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태씨(53·사진)는 2009년 박지만 EG 회장의 비서실장 정용희씨에게 “박용철을 혼내주라”는 청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이를 ‘살인 청부’로 받아들이고 거절했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 5촌 살인 사건의 전사를 겪은 셈이다.

현재 5촌 살인 사건을 재수사 중인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지난 10월31일 마씨를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다. 그 직전 〈시사IN〉 취재진과 만났다. 경찰에 할 말을 언론에 전해, 수사가 제대로 될 수 있게 하겠다며 처음으로 이름과 얼굴을 걸고 공개 인터뷰했다.

그는 5촌 살인 사건의 뿌리로 지목되는 육영재단 폭력 사태와 관련된 내부자였다. 2009년 1월 육영재단 폭력 사태 당시 친박지만 인사로 채워진 재단 쪽 용역업체 책임자였다. 당시 마씨는 박근령 쪽 인사를 ‘정리’하는 일을 했다. 육영재단 교육부장을 맡았지만 3개월 만에 ‘털고’ 나왔다. 마씨는 박용철씨 피살에는 육영재단 분쟁이 자리 잡고 있다고 여겼다.



ⓒ시사IN 신선영
육영재단 폭력 사태에는 어떻게 개입했나?

처음에 ‘정의 대 불의의 싸움’이라 여겼다. 깡패가 장악한 육영재단을 구해내야 한다고. 우리는 재단이 정식 고용해서 배치 신고된 경호업체였다. 그래서 당시 〈시사IN〉에서 ‘형제의 난’이라고 보도(〈시사IN〉 제70호 ‘슬기를 키우는 어린이 나라, 용역의 전쟁터가 되다’ 기사 참조)한 걸 보고 기자에게 전화까지 해서 항의했다. “남매간의 싸움 아닙니다”라고(웃음). 그런데 재단에 들어와서 보니 내가 생각하던 판이 아니었다. 당시 1억원 정도를 덜 받아서, 정산하고 3개월 만에 손 털고 나왔다.

육영재단은 2007년에도 폭력 사태가 있었다.

그때 정용희가 진두지휘했다. 한센인을 동원해 박근령을 끌어냈다. 동원된 한센인을 지휘한 임두성은 2008년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되었다. 박근령이 이사장 직위 취소를 당했는데도 계속 근무한다는 점 등을 문제 삼았다. 이후에도 몇 번 싸움이 있었다. 그러다 나를 불렀고 박근령 쪽을 내쫓았다. 마음에 들었는지 정용희가 이왕 해준 거 또 한 가지 부탁 좀 하자더라.

무슨 부탁이었나?

2009년 봄 정도로 기억하는데, 강남의 한 사무실에서 미팅을 끝내고 육영재단으로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정용희가 운전을 했고, 전○○(현 국회의원 비서관)이 같이 탔다. 같이 일하는 후배까지 모두 넷이었다. 정용희가 내게 “회장님 같은 실력자를 못 봤습니다. 그래서 좀 부탁드릴 게 있는데 들어주시면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뭐냐고 물으니 머뭇대다 아주 고상하게 웃으면서 “박용철 좀 혼내주시면 안 돼요?”라고 했다. 그래서 “다리를 부러뜨려줘요?”라고 되물으니 좀 있다가 “그 정도라면 이야기 안 하죠”라고 했다. 그러면 사람을 죽여달라는 이야기 아닌가. 나는 사람 죽이는 일은 안 한다고 딱 잘랐다.

명시적으로 죽여달란 말을 한 건 아닌데.

당시 정용희와 육영재단 고문 이○○이 만나면 “박용철이 그 ××는 신동욱 그 ××를 못 죽여서 화근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냐”라고 말하곤 했다. 신동욱이 주장하는 2007년 칭다오 납치 사건 같은 일이 있었더라. 그러면서 이○○이 “너 같음 그냥 깨끗하게 보냈을 거 아냐”라고 했으니, 내가 혼내주라는 말을 뭐라고 들었겠나.

2년 후 ‘5촌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정용희가 나한테 한 말을 실현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당시 육영재단 고문 이○○ 등에게 전화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그 ×× 까불다 죽은 거지”라고 하더라. 그래서 정용희한테 전화했다. “시원하시겠소”라고 하니 버벅대더라. 그래서 “그다음은 나요?”라고 물었다. 자기들의 과거를 아는 사람을 정리한다면 나 또한 피해갈 수 없으니까. 그때부터 차 안에 도끼를 갖고 다녔다. 그래서 2012년 취재차 나를 찾아온 주진우 기자에게도 “그러다 죽는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후 이슬람에 귀의해 문산에서 이슬람 성원(사원)을 운영하고 있다.

기자명 김은지·주진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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