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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풍양속’이라는 말의 괴랄한 효력

한 낭독회에 참여해 글을 읽고 문단 내 성폭력 공론화 이전과 이후에 관하여 많은 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 자리에서 들었으나 그 자리에서만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김현 (시인) webmaster@sisain.co.kr 2017년 11월 23일 목요일 제5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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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28일, 제주도에서는 제1회 제주퀴어문화축제가 개최됐다. 같은 날, 서울 광화문과 여의도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요구 촛불집회 1주년을 맞아 집회가 열렸다. 그날 나는 한 낭독회에 참여해 글을 읽고 문단 내 성폭력 공론화 이전과 이후에 관하여 많은 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 자리에서 들었으나 그 자리에서만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이 있다.

제주시는 혐오 민원을 이유로 제주퀴어문화축제 행사 장소 사용에 대한 승낙을 철회했다. 퀴어문화축제가 개최될 경우 제주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등 공공복리에 문제가 생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보다 앞선 10월21일, 서울 동대문구체육관에서 벌어질 예정이던 ‘퀴어여성 생활체육 대회’도 동대문구청이 미풍양속과 뜬금없는 공사를 운운하며 일방적으로 대관을 취소해버렸다. 공공기관에서 성 소수자 단체의 시설 대관 신청을 미풍양속을 이유로 거부하거나 취소한 사례는 과거에도 많았다. 이쯤 되면 ‘미풍양속’이라는 말이 얼마나 ‘괴랄한’ 효력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시사IN 신선영
지난 7월15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제18회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문예창작을 배우거나 이미 하고 있는 이들이 주축이 된 낭독회에서도 들었다. 문단 내 성폭력 공론화 이후에도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친다는 이들이 학생들에게 “네 소설은 섹슈얼하지가 않아. 남자를 알아야 해” “시 쓰는 건 남자와 여자가 연애하는 거랑 비슷하다” “야, 이년들아… 문제 제기할 거면 해봐,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으냐” 같은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고 있다는 ‘증언’이었다. 한 사람은 “문단은 실재하는 조직이 아니라고 하는데, 왜 문인 한 명, 한 명은 문단을 대표하는 것처럼 말하고 다니느냐”라며 그동안 자신이 선생들에게 들어야만 했던, 문학을 빌미로 한 회유와 협박의 말을 들려주었다. 문단 내 성폭력 공론화 이후, 가해자들이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입막음하고 있는 시점에서 해결책은 뒷담화뿐일지도 모른다는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말도 오갔다.

촛불집회 1주년을 맞아 촛불은 계속돼야 한다는 외침을 듣는다. 그러나 환하게 빛나던 광장에서 모든 이가 평등하고 모든 이가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수의 여성이 촛불을 든 채로 폭력을 당했고, 성 소수자들은 혐오에 노출됐으며, 장애인들은 움직일 때마다 차별당했다. 정권이 바뀐 이후에도 차별금지법 제정 등 소수자 인권 보장을 위한 현안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고, 성 소수자들의 인권을 빌미로 한 정치권과 언론의 혐오 선동은 더 극악해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자리에서 말해졌으나 그 자리에서만 말해져서는 안 되는 말도 있다. “이제는 판을 바꿀 때다. 주홍글씨는 우리에게 찍을 게 아니라 그들, 할리우드 96%를 차지하는 남자 감독들을 포함한 남성에게 찍혀야 한다. 이제 우리가 싸울 때다.” 1997년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에게 강간당한 뒤 비밀유지 조건으로 합의하고 침묵해야 했던 배우 로즈 맥고완은 이렇게 말하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말하기를 통해 생존 싸움을 시작했다

제주퀴어문화축제는 싸움 끝에 개최되었다. 퀴어여성 생활체육대회는 색다른 싸움(movement)으로 전개되었다. 문단 내 성폭력, 위계폭력 피해자들은 가해자에게 협박당하며 여전히 싸우고 있다. 배우 케빈 스페이시, 더스틴 호프먼, 감독 제임스 토백, 브렛 래트너 등은 싸움의 현장으로 끌려 나왔다. 여성들의 성폭력 고발 캠페인인 ‘미투(Metoo·나도 당했다)’는 싸움에 연대할 이들이 이렇게나 많음을 새삼 일깨워주는 중이다. H사(들)의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말하기를 통해 생존 싸움을 시작했고, 그녀들에게 힘입어 사내 성폭력 증언이 SNS에 속속 올라오고 있다. 마치 손을 번쩍 들어 올리듯이.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리에서 시작됐으나 그 자리에서만 끝나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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