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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세보라는 창으로 본 세상

문정우 기자 woo@sisain.co.kr 2017년 11월 11일 토요일 제5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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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의 석학 양자오 씨는 현대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고전으로 세 권의 책을 꼽았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다. 마르크스는 사회를, 다윈은 생명을, 그리고 프로이트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꿨다. 이 세 사람은 한없이 혼란스럽거나 신비로워 보이기까지 했던 각각의 분야에 법칙, 질서, 그리고 연관성을 부여했다. 세 사람이 등장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 세계 전체가 이성과 과학의 탐구 영역으로 들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 세 권 중 내 삶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책은 <꿈의 해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다른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집중했던 사춘기의 끝자락에 읽은 이 책은 한줄기 빛, 처음 얻어걸린 돈오돈수였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험을 했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유신 시대 학생이었던 내게는 프로이트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경이로웠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것에 가차 없이 의심의 잣대를 들이댔다. 집요하게 사실의 이면에서 진실을 캐내려고 애썼는데 그 결과물이 놀라웠다. 정상적인 인간의 의식 속에서 건져낸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그것은 때로 추악하거나 민망했다. 그렇더라도 그것들이 뿜어내는 존재감은 도저히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위풍당당했다.

프로이트가 위대한 지성으로 남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이론이 아픈 사람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정상적인 사람들조차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빈번하게 모순된 행동을 하는 것을 본다.” 프로이트는 멀쩡한 사람들이 자주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는 이유를 실수와 꿈을 예로 들어 풀이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소한 실수조차도 이유가 있는 신체적 현상이며 항상 의도와 의미를 갖는다. 어렵게 표현하자면 실수 행위는 정신을 지배하는 어떤 상황 탓에 다른 방식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특정한 목적에 봉사한다. 이를테면 증오하는 사람의 이름을 자꾸 잊거나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인물이나 물건을 자꾸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걸 말한다. 사람들은 실수를 가리켜 흔히 액땜을 했다고 하는데, 겉으로 표현될 경우 보복을 당할 염려가 있는 본심을 실수가 감춰준다는 점에서 통찰이 깃든 말이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기만에 능한지 보여주는 것은 역시 꿈이다. 프로이트는 꿈이야말로 우리(혹은 환자)의 문제를 읽을 수 있는 비밀 텍스트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든 수단(검열·전위·상징화·왜곡)을 동원해 본심을 감추면서도 또한 표현한다. 그런 점에서 꿈은 편하게 잠들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이를 꿈-과정이라고 부르는데, 품고 있는 소망을 환상적인 방식으로 마치 충족된 것처럼 그려내려고 애쓰는 걸 말한다. 따라서 그런 결과물인 꿈은 엉터리 판타지 소설처럼 도무지 맥락이 닿지 않을 수밖에 없다. 꿈을 ‘번역’해야만 우리가 진정한 자아에 가닿을 수 있다는 게 프로이트의 생각이다. 이런 모두의 꿈과 실수가 모인 게 바로 사회와 문화다. 꿈이나 실수 정도만으로 우리가 억제된 욕망을 처리하기 힘들 때 우리는 정신적으로 아프게 마련이다. 그런 경우 마치 꿈속에서 튀어나온 사람처럼 현실 세계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말과 행동을 하게 된다. 아슬아슬하게 그 경계에 있는 듯한 사람도 적지 않다.

예전부터 프로이트에 꽂혀서 그랬을 것이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유명한 이들 가운데 언뜻 납득하기 힘든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프로이트 식으로 통역해보는 버릇이 붙었다. 요즘에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정상과 질병의 경계에 있지 않은가 의심하며 지켜보는 중이다(이는 <시사IN>의 편집 방침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 개인의 생각이다).

ⓒ한성원 그림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두 사람은 각각 2, 3위 득표를 했다. 보통 낙선자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게 통례지만 두 사람은 모두 쫓기듯 당 대표로 복귀했다. 당의 다수 의원이 반대하는데도 이런 ‘실수’를 강행한 데는 분명 의도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당을 살리기 위해서’ ‘정통 보수의 몰락을 막기 위해서’ ‘다당제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 ‘안보에도 경제에도 무능한 문재인 정부를 심판하기 위해’ 등등. 두 사람이 하는 이런 정도의 얘기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현실성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들의 진정한 자아와 소통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지를 못한다. 그들의 얘기를 번역해보면 내 귀에는 “나는 절대로 지지 않았다. 대선은 끝나지 않았다. 싸움은 이제부터다. 문재인은 대통령이 아니라 아직 후보에 불과하다”라고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두 사람은 사실상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대선 불복 행보’를 계속하고 있으며 이런 시대착오성이 그들이 꿈속에서 헤맨다는 인상을 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프로이트의 연구는 한국 야당 지도자들의 치졸한 행동보다 훨씬 더 큰 문제를 해명하는 데 더 유용하다. 프로이트가 후학들에게 남긴 가장 큰 선물은 모든 질병은 생리학적인 동시에 정신활동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점을 일깨웠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의사들에게 몸의 병과 마음의 병은 별개였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생기고 난 뒤에야 마음이 몸의 병을 일으킬 수도, 치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프로이트 사후 80년이 가까워오는 지금 의학계는 술렁대는 중이다. 프로이트의 발상이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결과를 빚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로 단순히 우리가 먹는 것, 행하는 것, 생각하는 것을 뛰어넘는 어떤 것이었다. 모든 게 마음에 달렸다는 얘기는 각오를 다지기 위한 구호 이상이었다. 믿음이 실제로 불치의 병을 고치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으며, 뇌 스캔 기술을 통해 그 메커니즘 역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전 세계 의학계는 플라세보(placebo, 속임약)와 실제 치료의 경계선이 어딘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는 중이다.

‘믿음’이 어떻게 불치의 병을 치료할까

과학자들은 수십 년 전부터 이 플라세보의 효과를 알았다. 그들은 생약을 임상 실험할 때 주로 플라세보를 이용했다. 진짜 약을 복용하는 그룹, 속임약을 복용하는 그룹, 아무것도 복용하지 않은 그룹으로 나눠 특정 약의 순수한 효과를 측정하고자 했다. 이 실험 과정에서 과학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진실이 드러났다. 속임약을 복용한 그룹 중에서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현저하게 증상이 완화되는 이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플라세보는 세트와 분장이 완벽할 경우 더욱 강한 효력을 발휘한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 그들의 목에 걸린 최신 청진기, 간호사의 정갈한 캡, 건강진단, 임상 실험, 첨단 실험 기기, 찌르는 듯한 소독약 냄새와 형편없는 대기실의 음악까지도. 병원의 이런 풍경을 연구자들은 ‘의학극장용 소품’이라고 부르는 데 이런 게 잘 갖춰질수록 치료 효과는 높다. 동네 병원보다는 종합병원이 병을 잘 고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알약보다는 주사약, 기왕이면 수술을 하는 게 효과적이다. 연구자들의 푸념에 따르면 이는 ‘매우 모호한 현상에 대한 매우 모호한 반응’을 다루는 일이다.

효과가 워낙 강력하다 보니 과거에는 노련한 의사가 궁여지책으로 쓰던 ‘꼼수’ 수준에 머물렀던 이 플라세보 시술이 정식으로 치료 영역으로 들어오고 있다. 미국의 플로리다 대학에서는 파킨슨병 환자의 뇌 가운데서 동작을 관장하는 부분에 깊은 자극(DBS)을 가하는 마이크로 전극을 심는 수술을 허용했다. 의사들은 이 시술이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 혹은 플라세보 효과만 있는지 구분하지 못한다.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몽족 샤먼이 집에 차려놓은 진료실에서 병에 걸린 이들을 치료한다. 주술사는 병에 걸린 이의 영혼이 죽은 자들이 사는 곳으로 끌려들어가지 않도록 죽은 돼지를 대신 제물로 바치는 푸닥거리를 한다. 이는 텍사스 주 메르세데스의 종합병원이 치료 효과를 인정한 덕분에 허가 내고 하는 일이다.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사지절단 중상을 입은 현역 군인이나 베트남 전쟁 이후 수십 년간 모르핀을 맞아온 퇴역 군인들이 플라세보 시술을 받고 현저한 증상 호전을 경험했다.

어떻게 믿음이 몸을 치료하는지 퍼즐 한 조각을 뇌 스캔이 보여준다. 정상적인 고통은 상처 부위에서 시작해 아주 짧은 순간 척추를 거쳐 고통을 감지하는 뇌의 부위로 올라간다. 플라세보 효과는 반대로 뇌에서 시작된다. 전두엽에서 발생한 치료 기대가 뇌간 부위로 신호를 보내고 그것이 아편과 같은 진통 물질을 생성해 척수로 흘려보낸다. 통념처럼 정신력이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생성한 치료 물질이 우리를 치료한다. 우리는 과연 이 플라세보를 통해 우리 안에 있는 수백, 수천의 명의를 끌어낼 수 있을까. 연구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이제 겨우 입구에 도달했을 뿐이다.

프로이트의 연구가 의학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듯이 플라세보 연구 역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카를 마르크스가 일찍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말했던 것은 탁월한 통찰이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플라세보 효과는 우리가 같은 믿음을 공유한 집단에 둘러싸여 있을 때 특히 강력하다. 어째서 가톨릭·이슬람·힌두교의 순례 규모는 날로 커졌는지, 왜 교회와 절은 점점 웅장하고 화려해져야만 했는지 플라세보 효과는 긍정적으로 설명한다. 생로병사라는 인간의 근본 한계, 결국 통증이 우리의 역사를 지배했다는 미국의 작가 멜러니 선스트럼의 얘기를 곱씹을 수밖에 없다. 그런 관점에서 홍준표 대표나 안철수 대표를 보노라면 분노보다는 연민이 앞선다.

참고한 활자:<정신분석학 개요>(열린책들), <꿈의 해석을 읽다>(유유), <내셔널 지오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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