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 1년차 겨울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학과 행정조교를 맡고 있던 선배의 연락을 받고 학과 사무실로 갔다. 동기 대학원생 한 명이 먼저 와 있었다. 선배는 씁쓸하게 웃으며, 학과장이 나와 내 동기 둘 중 한 명을 후임 조교로 뽑으라 했다고 전했다. 선배가 택한 방식은 동전 던지기였다. 나는 앞면을 골랐다. ‘운명의 100원’짜리 동전이 선배의 손을 떠나 공중으로 던져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동전이 다시 선배의 손으로 떨어지기 전에 나는 사무실 문을 박차고 도망쳤어야 했다. 잠시 뒤 펼쳐진 선배의 손바닥 위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근엄하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심정으로, 내 조교 생활은 시작되었다.
 

 

 

 

 

학과 행정조교 장학금은 월 130만원이었다. 등록금을 내고도 책값과 용돈 정도는 나오는 금액이었다. 재학 인원이 적어 업무량이 많지 않은 학과의 경우 학과 조교 자리에 대학원생 자원자들이 몰리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과 행정조교는 일이 많기로 문과대, 아니 전교에서 손꼽히는 자리였다. 주말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갈비뼈에 금이 갔는데도 월요일에는 나와서 업무처리를 해야 할 지경이었다. 교수 10여 명, 강사 수십명, 학부생 수백명과 관련된 업무를 조교 단 한 명이 처리하는 구조였다. 업무 매뉴얼도 따로 없어서 정말 급할 경우 아무나 조교 일을 시킬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전임 조교가 동원되었다.

당시 나는 박사과정 2년차였다. 9학점 강의를 듣고, 발표를 준비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조교 업무와 병행해야 했다(심지어 교수의 부탁으로 학회 간사 일도 맡았다). 강의에 늦거나 빠지는 건 다반사였고, 마지막 학기에는 기말 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했다. 그 강좌를 담당했던 교수는 나를 따로 불러 호되게 질책했다. “네가 왜 대학원에 다니는지 잘 생각해봐라. 공부가 직업인 대학원생이 일 때문에 보고서를 못 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눈물이 났다. ‘쟤는 학과 조교니까’라며 적당히 넘어가 주지 않는 그 교수가 원망스러운 동시에 고마웠다. 대학원생이 조교 노동을 하는 것은 결국 대학원에 다니기 위해서인데, 내 경우는 주객이 바뀌어 있었다. ‘학생’이자 ‘연구자’로서 정체성은 희석되고, 어느새 ‘실수투성이 행정조교’라는 정체성이 나를 규정하고 있었다. 이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데에는 수년이 걸렸다. 사실 지금도 한쪽 발목 정도는 잠겨 있는 느낌이다.  

‘학생’ ‘연구자’ 정체성은 희석되고

물론 모든 조교 노동이 내 경험처럼 가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학과마다 교직원이 배치돼 있는 대학의 경우 학생 조교는 단순 사무만을 처리하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대학원을 다닌 학교처럼 학생 조교가 학과의 행정업무를 전담해야 하는 경우 지옥문이 열리기 십상이다. 조교의 책임과 권한을 넘어선 ‘정치적’ 판단을 매 순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강의 시간표 작성 문제가 그렇다. 교수·강사들은 저마다 좋은 시간, 좋은 강의실을 원하는데 이들 사이의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조교의 몫이다. 정말이지 월 130만원 받고는 못할 일이다.

대학 당국 처지에서는 장학금 수혜라는 명목으로 정규직 교직원이 담당할 일을 ‘저렴한’ 학생 조교로 대체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에는 학령인구 감소를 빌미로 정규직 교직원 자리에 비정규직, 파견직, 행정 인턴을 투입하는 대학이 늘어나고 있다. 학생 조교들의 노동환경은 더욱 열악해질 수밖에 없다.

기자명 홍덕구 (인문학협동조합 조합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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