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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저지른 범죄에는 시효를 적용하지 말아야”

지난 8월 문무일 검찰총장은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피해자 강기훈씨는 사과의 기본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2017년 11월 29일 수요일 제5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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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일 검찰총장은 지난 8월 기자간담회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언급하며 과거사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강기훈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사건에서 검찰은 여전히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였다(강씨는 지난 7월 1심에서 6억원 배상 판결을 받았지만 당시 수사 검사들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며 항소한 바 있다). 정부 측 대리인인 정부법무공단이 준비서면을 냈는데 여기에 검찰의 뜻이 반영되어 있다. “법원이 수사 과정에서의 진술뿐 아니라 법정에서의 진술을 비롯해 여러 증인들의 증언, 법정에 현출된 객관적인 증거들을 모두 종합해 유죄를 인정했다(준비서면).”

1991년 4월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경찰(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다. 박승희·김영균·천세용 등이 폭력 정권에 항의하며 잇달아 분신한다. 그해 5월8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한다. 검찰은 김씨 유서를 대신 쓰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강기훈씨를 구속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 이 조작 사건으로 강씨는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석방 이후에도 ‘유서대필 사건 강기훈’으로 살아야 했다. 강씨는 진실을 향한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2012년 간암이 발병했다. 그는 2015년 재심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후에도 강씨는 유서대필 누명을 씌운 검찰과 진실을 판단하지 못한 사법부를 상대로 “진정한 용기는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라며 사과를 요구했다. 1991년 검찰 지휘 라인은 김기춘(법무부 장관), 정구영(검찰총장), 전재기(서울지검장), 강신욱(부장검사), 신상규(주임검사), 송명석·안종택·남기춘·임철·곽상도·윤석만·박경순 검사 등이다. ‘오심’을 낸 재판부는 노원욱(1심 부장판사), 임대화(2심 부장판사), 부구욱·윤석종(배석판사), 박만호(주심 대법관) 등이다. 이들 가운데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반성이나 사과의 뜻을 밝히지 않았다. 투병 중인 강기훈씨를 만났다.

ⓒ시사IN 신선영
강기훈씨(사진)가 재심을 신청한 지 7년 만인 2015년, 대법원은 최종 무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유서대필 누명을 씌운 검사와 진실을 판단하지 못한 판사 중에 단 한 사람도 반성이나 사과의 뜻을 밝히지 않았다.


문무일 검찰총장이 처음으로 공개 사과를 했는데?


나는 ‘조폭식’ 사과라고 본다. 실컷 때린 다음 피해자를 찾아가 “어쨌든 때린 건 미안한데 우리 앞으로 잘할게, 잘 지내보자” 하는 것은 조폭들이 하는 식이다. 이게 사과인가. 사과에는 기본 요건이 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자기 행동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등을 얘기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문 총장의 발언을 접하고 국가가 조폭과 비슷해 보여 매우 불쾌했다(최근 대검찰청 검찰개혁위원회는 “검찰의 과거사 반성은 피해 당사자에 대한 직접 사과 없이는 진정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과거사 사건의 피해자와 유족들에 대한 검찰총장의 조속한 직접 사과가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권고했다).

검찰 자체의 진실 고백이 필요하다?


1991년 사건 당시 검찰이 무슨 목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증거를 조작하고 참고인들을 강압 수사했으며,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에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밝혀야 한다. 재발 방지 대책도 얘기해야 나나 국민들이 사과의 진정성을 믿어주지 않겠나?

검찰이 당시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만든 이유를 뭐라고 보나?


1991년 그해 분신이 잇달아 일어났다. 김기설씨가 분신한 5월8일 청와대에서 고위 당정회의가 열렸다. 검찰총장과 안기부장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분신을 부추기는 세력이 있다며 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 지시에 따라 검찰이 움직였다. 서울지검 강력부 전체가 ‘분신 배후 수사’에 나섰다. 강력부 소속 검사들이 총대를 메고 ‘어두운 세력’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내가 김기설씨에게 유서를 대신 써주면서 죽으라고 했다는 얘기를 지어내 공안 정국을 조성했다. 당시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던 노태우 정권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벌인 정권 차원의 조작 사건이다.

ⓒ연합뉴스
1991년 6월24일, 분신자살한 김기설씨 유서대필 혐의로 수배 중이던 강기훈씨(가운데)가 명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한 후 어머니와 함께 성당을 나서고 있다.
공안부가 아닌 강력부 검사들이 수사를 했다?


강력부 소속 검사들이었다. 그때도 마약사범과 조직폭력배를 다루는 강력부가 수사를 해서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러자 검찰이 “이 사건이 정치 사건이 아닌 살인 사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마약이나 조폭 수사를 하던 강력부 검사들 전체가 내 필적을 찾으려고 뛰어다녔다. 강력부 검사들이 시국 사건을 맡은 건 검찰 사상 처음이었다.

당시 수사 행태를 지금도 기억하는가?


내게 유리한 증거는 발견되는 즉시 숨기거나 없애버렸고, 고문에 가까운, 잠 안 재우기를 통해 거짓 자백을 강요했다. 조사 과정에서 검사들이 수시로 검사장에게 보고를 하며 어떻게 수사할지 지시를 받았다. 윗선 지시에 따라 짜놓은 각본대로 수사가 진행되었다. 나를 희생양으로 만든다는 것을 그때도 직감했다.

검찰이 참고인들도 괴롭혔다는데?

내가 나온 고등학교에는 검찰 수사관 20여 명이 들이닥쳤다. 내 필적을 찾는다며 시험 답안지 같은 걸 찾아서 다 가져갔다. 문제는 그런 내 필적을 검찰이 법정에 낸 적이 없다는 점이다. 검찰에 불리한 증거니까 가져다 없앤 것으로 의심된다. 내 주변 사람들도 강압 수사를 당했다. 검찰은 마치 유서를 대필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듯이 말하며 참고인들에게 검찰에 유리한 진술을 하도록 강요했다. 고등학교 동창들이 검찰 조사를 받았고, 내 대학 후배들은 검찰을 피해 수배자처럼 도망 다녔다. 검찰이 원하는 진술을 하지 않으면 나와 공범으로 구속할 수밖에 없다는 엄포도 놓았다고 하더라.

당시 감옥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동료의 유서를 대신 써주고 죽음을 강요한 파렴치한이 되었으니 살인 누명보다 더 견딜 수 없었다. 절망했고 헛웃음만 나왔다. 한편으론 ‘세상이 이렇게 후진 거구나’ 싶었다. 그 이후로 그런 마음이 더욱 짙어졌다. 내가 견딜 수 있는 방법은 냉소였다.

만기 출소 이후 생활은?


3년2개월 만에 출소해 인권운동을 하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생계를 위해 회사에 취직했다. 나는 가만히 있고 싶은데 불러내 말을 하라고 했다. 할 말도 없는데…. 내게는 ‘1991년’이 계속되었다. 재판을 통해 해결할 방법밖에 없다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참여정부 때인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재심 권고를 했다. 재판으로 가는 길이 열려서 희망이 생겼다. 그 순간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되었다. 2008년 내가 재심을 신청하고 서울고등법원이 2009년 재심 결정을 내렸다. 검찰이 항고해 대법원까지 갔다. 대법원에서 2012년에야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재심 신청을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까 2008년 아버지가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2010년에는 어머니까지 돌아가셨다. 대법원에서 재심을 할지 말지 시간을 끄는 동안 스트레스 탓인지 나도 간암에 걸렸다. 그때 언론에서 비판을 하니 대법원도 그제야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2015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재심을 낸 지 7년 만이었다.

손해배상 재판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1심에서 모든 책임을 당시 김형영 국과수 문서분석실장에게로 돌렸다. 이 사건은 1991년 ‘정치검찰’에 책임이 있다. 검찰이 처음부터 무리한 기소를 했고, 사법부도 제구실을 못했다. 1심은 이런 걸 빼고 모든 책임을 국과수 소속 한 사람에게만 물었다. 따지고 보면 사법부도 이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검찰과 일종의 미묘한 공범의식 같은 게 있어서 민사소송 1심 재판부가 수사 검사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판결을 내렸다고 본다. 그게 매우 불순하다고 생각해서 항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소심 진행 상황은?


국가가 가해자였던 과거사 사건에서 가해자가 처벌된 예가 고문기술자 이근안 정도였다. 사법부가 국가폭력 가해자에게 항상 면죄부를 줬다. 사법부를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법률적인 절차를 밟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해당 검사들에 대한 책임을 물으라는 거다. 현 법률 안에서 엄벌을 내릴 수 없다면 최소한 피해자인 내가 납득하는 선에서는 책임을 물으라는 거다. 가해자 가운데 강신욱은 검사장이 되고 나중에 대법관이 되었다. 그런 선례가 계속 남아 있는데 현직 검사들이 비슷한 상황이 오면 똑같이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나.

소송 과정에서 정부 측은 배상액이 적어서 항소한 것처럼 의견을 냈던데.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손해배상 소송에 이겨서 돈을 받을래, 차라리 많이 때려줄래? 이런 선택지를 준다면 나를 포함해 과거사 사건 피해자들은 다 똑같이 답을 할 것이다. 때려주겠다고. 손해배상 소송 과정에서 피해자가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지, 정부가 또 다른 차원의 가해를 얼마나 하는지 이루 말할 수 없다. 피해자로서 위로받고 가해자한테 사과받아야 하는데, 지금까지도 고통을 받고 왜 힘들어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또 다른 차원의 가해란 무슨 뜻인가?

소멸시효 규정을 들고 나와 이미 지급했던 국가 배상금도 빼앗아가는 경우가 있지 않나. 진도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 박동운 선생은 지금 부당이익금 반환 소송을 당했는데 이게 국가가 할 짓인가(손해배상 청구 소멸시효가 지난 뒤에 소송을 제기했다며 배상금을 반환하라는 소송). 과거사 사건 판결문들도 내용을 자세히 보면 국가가 별 책임이 없는데 배상금을 지급한다는 식이다.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진다. 피해자뿐 아니라 그 가족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모르는 그런 감성이 법조인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게 더 큰 문제다.

유서대필 조작 사건은 정치권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정치권이 할 일은 딱 한 가지다. 최소한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나 소멸시효를 적용하지 않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책임져야 할 가해자들은 소멸시효로 책임을 벗어나고 피해자들은 그 소멸시효로 국가로부터 배상금을 받지 못하거나 받은 배상금을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

최근 강기훈씨를 주인공을 삼은 다큐멘터리 영화 <국가에 대한 예의>가 제작됐는데?


간암으로 쓰러져서 일도 못하고 있던 2012년 어느 날 지방에 사는 동생이 찾아와 나를 낙원상가로 데려가 기타 하나를 선물해줬다. 내가 고등학생 때 기타 치는 걸 즐겼다는 것을 기억한 동생의 고마운 마음이었다. 클래식 기타를 치는 분들과 연습했는데 그게 벌써 5년이 지났다. 지금도 기타를 잘 치지 못한다. 연주하는 걸 촬영한 모양인데 나는 그걸 영화에 쓸지 몰랐다. 그 영화를 아직 안 봤다. 나에 관한 보도나 영상물은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거 빼고 되도록이면 멀리한다. 다만 영화 찍을 당시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심정으로 클래식 기타 모임을 만들어 절실히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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