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보도국 야근을 하다가 본 타사 뉴스 리포트가 기억났다. 국내 연구진에 의해 돼지의 심장을 이식받은 원숭이가 50일 넘게 생존해 있다는 소식이었다. ‘에이, 겨우 50일일 수도 있지. 인간 장기 이식까지도 가능해질 거라는 희망이 너무 과하게 섞인 것 아니야?’ 직업병일 수도 있겠다. 뉴스를 모니터하다 선배들과 이따금 숫자에 관한 논쟁을 하곤 했다. 어떤 숫자를 기준으로 ‘의미 있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현장을 떠나 있다 보니, 지금 우리에게 ‘파업 50일’은 실로 큰 의미가 있는 기간임이 틀림없다.

KBS의 언론 노동자들은 어느덧 50일 넘게 ‘생존했다’. 누군가는 지금까지 해봐도 결론이 안 난 거라면, 슬슬 접고 현장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느냐고도 한다. 하지만 ‘생존자 2000명’은 그 기간에 적지 않은 사건들을 만들어냈다. 뉴스 앵커와 진행자들은 스튜디오를 나왔고, 주요 시사·예능 프로그램의 제작진들도 촬영을 멈추고 피켓을 들었다. 현 경영진의 사퇴를 결정하는 이사회 구성원 11명 가운데 지난 정부 여권이 추천한 김경민 교수가 이사직에서 물러났다. 고대영 사장은 ‘보도 무마’ 대가로 국정원으로부터 현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져 고소당했다. 유야무야되었던 ‘2011년 민주당 도청 의혹 사건’에 대한 검찰 재조사도 앞두고 있다(2011년 6월 비공개로 열린 민주당 연석회의 회의록 일부를 한선교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공개하면서 불법 도청 의혹이 불거졌다. 검찰은 당시 불기소 처분했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제공KBS 막내 기수인 43기 신입 직원들이 회사 간부들의 제작 압력 경험을 나누고 있다.
50일 파업을 처음 맞이한 KBS의 각 직종 ‘막내들’은 미래를 본격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다사다난한 공영방송사를 겪어낸 선배들과 함께 거리로 나왔지만, 다시 돌아가서 더 오랜 시간, 더 많은 짐을 져야 한다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라디오국의 막내 유기성 PD는 파업 전 KBS 제1라디오에서 〈안녕하십니까, 홍지명입니다〉라는 시사 프로그램 연출을 맡았다. “어느 날 국장이 신입인 저를 따로 불렀어요. 사람이 없으니 너 혼자 이 프로그램 좀 맡아야겠다고 하셨어요. 아직 좀 더 배우고 입봉하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꺼내지 못했죠. 물론 몸으로 부딪쳐 배우는 것도 좋겠지만, KBS가 5년, 10년 뒤를 내다보는 조직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어요.” 새 아이디어를 쏟아낼 때마다 ‘여유 되면 해보고 아님 말아’라는 눈빛을 보내는 간부들을 마주하면서, 입사 때 갖고 있던 열정이 흔들렸다고 했다.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올려놓고, 알아서 열매가 자라기를 바라는 느낌을 받았다는 거다.   

“이번 파업을 통해서 저 스스로에게 기대한 게 있어요. 더 이상 자기 검열을 하지 않겠다는 것, 그것만은 매일 다짐하고 또 다짐해요.” 4년간 ‘KBS 입사 준비생’으로 지내왔다는 시사교양국 이현정 PD는 입사 후 느낀 조직 분위기를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최순실 사태, 촛불집회를 취재하는 팀이 너무 없어서 이상했어요. 이렇게 중요한 사건들을 취재하고 있는 팀이 손에 꼽을 만큼 적은 건 무엇 때문일까. 이 아이템을 취재해도, 소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이미 사라진 뒤였던 거죠.” 각종 시사 프로그램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지난 시간들, 그 끝에서 KBS라는 조직에 합류하게 된 건 어쩌면 선배들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고도 했다. 치열하게 부딪쳐온 선배들을 보며 이해하게 됐다. “제가 속해 있는 〈명견만리〉는 사회현상을 다루는 프로그램인 만큼 자유롭게 발제하곤 했어요. 그런데 조금이라도 민감한 주제를 다루려 할 때면 간부들에게 고초를 겪는 선배들을 바로 곁에서 목격하게 됐거든요. 저 역시 이 분위기에 벌써 적응해버린 건 아닐까 무서웠어요.”

직종을 불문하고, 막내들이 토로한 “무서웠다”는 이야기가 가슴에 박혔다. 조직에 찍힐까 봐 무서운 게 아니라, 공영방송의 언론인으로 떳떳하게 살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 사회부 사건팀 막내인 송락규 기자는 부끄러운 리포트의 진실을 고백했다. 지난 6월, 주한 미국 대사관 앞에서 열린 사드 반대 집회를 취재한 날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9시 뉴스 리포트를 준비하고 있는데, 저녁 7시가 넘어서 갑자기 경북 칠곡의 사드 찬성 집회 내용도 담으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어떤 성격의 단체가 어느 정도 규모로 참여했는지 제대로 취재하지 못한 상황, 막내 기자는 용감하게 이의를 제기해봤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현장 촬영 영상도 없었는데, 유튜브에 올라왔다는, 참가자가 찍은 영상을 활용하라는 지시까지 내려왔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기본 원칙조차 지키지 못한 뉴스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제공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제공전국언론노조 KBS본부에서 제작한 뮤직비디오 〈오늘부터 우리는〉의 한 장면(맨 위 ), KBS 노조원들이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이인호 KBS 이사장(위).
“부스러기가 되지 않겠다”

막내들은 언론인을 꿈꾸며 공부하던 시절, 시청자 처지에서 KBS를 날 서게 비판하며 성토했던 그때가 오히려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고들 했다. “최순실보다 날씨가 더 중요하냐는 누리꾼들의 비난 댓글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더라고요.” 희대의 국가적 위기 상황을 맞이하고도, 제대로 취재할 수 없는 환경에 놓였음을 피부로 느낀 이들이다. 시사 기능을 잃어버린 프로그램들을 내보내는 당사자가 되었고, 시청자와 청취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 무언가와 멀어져간다는 생각에, 갈증은 더욱 커졌다.

막내들은 KBS 파업 투쟁가를 만들어 앞장섰다. 걸그룹 여자친구의 ‘오늘부터 우리는’이라는 노래를 개사해 선보였다. “이제는 용기 내서 고백할게요~ 고대영 퇴진을 오늘부터 우리는~.” 주인공인 사장부터, 파업을 함께하는 전 직원을 등장시킨 뮤직비디오는 온라인상에서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걸그룹 못지않은 노래 실력으로, 뮤직비디오까지 연출한 예능국 김슬기라 PD는 〈1박2일〉 조연출이다. 10년 넘게 장수해온 KBS의 대표 예능 〈1박2일〉은 촬영이 수주째 중단된 상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김 PD는 파업과 함께 모두가 동료로 현장에서 함께하는 KBS의 분위기에 놀랐다고 했다. “그야말로 정글이 따로 없는 경쟁 속에서, 자식 같은 프로그램을 두고 나온 팀 선배들을 관찰했어요. 좋은 프로그램들을 만들며 역사를 만들어낸 선배들이, 예능 프로그램의 갈 길을 격의 없이 토론하는 분위기를 먼저 만들어주고 계세요. 저도 수많은 스태프가 10년간 함께 만들어오고 있는 프로그램이 이렇게 시청자들에게서 멀어지게 되진 않을까 두려움이 있었지만, 더 큰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됐다는 막내들이 만든 뮤직비디오는, 모두가 함께하는 이번 파업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미리 두려워하고 걱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부스러기가 되지 않겠다”라는 다짐은 달라지겠다는 확신으로 들렸다. “50일 넘게 이렇게 해도 아무것도 안 바뀐다고요? 무력감을 갖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것만은 확실해요.”

기자명 김빛이라 (KBS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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