 감정만이라도 구체적으로 알아채고 싶어서,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다시 읽었다. 저 먼 나라의 오래전 이야기가 바로 지금, 바로 여기, 바로 자신의 이야기가 되고 마는 여성들 곁에서, 나는 겨우 내가 읽은 책의 한 페이지를 떠올리며 빌리 진의 ‘만감’을 짐작하려 애쓸 뿐이었다.
이기고도 울 수밖에 없는 여자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반복하면, 결국 그 일이 정상이 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목격하면, 결국 그 일이 정상이 됩니다. 만일 남자아이만 계속해서 반장이 되면, 결국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도 반장은 남자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만일 남자들만 계속해서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을 목격하면, 차츰 우리는 남자만 사장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게 됩니다(〈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중에서).”
너무 오래 자연스러운 것으로 뿌리내린 부자연스러움을 바꾸기 위해,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시합을 ‘세기의 대결’이란 명분으로 치른 빌리 진. 그 대결에서 남자가 이겼는지, 아니면 여자가 이겼는지를 답하는 얕은 영화가 아니다. ‘지고도 웃을 수 있는 남자’와 ‘이기고도 울 수밖에 없는 여자’ 사이에 관객을 세워놓는 속 깊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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