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건축가에겐 집을 쌓아올릴 때 정교한 설계만큼이나 편지와 술이 중요하다. 젊은 제빵사가 보내온 설계 의뢰 손편지에 감동해 설계비의 절반을 빵으로 대신 받는 식이다. 설계 진행 과정을 공유하러 의뢰인과 만났다가 엉뚱한 얘기에 빠져 술이나 마셔버리기도 한다. 그런 집들은 편지와 술과 빵으로 쌓아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월10일 서울 가회동 구가도시 건축에서 나카무라 요시후미 씨(69)를 만났다. 나카무라 씨는 지난 36년간 220채가 넘는 집을 설계한, 일본을 대표하는 주택 전문 건축가다. 요미우리문학상 수상작인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비채, 2016)의 주인공인 신입 건축가 ‘나’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이를 인연으로 이 소설을 쓴 작가 마쓰이에 마사시의 집을 설계해주기도 했는데, 마쓰이에의 집에 놀러 갔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집에 반해 나카무라 씨에게 자신의 주택 설계를 의뢰하기도 했다.

현재는 치즈 공장 주인이 머물 집과 와인 가게를 “완벽을 기해” 설계 중이다. 이번에도 빵처럼 치즈와 와인을 설계비로 받느냐고 물었다. 대답 대신 눈가의 웃음주름이 깊게 패었다. 얼마나 유명한 치즈를 만드는 곳인지 설명하는 얼굴에는 기대가 어렸다. 인터뷰 몇 시간 전까지 마신 술로 붉게 물든 코도 함께 웃고 있었다. “선생의 설계는 마치 연애 같네요”라는 기자의 농담에 그가 자신의 무릎을 가볍게 쳤다. “유사 연애라고 할 수 있겠네요!”

ⓒ시사IN 신선영나카무라 요시후미 씨는 작가로서 건축의 영역을 넓히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나카무라 씨는 일본 현대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건축가 요시무라 준조의 제자로 그의 계보를 잇고 있다.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을 강조한다. 작가로서 건축의 영역을 넓히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건축과 글이 꼭 닮았다. 옆에서 말을 거는 듯 다정하고 친근한 문체로 써내려간 책은 건축에 대한 심리적 문턱을 낮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집을 생각한다〉(다빈치, 2008) 〈집을, 순례하다〉(사이, 2011) 〈집을, 짓다〉(사이, 2012) 〈건축가, 빵집에서 온 편지를 받다〉(더숲, 2013) 〈건축가가 사는 집〉(디자인하우스, 2014) 등 국내에도 다수 번역돼 꾸준히 읽히고 있다.

‘먹고 자고 사는 곳’은 나카무라 씨에게 뗄 수 없는 한 단어이며 곧 집이다. 그는 부엌일을 하지 않는 건축가를 신용하지 않는다. 빨래와 청소도 마찬가지다. 특히 요리는 무척 중요한 일이라 설계사무소를 열었을 때부터 점심은 가급적 직접 만들어서 먹는다. 요리는 가사의 중심을 차지하는 현장이기 때문에 건축가로 ‘체험하고’ ‘이해하는’ 시간이 된다. 해외에 머물 때도 최대한 요리가 가능한 아파트형 숙소에 묵는다. 쓰레기를 어떤 식으로 분리해서 버리는지도 주의 깊게 본다. ‘사람의 생활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일이 건축가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에도 답사차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주로 한옥 위주로 둘러보았는데, 마루와 온돌을 주의 깊게 살폈다. 민가는 흥미로웠지만 양반 저택일수록 재미가 없었다. “주택이 자신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직접 가구 디자인도 하는 만큼, 한국 고가구에 대한 관심도 높아 그의 집에는 조선 시대 수납장이 ‘도코노마(床の間:그림이나 꽃꽂이를 감상하기 위해 벽면에 만든 공간)’ 구실을 하고 있다.

ⓒ더숲 제공홋카이도에 위치한 작은 빵집 ‘블랑제리 진’(위)의 설계비 절반을 빵으로 받았다. 왼쪽은 나카무라 씨가 그린 이 집의 평면도.
이번 방한은 구가도시건축이 주최한 정동도시건축세미나 강연차 이뤄졌다. 참가비(2만원)가 있는 강연임에도 신청자가 몰려서 사전에 마감됐다. 강연 당일인 11월9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410호는 200명이 넘게 가득 찼다. 이날 나카무라 씨는 지난 5월 일본에서 펴낸 〈集いの建築、円いの空間(모임의 건축, 둥근 공간)〉(국내 미출간)에 실린 건축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지금까지 출간된 책이 그의 주력 분야인 ‘집’을 중심에 둔 이야기였다면, 신간은 뮤지엄·카페·호텔·게스트하우스 등 주택 이외의 설계 작품을 모았다.

설계 고려 사항은 ‘놀고 싶은 기분’

강연에서는 일본의 영화감독 이타미 주조(1933~1997) 기념관 설계를 둘러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젊은 시절 ‘재능은 한 가지를 계속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문장이 담긴 이타미 주조의 수필을 읽고, 나카무라 씨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건축적 재능은 없을지 몰라도 건축을 사랑하는 것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기념관 설계에서 그치지 않았다. 기념관 입장권 디자인은 물론이고 기념관 내에 위치한 카페에서 판매할 케이크 모양까지 디자인했다. 건물 모양과 색을 빼닮은 초콜릿 케이크였다. 주택과 기념관, 상업시설을 막론하고 ‘나카무라표 공간’의 완성은 그와 같은 디테일에서 차별화된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대단히 고맙습니다”라는 한국어로 인사를 마친 나카무라 씨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잡고 무대 한가운데로 나왔다.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관객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는 객석의 ‘박씨’를 일으켜 세웠다. “오늘 한옥을 답사했는데 박씨가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의 생일이라고 하더라고요. 여기 모인 사람들과 함께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나카무라 씨의 즉흥 이벤트에 관객도 적극 호응했다. 강연은 그의 선창으로 시작된 생일 축하 노래를 합창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후 나카무라 씨는 강연을 준비해준 구가도시건축 식구들과 함께 술을 곁들인 긴 뒤풀이를 이어갔다.

ⓒ도서출판 다빈치 제공나카무라 씨는 자택 2층으로 올라가는 빈 공간에 서가와 벤치를 만들었다.
〈시사IN〉과 인터뷰가 약속된 시간은 강연 다음 날 오전 9시였다. 인터뷰를 마친 후에는 제주도 여행이 계획돼 있었다. 빡빡한 일정이었다. 숙취는 없었는지,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3초면 잠들고, 2초면 깨어나요. 잠드는 것도 일어나는 것도 빠르지. 고혈압 때문인가(웃음). 아침이라고 해서 기분이 안 좋다거나 별로 안달복달하는 것도 없고, 스태프들에게 짜증내지도 않아요. 그렇지만 역시 밤이 좋지. 언제나 술을 더 마시고 싶으니까(웃음).”

나카무라 씨가 설계를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놀고 싶은 기분(遊び心)’이다. 건축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던, 변변한 콘크리트 건물 하나 없는 어촌마을에서 자랐지만 공간이 사람의 기분을 어떻게 바꾸는가는 누구보다 기민하게 느꼈다. 이제는 고향에 살지 않지만 해외 출장이나 답사를 다녀오는 길이면 그만의 ‘귀향 의식’을 치르곤 한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며 나리타 공항으로 착륙 준비를 시작하면 작은 비행기 창문에 이마를 댄다. 창문 아래로 내다보이는 지바 현의 긴 해안선과 긴 솔숲 사이에 그의 고향이 있다. 그는 그곳에서 부지런히 나무를 타는 ‘나무 위의 거주자’였고, 집으로 돌아오면 ‘동굴 개척자’로 살았다. 벽장 속, 책상 밑, 재봉틀 아래 작은 틈에 몸을 욱여넣은 채 전기 스탠드를 옆에 두고 책을 읽곤 했다. 그런 공간이 집을 완성한다는 생각이 들자 다른 사람의 기분에도 참견하고 싶어졌고, 기꺼이 참견을 청하는 이들에게 손을 빌려주었다.

‘토끼집’보다 더 작은 ‘쥐의 집’

건축학과에 진학했지만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전공투) 자장 안에서 나카무라 씨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체제나 권위에 대한 도전이 가능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다. 졸업 작품은 SF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 영감을 받아 만든 집이었는데, 좋은 평가를 받진 못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당시에도 도쿄 만 계획이나 기치조지(吉祥寺) 역 재개발 계획 따위 큰 프로젝트가 환영받곤 했다. 자신에겐 그런 계획을 실천할 정치력이나 쇼맨십이 부족하다는 걸 일찍 깨닫고 집으로 관심을 돌렸다.

1981년 독립해 설계사무소를 차렸다. 이름은 ‘레밍하우스’다. 기자가 한국에서는 레밍을 부정적 의미로 쓰기도 한다고 설명을 곁들인 후 이름의 뜻을 물으니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쥐띠라서.” 장난스럽게 웃던 얼굴이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일본의 주택은 작다는 의미에서 토끼집(ウサギ小屋)으로 불리곤 했어요. 저는 그보다 훨씬 작은 집을 만들게 됐으니 ‘쥐의 집’ 정도로 이름을 지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리고 레밍은 이동을 많이 하는 쥐예요. 내가 여행을 좋아하니까 ‘여행하는 쥐’의 느낌도 살리고 싶었고. 물론 그보다는, 레밍은 본인의 집을 엄청 소중히 여기거든요. 자신의 집을 짓고 나면 안쪽을 다 핥아줘요. 내가 설계하는 집도 그렇게 하나하나 핥는다는 느낌으로, 포기하는 부분이 하나도 없도록 설계하겠다는 다짐을 담았죠. …그래서 시간이 많이 걸리나 봐요(웃음).”

집은 기꺼이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다. 나카무라 씨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필수다. “스스로를 돌보거나 서비스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시간이 없으면 자기 자신이 외롭게 되어버려요. 젊은 사람들에게 특히 강조하고 싶은데 영화나 음악 감상, 독서… 이런 것들이 없으면 텅 비어버리게 됩니다. 자신을 마주보고 자신과 대화하면서 스스로를 키워야 해요.” 나카무라 씨가 만드는 집에 ‘집 속의 집’이, 혹은 오두막이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특히 그에게 오두막은 자신의 건축을 상징하는 원형이다.

그의 오두막은 전선·전화선과 같은 ‘선’이나 수도관·가스관 같은 ‘관’이 없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에너지 자립 주택이기도 하다. 버블 시대의 ‘광란’이 싫어서 관심을 갖게 됐지만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경험하면서 더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밥 한번 해먹으려고 하면 숯을 피워야 하고 쌀을 씻어 올리고…. 이런 과정은 통일돼 있지만, 사람마다 방법이 다 다르거든요. 이게 ‘생활력’인데 선과 관이 이런 개인의 능력을 점점 없애는 것 같아요.”

그가 실험주택으로 만든 오두막집인 나가노의 렘 헛(Lemm Hut), 고베의 루나 헛(Luna Hut), 가나가와 미술관 등에서 전시한 하넴 헛(Hanem Hut)은 그런 고심의 산물이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작은집(小屋) 열풍과 더불어 무인양품 등에서 아예 상품화하자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거절했다. “저의 가장 중요한 고민이 돈으로 바뀌는 것은 원하지 않아요. 거대 자본이 개입해서 확산시키는 것보다는 자발적으로 조금씩 곳곳에 퍼져나갔으면 합니다. …물론 200억 정도 준다면 망설였겠죠(웃음).”

나카무라 씨는 여전히 ‘현역’으로서 오늘도 설계사무소에서 점심을 만든다. 스태프들과 밥을 나눠 먹으며 보여주고 싶은 주택보다 자신이 살고 싶은 주택을 설계한다. ‘나카무라 요시후미가 만드는 집’이라는 표시가 나지 않는 집을. 집의 주인공은 건축가가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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