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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선생님, 감사합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 최용신은 연고도 없는 샘골마을에 들어가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병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가르침은 후세에 남았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11월 16일 목요일 제5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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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국어 선생님이 ‘중학생의 필독서’라고 하여 몇 권의 책을 열거해주신 적이 있어. 그중 하나가 <상록수>였지. 일제 강점기에 농촌이 살아야 민족이 산다고 외치며 시골 오지로 뛰어들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어른들을 일깨웠던 채영신이라는 젊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상록수>는 오랫동안 ‘한국의 필독서’처럼 자리매김돼 왔어.

이 채영신이라는 작중 인물은 실제 모델이 있었어. 1935년 <신가정>이라는 잡지 5월호에서는 “무지가 우리의 적이라는 커다란 진리를 깨우쳤을 뿐 아니라 생명까지 이에 바친 정령의 주인공”인 최용신이라는 젊은 여성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시인이면서 기자에 영화배우도 겸했던 재능 많은 문사(文士) 심훈은 이 여인을 모티브로 삼아 1935년 5월4일 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 그는 두 달도 지나지 않은 6월26일, 200자 원고지 1500장의 장편 <상록수>를 탈고한단다. 가히 신들린 듯한 속도였지. 심훈을 그토록 들뜨게 했던 여성 최용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연합뉴스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 최용신.

1930년대 초반, 브나로드 운동이라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어. ‘브나로드’는 ‘민중 속으로’라는 뜻의 러시아 말이야. 즉 학생 등 지식인이 민중 속으로 들어가서 무지와 악습을 깨우치고 새로운 삶을 펼칠 수 있게 하자는 농촌 계몽 운동이었지.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은 이렇게 열변을 토한단다. “우리 남녀가 총동원을 해서 둥쳐 매고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서 우리의 농촌 어촌 산촌을 붙들지 않으면, 그네들을 위해서 한 몸을 희생해 붙들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거듭나지 못합니다.” 바로 그 마음으로 실제 인물 최용신은 일 점 연고 없는 경기도 (당시) 수원군 반월면 샘골마을로 들어가게 된단다. 1931년 10월이었어.

무려 86년 전이야. 나이 스물 갓 넘은 처녀가 어색한 서울말을 쓰며(최용신은 함경도 사람이었어) 뭘 가르치네, 뭘 함께 하네 하고 ‘나대는’ 것은 매우 진귀한 일이었지. 냉대와 오해도 잇따랐지만 최용신은 포기하지 않았어. ‘도시 처자가 시골에 와서 뭘 안다고 깝치냐’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논에 들어가 모를 심고 김을 맸으며 한글 강습소를 세우고 산수, 수예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쳤다.

그녀의 노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어. “이 몸은 남을 위하여 형제를 위하여 일하겠나이다. 일하여도 의를 위하여 일하옵고 죽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게 하옵소서.” 그렇게 몸을 돌보지 않고 샘골 사람들과 함께하던 최용신은 몹쓸 병에 걸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죽어가면서도 그녀는 자신보다는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은 어찌하나” 하며 샘골 아이들의 진로를 걱정했단다.

최용신의 가르침을 받은 어린 학생이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어 털어놓는 회고는 그래서 생생하고 뜨거워. “5리 정도 떨어진 우리 집에 선생님이 방문하셨어.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어. 초가삼간 흙 마당에서 어머니 손을 꼭 잡으시고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 ‘어머니, 이 아이는 자라서 크게 됩니다. 지금은 힘들더라도 참고 이겨내시고 자랑으로 키우십시오.’ 곁에 있던 내게 살아생전 처음으로 열심히 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어.”

누군가를 가르치고 깨우친다는 건 그 사람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일이지. 수학 공식 하나의 원리를 깨쳐도 눈앞이 훤해지는 것 같잖니. 교육이란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고 더 넓은 세상으로 도약할 힘을 불어넣고 오늘의 팍팍함이 결코 내일로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희망의 문을 여는 일이었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는 교육의 혜택이 절실한 오지(奧地)와 낙도(落島), 즉 심심산골과 외딴섬들이 그야말로 널려 있었단다. 학교가 세워지고 의무교육이 실시됐지만 배워야 할 사람에 비해 가르치는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결코 끊어지지는 않았지.

1970년 권갑윤·김선희 부부 교사가 전남 안좌도 근처의 사치도라는 작은 섬에 부임했어. 주민이라고는 마흔여섯 가구. 사치분교 전교생이래야 78명. 선착장도 없는 섬의 아이들은 ‘지적 수준부터 체력까지’ 모두 바닥이었다고 해. 권갑윤 교사는 아이들의 체력을 길러보고자 농구를 가르칠 생각을 해. 처음에 아이들은 새끼줄로 둘둘 말아 만든 농구공을 들고 생나무와 사과 궤짝에 쇠고리를 박아 만든 농구대에서 농구를 해. 집안 어른들은 무슨 공놀이냐고 농사일이나 하라고 노발대발했다지만 재미를 붙인 아이들을 말릴 수는 없었지. 아이들은 여름에는 뻘밭에서 뒹굴고 겨울에도 양말을 손에 끼고 농구를 했어.  

섬마을 선생님 부부가 만들어낸 작은 기적

권갑윤 부부는 월급을 털어 염소 한 마리를 구했고 그 젖을 아이들에게 먹이며 유일한 ‘체력 보강’을 했어. 가끔 뭍에 나가 일상 용품을 구해오던 권갑윤 교사는 사오라는 물건 대신 농구 용품을 사와서 아내의 실소를 자아내기도 했지. 이 섬에 농구대가 들어오던 장면은 사뭇 눈물겹구나. “봉급을 털어 목포에 가서 정규 농구대를 구입, 두 시간 동안 배를 타고 안좌도까지 온 후 농구대를 함께 등에 메고 8킬로미터의 산길을 걸어 다시 한 시간 동안 나룻배를 타고 간신히 농구대를 운반하는 데 성공했다(<동아일보> 1972년 6월17일자).” 온몸이 땀에 젖은 부부 교사가 농구대를 끌고 사치분교 앞에 나타났을 때 아마 수십 명의 사치분교 학생들은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호하지 않았겠니. 데굴데굴 구르고 농구 골대에 매달려 발버둥치지 않았겠니. 수십 년 전 최용신 선생님을 만났던 어린이처럼 “태어나서 처음으로 열심히 살고 싶은” 의지가 샘솟지 않았겠니.  

ⓒ1004섬 블로그 갈무리
1972년 소년체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전남 신안군 사치분교 농구팀.

사치분교 농구팀은 농구라는 걸 접해본 지 고작 7개월 만에 목포 지역 농구대회에서 우승하는 괴력을 발휘했어. 1972년 처음 열린 소년체전에 당당히 전남 대표로 나서게 됐지. 소년체전 무대 1차전에서 그들이 61대58,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 순간 부부 교사와 꼬마 선수 12명은 모두 얼싸안고 울어버렸단다. 사치분교 농구팀은 승승장구해 결승에 진출했지만 부상을 입지 않은 선수가 없을 만큼 탈진 상태였고 아쉽게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지. 경기를 마치고 나오면서 권갑윤 선생님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해.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안겨준 것이 무엇보다 기쁩니다.” 

이 성과는 24년 후 화려하게 부활한단다. 사치분교 농구팀의 리딩 가드로 7번 넘버를 달고 뛰었던 심재균이 목포상고 농구부 감독으로서 협회장기 전국 농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거야. 목포 개항 100년 만의 첫 구기 종목 전국 우승이었다지. 심재균 감독은 선수들에게 “연습을 게을리하고 이기려는 건 도둑놈 심보”라고 다그쳤다고 해(<경향신문> 1996년 5월28일자).” 아마 그는 24년 전 수 킬로미터의 산길을 낑낑대며 농구대를 지고 날랐던 선생님의 한마디, “약속을 지키자”를 기억하고 있었겠지.  

오늘날에도 대도시의 임용고시 경쟁률은 치열한 반면, 농촌이나 기타 도서 지역 등에는 선생님들이 부족해서 아우성이라는 소식이 들려. 오지(奧地) 자체는 없어져야 할 단어이고, 도시와 농촌의 근무 여건 차이를 줄여나가는 게 국가의 의무일 거야. 도시에서의 임용고시 경쟁률이 높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 그럴수록 자신의 불편함을 무릅쓰고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윤동주의 시에서 인용)을 찾는 선생님들에 대한 경의는 높아간단다. 우리 역사에 많았고 지금도 많은, 하지만 그리 알려지지 않은 선생님들께 인사하자꾸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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