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s=Newsis10월15일 개막된 제17차 당대회에 입장하는 후진타오 주석(앞)과 장쩌민 전 주석(뒤).
10월15일 개막한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는 이변의 연속이었다. 10월17일부터 19일까지 열리는 중국 공산당 비밀회의라는 또 한 차례 하이라이트 판이 남았지만, 당 대회 이전의 모든 예상이 한 차례 뒤집어진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번 대회를 계기로 확고한 친정체제를 구축하려 했던 후진타오 주석의 계획은 일단 도전에 직면했다. 더불어 ‘리틀 후’라 지칭되던 후계자 리커창(李克强) 랴오닝성 당서기의 앞날도 불투명해졌다. 반면 산송장 취급을 받던 상하이방 맹주 장쩌민 전 주석과 후 주석의 정적인 쩡칭훙 부주석의 존재감이 당 대회 전반부를 압도했다.

‘단결·비판·단결(중공당의 단결은 비판을 통한 단결이다)’. 이는 중공당 비밀회의가 반세기 동안 지켜온 내부 슬로건이다. 이번 당대회의 향방을 좌우할 10월17~19일 비밀회의를 앞두고도 “당내에서 후진타오의 정책과 노선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라는 게 베이징 정가 소식통의 전언이다.

후진타오는 왜 비판을 받았는가. 17차 당대회를 둘러싼 당 내부와 외부의 온도 차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적어도 지난 5년간 후진타오 주석이 내치에서 이룬 업적에 대해서는 별로 흠잡을 데가 없어 보인다. 따라서 이번 당대회가 후 주석의 독주로 끝날 것이라던 당 바깥의 예상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중국의 동북 방면 안보에 민감한 영향을 미칠 중대 현안이 발생했고, 당 내에서 그동안 우려와 비판이 누적돼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스터리의 상당 부분이 풀릴 수도 있다.

‘오만이 부른 자충수.’ 후 주석의 처지를 한마디로 압축한 이 말이 당 대회 기간에 베이징 정가에서 흘러나왔다. 지난 몇 년간 동북의 안위와 직결된 북·중 관계, 특히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관계에서 그가 보여준 오만함이 지금 부메랑이 되어 그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얘기다. 북·중 관계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가장 최근의 사례가 바로 지난 남북 정상회담 기간 중 있었던 ‘3자 종전선언’ 얘기다.

정전협정의 서명 당사자인 중국을 앞으로 있을 종전 및 평화협정 논의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얘기가 다른 누구도 아닌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중국 공산당으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조선’은 1992년 덩샤오핑이 ‘중국의 동북 방면을 지키는 전략적 방벽’이라고 규정한 이래 중국의 안보를 위해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대상이다. 이런 이유로 중국의 역대 지도자들은 ‘조선’에서의 기득권 상실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득권 유지가 문제가 아니라, 평양이 송두리째 미국 영향권 아래 들어갈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중국 공산당의 노선, 동북의 안보라는 시각에서 당내 논란을 피해갈 수 없는 상황이다.

3자 종전선언은 중국 배제 신호탄?

‘3자 종전선언’과 관련한 김 위원장의 최근 발언은 절대 우발적으로 나온 게 아니다. 최근 북·중 양국의 내부 흐름을 집약한 김 위원장의 의도된 발언이었던 것이다. 지난 9월 중순께부터 북·중 양국은 김 위원장의 방중 문제를 둘러싸고 내부논의를 거듭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양국 관계가 더욱 심각하게 꼬여버렸다고 한다.

당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하나는 북한 측이 그동안의 관례대로 중국 측에 월동용 에너지를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중국이 떨떠름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방중 시기에 대해 북한 측은 당대회 전을 희망했는데, 중국은 당대회 준비 때문에 바쁘다며 11월 초에 보자는 식으로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내심 후 주석의 환대를 기대했던 김 위원장은 자존심이 크게 상했고, 급기야 “후 주석이 사과하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라며, 후 주석의 아픈 곳을 통렬하게 헤집고 나왔다고 한다.

후 주석이 과연 무엇을 사과해야 한단 말인가. 지난 2004년 4월 김 위원장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당시만 해도 장쩌민 당 중앙군사위 주석이 중국의 실세였다. 장 주석과의 면담에서 김 위원장은 대규모 경제 지원을 요청했는데, 장 주석이 이를 수락하는 대신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앞으로 북한 개발을 중국에 위탁하라는 것이었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중국 역시 집요했다. 1년 후인 2005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후진타오 주석이 중국식 경제개발의 장점을 장황하게 열거한 것도 사실 장 주석과의 대화 내용을 환기시키며 김 위원장의 결단을 재촉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중국은 김 위원장이 결단만 내리면 40억 달러 상당의 대북 지원을 단행할 태세였다.

결국 고심 끝에 김 위원장이 2006년 1월 중국 남부 순방길에 올랐는데, 이는 장쩌민-후진타오로 이어지는 중국 지도부의 제안을 수락한다는 퍼포먼스였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후 주석의 배신이었다. 즉 경제 지원은커녕 투자를 빌미로 정보요원을 보내 북한의 민감한 정보를 수집하다 들통이 나버린 것이다.

당시 후 주석이 이 일에 대해 유감 표명만 했어도 북·중 관계가 그토록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후 주석은 유감 표명 대신 김 위원장과 감정 싸움에 몰두해 ‘조선’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노선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직후 중국 외교부가 반대하는데도 미·일 주도의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에 동참한 것이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당시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 많은 우려와 비판이 제기됐으나 후 주석은 권위로 눌러버렸다.

몇 차례 화해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결국 북한은 10월의 핵실험을 거쳐 핵 보유국이 되었고, 북·중 간의 균열을 눈치 챈 미국의 접근에 발맞춰 북·미는 밀월 관계로 치달아갔다. 최근의 북·미 대화는 과거와 달리 중국을 철저히 배제한 채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평양에 미국의 외교대표부가 들어서고, 중국의 동북 연선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이다.

사실 양국 관계의 원인 제공자는 후진타오 주석이다.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혈맹 또는 형제당에 오만한 태도를 견지했다. 더구나 그 약속은 전임자인 장쩌민 주석이 김 위원장과 처음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장 주석 역시 충분히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안이다. 지난해 9월 천량위(陳良宇) 상하이 당서기 숙청 이후 상하이방에 대한 후 주석의 탄압에 맞서 반격의 기회를 노려온 장 주석이 이 점을 놓칠 리가 없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내의 ‘단결 비판 단결’이라는 전통 앞에서는 어떤 지도자도 자유로울 수 없다. 비판이 제기되면 반드시 합당한 해명을 해야 한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조선’과의 관계, 그리고 김정일 위원장과의 관계를 후 주석이 과연 어떤 식으로 방어할 수 있을까.

중공당 대회를 앞둔 미묘한 시기에 ‘3자 종전선언’을 화두로 격발한 김 위원장의 절묘한 한 수가 급기야 대륙의 형세를 뒤흔드는 불씨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기자명 남문희 전문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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